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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3) - " 천국과 예수를 찾아낸 사람들의 삶 "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22-06-26 (일) 20:50 1년전 503  

본문) 엡 3:14~21, 창 32:22-32, 마 13:44-52 


강림 후 셋째 주일이다. 날씨는 이미 무더위를 느낄 정도가 되었고, 장마 기운마저 느끼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수목(樹木)은 우거져서 몇 달 전과는 확연히 다른 숲속의 조망(眺望)을 안겨준다. 인간으로 보면, 완전 기운이 왕성한 청년(靑年)시대에 접어든 때로 보인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듯한 세대, 곧 청년의 세대와 같은 때란 말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얼마나) 자랐는가’, ‘무엇을 발견했나’, ‘어디로 가는가’   

   

최근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서 자기는 ‘대통령을 처음 해 보아서 모르니, 여러분이 알려 달라’고 발언한 적이 있었다. 국민들이 그를 선택할 때는, 그가 당선되면 금방 완전 새 세상이 열릴 것같이 약속한 말 때문이었는데, 정작 그런 식의 말을 듣자, 어리둥절해 진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이 길러서 쓰는 사람이 아니다. 준비된 사람이 들어서서, 힘겹게 사는 국민들을 섬겨야 할 사람이다. 그 말이 그의 무능하고 불비에서 나온 것이라면, 나라는 정말 큰 위기이다. 


이런 점은 나라와 대통령만의 문제도 아니다. 교회도 준비돼야 한다. 가정도 성장해야 한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성숙해야만 한다. 모든 생명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야만 주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인생의 절정기에 자람과 채움과 성장이 없이 아직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헤매고 있거나 ‘아무 것도 모른 체 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그 남은 인생 여정에서는 건져낼 열매는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성령은 교회의 주이시다. 생명의 구원과 복음 전파를 위하여,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일꾼들을 파송하시며, 온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앞장서 이끌어 가신다. 그래서 현장의 교회들은 이 강림절에 유독 많이 설립되고 임직받으며 많은 이들이 교회의 중직으로 피택(被擇) 받아서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기도 한다. 


행6장에서 보면 초대교회가 첫 평신도 지도자들인 집사들 일곱 명을 임직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든 면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이룬 교회 공동체가 말씀과 기도만을 전하고 인도하는 사도들만으로는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현실적 상황에 직면하면서, 평신도들 가운데 신망이 두텁고 역량을 가진 인사들을 교회 지도력에 포함시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행정과 재정과 봉사의 영역을 그들이 사도들과 함께 수행하도록 했다. 요즈음의 당회와 제직회를 갖춘 교회공동

체가 출범한 것이다. 그 바람에 교회는 안정을 찾아 큰 부흥을 이루게 되었다(1-7절 참조).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어떤 자격을 갖춘 이들이 그런 지도력에 포함 되었느냐'는 점이다. 요건은 세 가지였다. 교회 안에서, 성령(聖靈)과 지혜(智惠)가 충만하여 교우들로부터 신망(信望)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했다(3절). 진정 아무나 들어설 자리가 아니었다. 그만한 준비가 된 인물들이어야만 했다. 그 기사는 이런 영적 역량을 갖춘 이들이 적절하게 선택되면, 그 교회는 반드시 부흥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 역시 성장하는 교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원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내적 역량을 착실하게 갉고 닦으며 미래를 탄탄히 준비하는 지 여부이다. 성령께서는 준비된 자들을 결코 그냥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평소 착실히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받들어 사는 자들은 때가 되면, 반드시 성령께서 그를 부르시고 앞세워 일하게 하신다. 준비된 삶은 그만큼 소중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진정 어떠한 준비가 필요할까?  


오늘의 세 본문들은 미래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우리가 반드시 챙기고 준비해야할 것들을 찾는 데에, 매우 훌륭한 지침(指針)들을 제공한다. 


서신서는 성령을 통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일을 적극 권고한다. 믿음을 통해서는 주님의 내주(內住)하심을 이루는 일과 하나님과 형제 사랑에서 나오는 충만한 생활을 제시한다. 구약의 내용은 야곱처럼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을 얻어낸 영적 승리 체험을 예시한다. 복음서는 천국이란 지고의 보화를 발견한 자의 분명한 삶을 요구한다. 그 삶은 그 찾은 보화를 지켜내고자 모든 하위급의 세상적 소유를 내려놓는 삶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신앙적 역량을 보유하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어찌 승리하며 살게 되지 아니하겠는가! 

