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2022신년주일]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21-12-30 (목) 11:22 2년전 660  
20220102(신년주일)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에베소서 1:3~6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새해를 맞이하신 모든 분들을 하나님께서 한 해 동안 임마누엘로 지켜주시길 바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지난 한 주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계획하며 보내셨을 것입니다. 칼로 무 자르듯 가는 해와 오는 해를 분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새해를 맞이할 때에는 작심삼일이 될지라도 좋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작심삼일이라면, 사흘에 한 번씩 계획을 세우자!’고 합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살던 대로 살겠다는 안이한 태도보다는 ‘뭔가 새롭게 시작하려는 마음’을 갖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마음을 새롭게 하고, 새로워진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우리의 삶도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아직 새해 계획을 세우지 못하셨다면, 구정이 오기 전에 좋은 계획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 두 이레 강아지만큼

저는 24절기 중에서 ‘동지’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어둠의 시간이 가장 긴 날이기도 하지만 동지가 지나면 밤이 조금씩 짧아지기 때문입니다. 구상 시인의 ‘은총에 눈을 뜨니’라는 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연에 ‘이제사 비로소/두 이레 강아지만큼/은총에 눈이 뜬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두 이레 강아지’는 태어난 지 14일 된 강아지입니다. 강아지는 태어난 후 ‘두 이레’ 즉 14일이 지나면 비로소 눈을 뜬다고 합니다. 강아지는 눈을 뜨면서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하겠지요. 그러니 이 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눈을 뜬 후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구상 시인은 이런 은총에 대한 깨달음은 ‘마음의 눈을 뜨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시 ‘마음의 눈을 뜨니’에서 달라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무심히 보아오던 마당의 나무, 잔디, 발길에 차이던 조약돌 하나까지도 새롭게 보인다고 합니다. 내 주변의 것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니 주변의 것들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들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바꿔야할 것이 있다면 바꾸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꾸려고 노력을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 ‘마음의 눈을 뜨면’ 온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1)

2022년 교단의 주제는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입니다.
한남교회는 올해 총회의 주제를 따랐습니다. ‘코로나19이후’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히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길 바라면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인간 군상을 봅니다. 지금도 충분히 어둡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동지를 향해서 가는, 더 어둠이 깊은 시간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아닌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두운 시대에 가장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소위 ‘사회적인 약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속히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와야겠습니다. 그래서 ‘어둠이 지나가고 속히 빛이 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어둠과 빛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에 따라 이뤄집니다. 그러나 시대의 어두움은 그냥 빛을 기다린다고 어둠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움 후에 빛이’ 오기를 소망하며 살아간다면, 뭔가를 해야 합니다. 뭔가를 하려면 어두움의 실체를 알아야겠지요.

■ 이 시대의 어두움

이 시대 어두움의 실체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태계 파괴로 인해 직면하고 있는 팬데믹 상황입니다. 둘째는, 양극화의 심화입니다. 우리의 경우 삼시세끼 걱정하던 시대는 벗어났지만, 빈부의 격차는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이후, 양극화현상은 더욱더 심화되었습니다. 셋째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해야할 교회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세상과 연대하고, 세상에 대한 책임성을 교회가 포기했습니다. 생태계의 파괴, 양극화의 심화로 인해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할 교회의 민낯은 소망의 빛조차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내 몬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라는 주제는 어떤 의미일까요?

■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2)

이 슬로건은 기독교장로회가 제106회 총회에서 독창적으로 만든 슬로건이 아닙니다. 이 슬로건이 처음 등장한 것은 중세시대입니다. 중세시대는 십자군 전쟁을 위시하여 마녀 사냥, 종교재판,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절반이 죽음으로 내몰리던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교회가 성경을 멀리하고 세속적인 이익에 몰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뜻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삼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암흑의 시대에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이 자신들의 소망과 의지를 담아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지금은 어두움이 지배하고 있지만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올 것이라는 간절한 소망조차도 없었다면 그들은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그런 소망의 빛까지도 없었다면, 그냥 어둠 속에 묻혀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노력도 무력할 때, 더는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불평할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불평이나 절망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여전히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의 씨앗을 하나님께서 품으셔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어두움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살다보면 누구나 그런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라는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엡 1:3~14)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성서일과 중 서신서의 본문의 일부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개인적으로 목사의 길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할 때 목사의 길로 인도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목사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기에 신학교 다닐 때에도,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계속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제목은 ‘목사가 안 되면 안 될까요?’였습니다. ‘목사가 아니라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고, 할 터이니 제발 다른 길로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와 고민이었습니다. 성경통독을 한 번 더 하고 결단하기로 했습니다. 학기 중이었지만, 이주 정도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고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베소서 1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었는데, 14절까지 무려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씀이 13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을까? 본문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데 4절의 말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하는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나를 택하셔서 목사의 길을 가도록 계획하셨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벤치 아래를 보니 개미떼가 일렬로 줄을 서서 기어 다닙니다. ‘아, 나만 창세 전부터 계획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저 작은 개미도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을 가지고 이 땅에 내어 놓으셨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으니 세상 모든 것들이 소중해 보였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나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이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 귀한 존재들을 어떻게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저에게 사람과 자연을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그때 저는 목회의 길을 가기로 결단했고, 지금 여기에 서 있습니다.

■ 바이러스를 품어버린 튤립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튤립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비쌌냐면 17세기 네델란드에서 한 송이 값이 집 한 채 값을 호가할 정도로 비쌌습니다. 검색해 보니 지난주 압구정동 현대아파트4차 44평 시세가 44억 7천 만 원인데 튤립 한 송이가 그 정도 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참으로 비싼 튤립이죠. 이 튤립은 셈페르 아우구스트 튤립종입니다. 이 튤립이 만들어진 과정은 이렇습니다.

셈페르 아우구스트 튤립은 땅 속의 바이러스를 받아들여 만들어진 변종입니다. 다른 종들은 땅 속의 바이러스를 퇴치하려고 하다가 다 죽었는데, 이 튤립은 바이러스와 공존을 했던 것입니다. 이 튤립을 통해서 바이러스는 단지 퇴치나 박멸의 대상이거나 혐오의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3차 부스터 샷까지 맞았습니다. 예방주사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이러스를 몸에 넣음으로써 항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방의 차원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혐오와 차별이 만연하는 이 시대에도 필요합니다. 어떤 대상을 혐오와 차별로 배제하기보다 사랑과 포용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훨씬 품격 있고, 보람 있고,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 ‘어두움 후에 빛이 온 세상’이 아닐까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새해에는 ‘마음이 눈을 뜨셔서 곳곳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시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지만, 어두움 후에 빛이 온다는 소망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을 가진 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혐오와 차별이 판치는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우리의 시야가 넓어집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은총에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는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기도]

새해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 신년주일에 하나님의 은총에 눈을 뜨길 소망하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어두움 후에 빛이 온다는 소망을 품고 살아가라는 격려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귀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혐오와 차별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pt가 포함된 설교문을 보시려면 클릭하세요.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