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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생명, 새 사람, 새 남편,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22-05-26 (목) 23:12 1년전 430  



1.

 

로마서 주제 중 하나를 율법과 믿음으로 뽑으면 초점을 잘못 맞춘 것입니다. 믿음 일반에 대한 논의가 아닙니다. 우상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지요. 초점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율법 vs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하든지, 줄이라고 하면 율법 vs 예수님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율법이나 예수님과 어떤 관계일까요?

 

앞에서 이렇게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율법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은 옛사람이고 예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새 사람“, 우리 성도들이라고요.

 

이것을 죽음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성도는 율법에 대해 죽은 사람입니다. 대신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2.

 

오늘 본문에서는 이점을 다른 비유로 설명합니다. 율법은 옛 남편, 예수님은 새 남편으로요.

 

이 비유를 매끄럽게 이해하려면 먼저 두 가지 점을 처리해주어야 합니다. 첫째, ‘율법은 옛 아내, 예수님은 새 아내라고 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당시 문화 때문입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이니 율법이나 예수님을 남편에 배치한 것이지요. 둘째, 본문에 숨어있는 한 주장을 드러내어야 문맥과 맞게 비유가 작동합니다. ”율법에 대해 성도들이 죽은 것을 이 비유에서는 성도에 대해 율법도 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갈 6:14b). [1]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절은 이렇게 묻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1절의 이 구약의 율법인지 로마의 법률인지 더 연구해봐야 하겠지만, 지금 법률을 생각해보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사가 마무리되었어도 피의자가 죽으면 사법당국에서 법적인 절차를 종료합니다.

 

율법과 성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 대해 성도들이 죽은 것처럼 성도에 대해 율법도 죽었습니다. 율법이 남편이라면 사별한 남편입니다. 당시에 남편의 권한이 컸다는 것 아시죠? 남편이 살아있으면 아내는 그 남편에 법으로 묶여 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죽으면 묶여 있음에서 풀려납니다. 우리 성도들은 사별한 남편인 율법의 지배에서 해제된 사람들입니다.

 

 

3.

 

그렇다면 성도들은 이제 완전 자유’(소극적 의미에서)인가요? 함께 살아야 하는 인간 사회에서도 이러한 자유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제한됩니다. 만일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로빈슨 크루소라면 어떨까요? 성경은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남아있지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완전 자유인 것 같지만 엄격히 말해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얽매여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자신에 휘둘리면서.

 

자기 자신의 횡포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자유는 기독교 신앙에서 얻어집니다. 유일한 절대자이신 하나님만을 인정하니 온갖 잡신(雜神)들의 횡포에서 벗어납니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회심기에 그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후 누리게 된 잡신으로부터의 자유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잡신이 아니고 만일 사람이라면 조금 절대화해도 될까요? 미안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은 그것도 원천적으로 차단됩니다. 사람 쪽도 예수님만으로 충분하지요. 그리고 사람 속에는 이단 교주는 물론 신앙 지도자와 성도 자기 자신도 포함됩니다. [2]

 

율법도 이러한 예수님으로 대체됩니다. 이점을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을 성도의 옛 남편으로, 예수님을 성도의 새 남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율법을 떠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즉 예수님께 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4).

 

오늘 본문을 다룰 때 많이 등장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특이한 경우이지만 성도와 율법, 성도와 예수님의 관계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3]

 

 

<어떤 여인이 한 남자와 결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 남자는 완전주의자로서 모든 면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여인은 이런 남편이 존경스러웠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남편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가정 생활에도 철저한 규칙을 제정하여 시행했습니다. 규칙을 깨뜨린 식구들에게는 엄격한 벌칙을 적용했습니다. 아내는 잘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실수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점차 모든 면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마침내는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녀의 삶은 한마디로 말하면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편이 죽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홀로됨이 충격이었지만 솔직히 마음속에는 어떤 해방감이 느껴졌습니다. 남편이 죽은 지 몇 년 후에 직장 친구의 소개로 다른 남자와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이 남자는 사고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경험 탓인지 그는 매사에 이해심이 많고 동정심이 많았습니다. 아내가 실수할 때에도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늘 따뜻한 위로를 베풀었습니다. 새로운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이 여인은 점차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규칙이 없어도 그녀의 새 가정에는 따뜻한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남편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고 한없는 애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새로운 활기로 가득 찼고 매우 의욕적으로 미래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현실 속에서 이처럼 진짜 완벽한(이상적인) 남편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 이런 남편 같으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사별한 남편이 율법이라면 새 남편은 예수님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남편이라는 비유가, 남자 성도들에게 어색하다면 심판과 코치를 생각해보십시오.

 

심판은 우리를 잘했다, 못했다, 틀렸다 점수를 매깁니다. 반면에 코치는 잘못을 지적 하지만 과정일 뿐입니다. 다시 해보자고 격려하고 가르쳐주고 도와서 훌륭한 선수로 만들어줍니다. 심판이 율법이라면 예수님은 코치이신 것이지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보혜사(保惠師)라고 하셨는데 보혜사를 코치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예수님은 보호하시고 혜택주시고 가르쳐주시는 분이셨고 지금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통해 우리 성도와 함께 하십니다.

 

무술에서 기본자세가 중요한 것 같이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자세는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예수님께 굳게 붙어(11:23) 예수 은혜와 예수 능력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4]

 

 

 

[1] 비유가 문맥과 약간 어긋나는 것을 이렇게 보정(補正)하면 됩니다.

[2] 제 생각에 이러한 기독교 신앙 구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3]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 버전을 인용합니다.

[4] 지난 수요저녁기도회(525, 본문 7:1~4)에서 나눈 로마서 설교문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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