   

1. 서선서 / 엡3:14-21 / “속사람을 강건하게, 주님이 마음에 계시게, 사랑의 뿌리가 박히게”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개척하고 3년 이상을 전심하여 목회하였다. 그의 교회 개척사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숱한 믿음의 결실들을 거두었던 곳이었다(행19:1-참조). 특히 그곳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교회여서, 서로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사랑의 능력에 따른 결속이 남달리 강하게 요청되는 곳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단 영지주의의 유혹들도 강해서, 그들을 지켜내려는 사도의 기도가 투옥중 임에도 더욱 뜨거웠다(3:1참조). 


사도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그들 모두에게 친히 이름까지 주신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면서, 그 하나님께 그의 가슴 속에 있는 에베소 교회를 위한 탄원(歎願)의 기도를 올린다(14-15절). 그 기도는 주님의 제자들을 위한 탄원을 연상하게 한다(요17장). 그 핵심은 세 가지였다.  


1)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剛健)하게 되는 일이었다(16절). 여기에서의 속사람은 누군가? 겉 사람과 대조되는 표현으로서(고후4:16), 인간 안에 인격의 중심이며, 마음이 자리한 곳이다. 이 마음은 인간의 의지와 감정을 결정하면서, 성령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는 열려 있는 몸이다(롬7:22, 고후4:16참조). 따라서 성령의 거룩한 능력이 속사람에 이루어지면, 그는 즉시 강건해지면서, 하나님의 큰일을 수행한다. 사도들이 모두 그러했다.   


2)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시게 되는 일이었다(17절). 이 내용은 주님의 우리 안의 내주(內住)가 오직 확고한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임을 확인시켜주는 구절이다. 주님이 ‘계시게’(헬, 카토이케오)될 때란 표현은 어떤 장소에 완전히 정착한다는 의미로서, 그의 전인격이 주님의 확고한 지배아래 들어간 상태를 말하면서, 구원까지도 확증해주는 내용이라서 더욱 가치가 있다. 곧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이 가능한 까닭이다. 


3)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닦은 자들이 되는 일이었다(17절,하-19절,상). 그래서 그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에서 맛볼 수 있는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고, 또 인간의 그 어떠한 지식까지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17,하-19,상). 결국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가 되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의 이러한 탄원은 오늘 우리 교회들과 성도들을 위한 절실한 기도 제목이기도 하다.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의 강건함을 이루어야만 하겠고, 신실한 믿음의 자리에 서서 내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이루어야 하겠으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능력에 깊이 뿌리를 박은 삶을 이루어서, 거기에서 샘솟듯 나오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풍성히 누리고 펼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다. 


2. 구약 / 창32:22-32/ “이제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네가 겨누어 이겼음이라” 


여기 에베소 교회가 소망한 세 가지 영적 무기들을 한꺼번에 포획(捕獲)해낸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본문의 주인공인 족장 야곱이다. 그가 어쩌다가 그토록 놀라운 역사의 인물이 되었는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목숨을 건 씨름에서 이겨냈기 때문이었다. 즉 세상의 그 어떠한 힘과 권세를 이겨낼 신령한 하늘의 힘(싸우지도 않고 이기는 힘)을 여호와로부터 넘겨받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란 민족적 새 이름을 얻어낸 존재가 된 까닭이었다.    


그 과정을 잠시 복기(復碁)해보자. 귀향길에 오른 야곱은 마지막 관문을 맞이했다. 바로 그의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가 20년 전에 타향 길에 올랐던 이유도 그 형을 피하고자 함이었는데, 귀향길에 오른 지금도 여전히 그 형과의 만남이 하늘처럼 높은 장벽으로 가로 막혀 있었다. 사실 그는 형이 무서웠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잃게 될 것 같은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공포를 넘어설 수 있는 소중한 ‘사닥다리 계시’의 추억과 그때의 믿음이 있었다. 바로 20년 전 노숙하던 벧엘 광야에 자신을 친히 찾아주셔서, 자신의 귀향길은 물론 모든 것을 다 이루기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굳게 언약해주셨던 여호와(창28:12-15절 참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족과 가축 모두를 다 얍복 나루 건너편으로 먼저 떠나보낸 후, 그만 홀로 여호와께 나아가 씨름하며 매달린 것이다. 밤샘 기도였다(22-24절 참조). 


하지만 승부사 야곱은 자신의 허벅지 관절까지 내려치면서 자신을 떠나려하는 신(神)에게, ‘네게 축복하지 않으시면 당신을 결코 가게하지 않겠다’며 완강히 매달렸다(26절). 그 바람에 그 신은 결국 야곱의 승리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로부터 그 때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개인 야곱이 아닌 새 이름, 곧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누어 이겼다’는 큰 뜻을 담은 ‘이스라엘’이 되었다(28절). 여호와가 인정하신 새 존재(개인이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출현하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나약한 인간에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복을 주시는 일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이 인간에게 패배하는 일 자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져주시는 일’은 가능하다. 그것은 언제일까? 신 자신이 먼저 약속의 말씀을 주셨을 때, 그것을 근거로 삼아서, ‘때가 되었니, 그 약속을 이루어 달라’며 매달리고 나오는 인간에게는 하나님도 결국 허락하시게 된다. 야곱이 여호와께 승리를 얻어낸 경우가 바로 그 지점이었다. 


