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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3) - " 거듭난 자들(영적 인생)이 먹는 양식 "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22-05-01 (일) 20:36 1년전 518  

본문 4:31~38, 왕상 3:5-14, 3:1-11

 

부활절 셋째 주일이다. 계절의 여왕이란 별칭을 받는 오월의 첫 주일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오늘을 어린이와 청소년 주일로 맞이하고, 본 교단은 교회교육주일로도 제정해 지킨다. 모두가 낳고 성장하는 미래 세대를 제대로 보호하고 육성하자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주일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저출산(低出産) 시대를 맞이하면서, 초등학교 교실들마저 남아돌아가는 시대에 돌입했다. 실로, ‘소수로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한 육성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어떻게 하면, 큰 걱정 없이 아이를 잘 낳고 기르는 나라가 될까? 또 어떻게 하면 이미 세상에 나와서 자라고 있는 어린 세대들을 잘 기르고 육성시킬 수 있을까? 이 모든 일에 정부와 사회와 가정들은 깊은 관심과 대책을 마련해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을 받은 우리 교회들도 당연히 응답을 해야만 한다.

 

그 교회의 응답은 정책적인 측면에서 보다는, 영적 신앙적 측면에서 제시해야한다. 그게 무엇일까? 그것은 각 가정과 부모들이 생산한 자식들을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밝힐 하나님의 건강한 백성이요 자녀들로 키워낼 것인가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해결의 방향(方向)을 우리는 이미 지난 주일에, 3장에서 찾아냈다. 혈과 육으로 세상에 나온 생명체들을 하늘과 위로부터 거듭난 생명, 곧 육적 인간이 아닌 영적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일에서 찾았다.

이 일은 부모로부터 전수(傳受)받은 혈육에 의한 생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변화된 생명의 길에 들어온 생명들로, 재생산하고 길러내며 파송하는 일들을 교회가 수행하므로서 이루어진다. 마침 오늘의 말씀들은 그런 거듭난 새 차원의 세계와 삶과 문화의 내용들을 다양하게 소개하면서, 우리의 온전히 거듭난 삶의 출발을 이끌어준다. 그 방식은 거듭난 사람들은 어떤 삶의 양식을 취하고 사는 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한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최근 방영 중인 KBS 역사드라마 <이방원>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내용은 태종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그 아들들인 대군(大君)들 사이에서 전개되는 매우 긴박한 궁중 비사(祕史)들 중의 하나다. 특히 장자요 세자인 양녕 대군과 셋째 아우이자 또 다른 유력한 예비 후보로 떠오른 충녕 대군이 차기(次期) 임금의 자리를 놓고,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다.

 

그 둘의 대립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누구든 탈락하는 대군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비 태종이 왕위에 올랐던 자기 경험과 원경 왕후 민씨의 가문 몰락의 쓰라린 경험들이 두 형제들의 대립에 대한 우려를 더욱 불러온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현실은 장자의 지위에 걸맞지 못한 모습의 세자와, 셋째이지만 그러나 훌륭한 군주의 덕성과 역량을 보유한 아들 충녕이, 왕의 허락 하에서, 피할 수 없는 대권 경쟁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결국 그 형제들은 서로 부딪쳤다. 그 때 그들의 주제는 <내가 곧 보위(寶位)에 오르게 되면, 너는 - >이었다. 그들은 각자 상대를 향한 자기 가슴에 담긴 거친 입장들을 이렇게 밝혔다.

 

먼저 형이자 세자인 양녕이 동생에게 말했다. ‘너는 나에게 죽게 될 것이다’. 무척 섬뜩한 적개심을 정적인 동생에게 쏟아냈다. 그러자 아우 충녕이 양녕에게 이렇게 응수했다. ‘형님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며, 내가 끝까지 보호해 드릴 것입니다.’ 형은 죽음과 보복을 전했는데, 동생은 공생과 평화를 전한 것이다. 실로 육()과 영()의 역사적 대결이었다! 그 때 하늘은 결국 누구의 손을 들어 주었나? 생명과 평화를 선택한 동생인 충녕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가 바로 이조 제4대 임금인 세종(世宗)이었다! 그에게서 비로소 정적 제거가 살아지고, 오직 백성을 위한 위정자요, 모든 위정자들의 참 모델이 우리 역사에 등장했다. 그는 선왕들의 정적을 향한 보복 관행을 끊고, 큰 품으로 모두를 가슴에 품으면서, 오직 백성들을 위한 충성된 위정자의 길만을 취하면서 살았다. 우리 말인 한글 창제도 거기에서 나왔고, 오늘의 대한민국의 기반도 그에게서 나왔다! (부디 이런 모습을 새 집권층인 윤석열 정부가 배우기를 바란다.)

