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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대림절4주/ 첫 번째 법과 두 번째 법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21-12-16 (목) 10:28 2년전 592  
20211219/ 대림절 4주
첫 번째 법과 두 번째 법
히브리서 10:5~10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께서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과 가정 위에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이요, 네 번째 주일에 밝힌 대림절 초의 의미는 사랑(love)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첫 번째 법, 두 번째 법’이라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 첫 번째 법에 대한 오해

첫 번째 법은 ‘모세의 법’이요, 그것이 집약된 것이 ‘십계명’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히브리서의 말씀을 통해서 첫 번째 것을 폐하셨으므로 첫 번째 법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구약성서는 신약성서를 확증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법을 담은 구약성서와 두 번째 법을 담은 신약성서의 무게는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 상호보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 모세 5경

성경은 크게 보면 한 권이지만, 조금 세세히 보면 신약과 구약이고, 구약성서를 좀 더 가깝게 바라보면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로 나눌 수 있고, 율법서는 모세5경으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모세5경의 주인공은 모세요, 모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출애굽 사건이요,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면서 내세웠던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에게 예배할 때 드릴 제물인 짐승까지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은 단지 노예생활로부터의 탈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깊은 관련이 있기에 모세5경을 ‘예배’에 관한 법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합니다. 

■ 이스라엘의 예배

이스라엘의 예배는 신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광야에서 드리는 예배로 시작되었습니다. 광야는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에 예배와 삶은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법에 예배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계명들도 사실은 예배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신전에서 드리는 예배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예배가 형식적인 예배로 전락하는 순간 자신들을 지배하던 이집트의 예배가 될 것이며, 그런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다시 노예생활로 돌아가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그들의 예배가 형식화 되면서 주변 국가들과 다를 바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지만, 바알에게 무릎 꿇는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예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는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분열,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남왕국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 고레스칙령에 의한 귀환, 다시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숙청사건이 있기까지 예배의 본질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 이스라엘의 5대 제사

히브리서 10장 5절과 6절에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고 합니다. 

레위기 1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5대 제사는 번제, 소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입니다. 번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짐승이나 다른 제물을 불에 통째로 태워서 바치는 제사요, 소제는 고운 가루를 내어 드리는 예물입니다. 속죄제는 부정하게 된 성소를 깨끗하게 하는 예식이요, 화목제는 동물을 희생제물로 바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원해진 관계를 화목하게 회복하고자 드리는 예물이요, 속건제는 ‘사회적인 죄’, 또는 ‘도덕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본문에는 번제와 속죄제가 제시되어 있는데, 율법에 따라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인 예배가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예배가 형식적인 예배가 되니, 성소를 깨끗하게 하는 예식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정성껏 곡물을 곱게 가루로 만들어 드리는 소제도 실종되고,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타락한 삶을 지속하니 속건제도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화목제를 드린들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따라 매년 반복해서 드리는 희생제사가 사람들을 완전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황소나 염소의 피가 그들의 죄를 없애준다고 믿었지만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원하지 않으시고, 형식적인 예배가 드려지는 성전의 외형이 아무리 크고 깨끗한들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 율법의 역할

그렇다면, 율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율법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율법의 역할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의로운 삶인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할 법 규정들을 보면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할 첫 번째 계명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없었다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 이웃의 것을 빼앗는 일” 이런 것들 역시도 죄인 줄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이야,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고대근동에서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 이웃의 것을 빼앗는 일’은 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고, 능력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 중에서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법들 역시도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온전히 지켜져야 안식일도 의미가 있고, 그래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는 것이요,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인 것입니다.

■ 고대근동의 법전과 십계명의 차이

제가 신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세계 최초의 성문법전은 함무라비 법전이었는데, 최근 고고학회에서 새롭게 발견한 ‘우르남무’법전이 함무라비 법전보다 200년 이상 앞서 기록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법전은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불리는 ‘길가메시’의 무대인 메소포타미아 ‘우르남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계사 시간에 함무라비 법전은 ‘인류 최초의 평등법’이라고 배웠습니다만, 함무라비 법전은 물론이고 우르남무 법전은 ‘가진 자들, 권력자들을 위한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십계명은 ‘약자들을 위한 법’이라는 점에서 고대근동의 여타의 법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 당시 혁명적인 법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망간 종을 숨겨주는 일에 관해서, 고대근동의 법은 ‘남의 재산을 몰래 감추는 행위’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신명기 법전에서는 ‘그 주인에게 돌리지 말고 보호하라(신23:15)’고 합니다. 고대근동의 법에서 여성은 남자의 소유물이요, 재산에 불과했지만, 모세의 법은 여성뿐 아니라 과부에 이르기까지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5경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법이었습니다.

■ 율법의 온전한 회복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인 율법도 문자와 형식이라는 껍데기만 남게 되자, 인간을 해방하는 법이 아니라 옥죄는 법이 되었고,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하는 법이 아니라 권력자들을 위한 법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5정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를 회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9절의 말씀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첫 번째 법, 즉 모세의 법을 중시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스라엘이 고난의 역사를 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가까이 예언자가 없던 시절을 살던 이스라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중심으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온전하게 회복하기 위해서 각종 부수적인 법들을 만들면서, 스스로 문자적인 법조문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본래는 약자들을 위한 율법이 약자들을 옭아매는 사망의 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에서서 폐기되어야 할 첫 번째 법이 의미하는 바는 ‘본질을 상실한 왜곡된 율법’인 것입니다.

■ 첫 번째 법의 한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 전까지는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바대로 5대 예물을 드려가며, 예배하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형식화 된 예배는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없었고, 만일, 인간이 예배를 잘 드려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자기의 의’를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하나님이 필요 없어지는 것입니다.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2,194일 동안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이었고 치욕스러운 전쟁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당시 18세기 계몽주의, 경건주의 그리고 낭만주의 의 영향을 받아 등장했던 자유주의신학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 나라까지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히틀러를 지지하던 교회들도 이런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인류는 인간 스스로 인간을 구원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 나라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법은 죄에 대한 깨달음을 주지만, 왜곡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 두 번째 법

두 번째 법은 사랑의 법이요, 복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이 말은 첫 번째 법이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첫 번째 법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넘어선 법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시킬 때, 이전의 것을 다 폐기하고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의 일정부분은 그대로 사용하면서 소프트웨어를 바꿉니다.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바탕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시대를 살아가니 “율법은 필요 없다, 구약은 필요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첫 번째 율법에 따라 드리던 모든 제물을 통합한 희생제물이요, 이 희생제물은 매년 혹은 절기마다 반복해서 드리던 각종 제물을 통합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법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 한 번의 희생제사’이며, 이 제사로 인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이들은 ‘영원히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를 사하는 제사는 필요 없으니, 기쁨의 제사만 남은 것입니다.

■ 두 번째 법을 따르는 이들의 삶

앞에서 첫 번째 법인 십계명을 말씀드릴 때,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법조문에 명시된 이유는 일상의 삶도 예배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 법을 따르는 이들 역시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 희생제물이, 화목제물이 되신 것처럼 두 번째 법을 따르는 이들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말씀에 국한하면, 소망을 굳게 지키고, 더욱 힘써 모이고, 인내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이웃 사랑’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3절의 말씀에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 법의 은혜를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의로는 가능하지 않았던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가능해 졌으니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주님을 맞이하시어, 두 번째 법이 주는 은혜 가운데 거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기도]
우리에게 두 번째 법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게 하시고, 그 은혜를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에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소외된 이웃을 돌보고 나누는 삶을 통해 삶으로 드리는 예배 또한 풍성하게 하옵소서.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사랑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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