그 절박한 순간에 야곱이 여호와를 상대로 자신이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로부터 받았던 그 약속의 말씀이었고, 또 그것을 반드시 성취해 주실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었다. 어찌 보면, 야곱은 그 여호와가 주셨던 약속들과 그 믿음과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그 험한 20년간의 힘겨운 타향살이와 자신에게 폭풍처럼 몰려왔던 대규모의 가족들과 재산들 형성에 따른 숱한 역경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 진정 야곱은 그 시련기에 여호와는 감당할 시험만 주신 분이었음 체험한 주인공이었다(고전10:13참조)  


그런데 이제 이 결정적인 순간에, 형 에서의 장벽에 자신의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은 마치 그 온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완전히 부정되는 것과 흡사한 일이어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야곱은 하나님께 이 문제를 절절히 고하면서 주의 완전한 보호와 보장을 요구할 수 있었고, 하나님 역시 그의 요구에 ‘져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서, 야곱의 시대가 활짝 열리는 ‘브니엘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30-31절 참조).  


3. 복음서 / 마13:44-52/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누군가? 천국(天國)이란 보화를 새롭게 발견(發見)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 보화를 영원히 자기의 것으로 삼기 위하여, 자신이 그 동안 소중히 지녀왔던 모든 소유들을 다 팔아서 그 보화를 사 둔 사람이다.  


무슨 말인가? 예수와 그의 진리의 세계를 접하면서, 새로운 인생과 가치에 눈이 뜬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기존의 의지했던 것으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 아래,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다 ‘낡고 폐기해야할 것들’로 간주하고 버릴 줄 아는 인물을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범을 지난 주일의 복음서의 주인공이었던 여리고의 세리장 삭게오에게서 확인한 바 있다(눅19장 참조).   


새로운 역사는 이런 새로운 보화인 예수와 그의 나라인 천국을 발견한 자들로 인하여 열린다. 사도(제자)들이 예수를 발견하고 자신들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예수와 그의 세계를 좇았다. 그리고 그 새 세계와 구원의 도리를 전파하고 선교하는 일에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바쳤다. 그러면서 그들은 천국의 새로운 서기관(書記官)들이 될 수가 있었다(52절). 오늘날에도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천국 보화를 발견한 이들에 의하여 세계 처처에서 확대되고 있다.  


다만, 선교 자체는 보화의 세계를 전하고 안겨 주는 거룩한 행위이지만, 그러나 그 결과물은 반드시 좋은 것들만 건져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짓되고 버려내야 할 쓰레기들도 함께 딸려 들어오기도 한다. 각종 물고기를 그물에서 건져낼 때를 보라. 거기에는 온갖 잡동사니들도 함께 딸려오지 아니하던가!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버릴 것과 취할 것을 동시에 취하게 되는 심판(審判)적 성격도 함께 간직하고 있음도 감안해야 한다(48-50절 참조).  


예수 공동체안에는 가룟 유다가 있었고, 초대교회 일곱집사들 중에 니골라같은 인물도 있었기 때문이다(행6:5, 계2:6,14-15 참조). 하지만 알곡이 아닌 쭉정이는 안 된다. 그러기에 자신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 필요하다. 나는 예수를 얻게 되면서 무엇을 포기했으며, 어떤 삶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었는가? 나에게도 야곱처럼 구원받은 새 이름의 주인공이 되고자, 어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며 살고 있는가? 그 무거운 존재적 거래가 있었다면, 그게 무엇인가?  


o 사람이라고 다 똑같지는 아니하다. 그 마음과 영혼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붙잡았으며, 어디를 향해 살고 있는지에 따라서, 사람들은 아주 다른 존재가 된다. 다행히 우리는 예수를 만나서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존재가 되었다. 그게 축복 중에 최고의 축복이다! 


이제 어떤 삶을 유지해야 될까? 우리는 예수와 천국을 소유한 존재답게 살아가야 된다. 더욱 흔들림 없는 여생을 위하여서는 성령으로 강건해지는 일이며, 주님을 모시고 동행하는 확고한 믿음의 삶을 지속하는 일이며, 그리스도 사랑의 터 위에서 사랑의 충만이 주는 넘치는 기쁨과 행복을 교회와 이웃들과 나누며 사는 삶에 매진하는 일이다. 함께 영혼의 성숙을 이루어가자.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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