 

육의 사람은 죽어도 그 삶의 양식을 저버리지 못한다. 생각과 마음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의 사람, 곧 부활생명을 받아서 거듭난 사람은 모든 것을 새롭게 열어간다. 생각도, 인생관도, 가치관도 변화되어서 새 출발 한다. 삶의 패러다임의 대변화에 자신을 바친다. 자기도 선친처럼 누군가를 죽여야 산다는 생각에 매인 양녕에서 벗어나, 모두를 살리면서 사는 것이 진정한 정치요 지도자임을 깨달아 새 세계를 열어가는 충녕이 되게 한다. 이제 오늘의 말씀에 나타난 위인들이 취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그들의 양식>에 대해 알아보자.

복음서/ 4:31-38/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방문은 그 자체가 파격이었다. 모두가 사마리아를 저주 받은 집단이요 불결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간주하면서 배척하고 살아온 시절이었기에, 그곳을 스스럼없이 찾으시는 예수의 행보는 실로 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의 파송을 받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사마리아는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기회가 필요하고 의사가 필요한 무리들과 땅으로 보셨기 때문이었다(9:12).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그곳 사마리아에 들어가신 예수께서 수가의 우물가에서 만난 어느 한 여인과의 긴 대화시간 동안에(7-26), 제자들이 동네에 들어가 음식을 마련하여(8) 주님께 드리는 순간에 나왔다. 그 때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糧食-food)이 있다고 언급하신 것이다(32). 그러자 제자들은 누군가가 와서 주님에게 먹을 것을 갖다 드렸기 때문으로 생각했다(33).

 

1) 그러자 주님은 문제의 그 양식에 대하여 입을 여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34). 무슨 말씀인가? 이는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입 속으로 들어가는 육체를 위한 양식뿐 만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영혼과 정신을 위한 양식이 있음을 구체적으로 밝히신 말씀이었다(8:3, 4:4 참조).

 

그 양식은 인간을 일반 동물들과 확연히 구별 짓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물들은 오로지 자기 몸을 살리는 음식에만 매달려 산다면, 만물의 영장(靈長)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그것 이외에도 또 달리 취할 처신(處身)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야말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창조적 발상과 생명의 가치를 이웃과 세상과 자연에까지 공유하려는 삶을 위하여, 헌신하며 추구하며 사는 의로운 행동들을 하면서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을 모를 때, 인간은 그 누구나 마귀가 쳐 논 죄악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한 타락한 삶에서 해방되지 못하면서, 그야말로 동물적(動物的)이요 본능적인 삶으로부터 해방 받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게 일상적 삶은 언제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집착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6:31).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있을 때, 그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되는 세상이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6:32-33참조).

 

2) 따라서 주님이 당신에게 그런 음식이 있다고 표명하신 것은 사실 그런 음식이 당신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도 다 있어야 되는 음식이라는 점을 던지신 강력한 메시지였다. 주님은 우선 당신의 제자들이 먼저 깨닫고 보기를 원하셨다. 동시에 이런 차원의 삶을 회복(回復)함이 곧 거듭남인 점을 일깨우고자 하신 것이다. 죄와 사망 권세에서 벗어난 부활신앙인들이 취할 위로부터 공급된 양식임을 전하려 하신 것이다. 그 양식 속의 메뉴까지 밝히셨다.

 

3) 그 점을 위하여, 주님은 양육과 파송과 선교의 장을 지켜보는 자로서의 추수(秋收)에 임하는 제반 마음가짐 등을 차례로 언급하셨다(35-38절 참조). 선교인에게 필요한 마음과 자세는 농부의 마음이요 연대하는 태도이다(35). 인간들만 추수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자원과 자료와 기반과 시기를 다 부여하심을 알고 함께 선교에 임하면 된다(36). 무엇보다도 우리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즐기며 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38).

 

주님의 이런 말씀과 교훈은 그곳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을 통해 펼쳐진 놀라운 선교(4:27-30참조)가 하늘 아버지의 선제(先制)적 개입으로 인하여 놀랍게 펼쳐진 것으로 판단하신 데서 나왔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각이 열릴 때, 우리의 선교도 훨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 구약 / 왕상3:5-14 / “듣는 마음을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소서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은 수많은 백성을 거느린 왕으로서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애타게 찾는 인물이었다. 왕 개인으로서의 필요한 것들도 숱하게 많았을 터이지만 그 모든 것에 우선해서, 자신은 물론 온 백성들 전체까지를 위해서도 함께 필요한 것을 찾아서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는 건강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답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실 줄 알았다. 자기를() 강하게 하기 보다는 전체와 모두()가 온전히 되기를 원했다,

 

1) 솔로몬 왕은 기브온에서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한 후, 꿈에 하나님의 내방(來訪)을 받는다. 그러면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너는 구하라는 여호와의 기막힌 요구를 받는다(5). 그 때 그는 자신의 어린 자로서의 미숙한 데에다 선악과 공사에 대한 분별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저 수많은 백성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펼치기가 불가(不可)하니, 왕인 자신에게 먼저 듣는 마음(이해의 마음)을 주시고 재판할 수 있게, 선악을 분별하게 해 달라고 구했다(6-9).

 

2) 이에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신다(10). 왕으로서 자신에게 우선 필요로 할 것들이 많을 터인 데에도 불구하고(, 장수, , 원수 생명 등등) 그런 것들을 일체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구함은 결국 공의로우신 여호와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면서, 여호와로부터 구한 것과 구하지 아니한 것까지를 더불어 받는 축복을 받는다(11-13, 6:33참조). 전무후무한 영광스러운 왕의 반열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3) 이렇듯 거듭난 자의 마음,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은 구하고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자신의 것보다는 하나님의 것,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기를 먼저 구한다. <주의 기도>에서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구한다. 우리들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먼저 구하며 사는 삶이 강화되어야 한다. 내 필요보다는 우리의 필요를, 내 것보다는 공동체의 것을, 내 식구보다는 하나님 가족의 유익을 우선하여야한다.

 

3. 서신서 / 3:1-11 / “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명심하자. 교회 공동체는 땅의 양식이 아닌 하늘 양식을 구하려고 온 무리들이다. 곧 주의 뜻을 찾아서 듣고 배우며 행하고 펼치고자 모인 거듭난 가족의 모임체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에 모여, 먼저 자신의 육적인 것들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분부하신 말씀과 뜻을 받아 걸머지는 훈련을 계속하며 산다. 이는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게 부활 공동체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골로새서 본문이 이런 모습을 잘 보여 준다.

 

1) 모이면 우선해야 할 일들이 있다(2-5) - 위의 것(하나님의 것 & 신령하고 영적인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육신의 것 & 인간의 것)을 내려놓는다(2). 모인 신앙인들은 세례를 통하여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음을 경험한 무리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옛적인 삶의 습관들이 자동적으로 해소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영적 훈련을 통하여, 육에 속한 찌꺼기들인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과 탐심들을 죽이는 일이 지속해야한다(3-5, 1:29-30 참조).

 

2) 그리고 예전에 우리가 깊게 빠져서 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불러들여왔던 우리 내면의 잔재(殘滓)들도 성령 치유(治癒)의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입술의 부끄러운 말들과 서로 거짓말하는 따위들이다. 이런 것들로 우리는 아직도 수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아프게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가족과 교우들과 이웃들 사이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것들을 역시 옛 사람에 속한 것이기에, 속히 씻어버려야만 한다(6-9).

 

3) 우리는 새 사람을 입은 자이다. 창조주의 형상에 따라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이다(10, 13:12, 4:22-24 참조). 따라서 그 누구에게도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만유(萬有=all)이요 만유 안에 계셔서, 새롭게 하심의 근거와 목표이시다(11). 그의 인격과 생명과 사랑의 옷을 두텁게 입고 살아야, 이 험한 사탄의 세파를 극복해 낸다.

 

o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위에 것과 신령한 영적인 것을 외면하고, 육의 것과 땅의 것에 끌려 다니며 살 수 없다. 삶의 여정에 필요한 것들인 땅의 것들은 위의 것을 먼저 구할 때 얻게 되고 또 복되게 향유할 수 있다. 육의 음식에 집착하지 말라. 하늘의 양식, 곧 우리를 택하신 주의 뜻과 그의 의를 이루는 일에 전념하자. 우리의 필요는 그 분이 미리 잘 아신다. 솔로몬처럼 분별력 있게 구하자. 하나님의 거룩하고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성령께서 나를 마음껏 사용하시기를 간구하며 살자.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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