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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4) -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도구로서의 물질 " / 맥추감사절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22-07-03 (일) 15:53 4개월전 137  

본문)  딤전 6:6~19, 출 32:1-4, 눅 16:1-13


강림 후 넷째 주일이다. 금년의 전반기를 보내고 새로운 하반기를 맞이하는 첫 주일이기도 하다. 이런 때, 우리는 그 동안의 우리 삶을 보살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김하면서, 맥추감사절을 맞이한다. 이 점에서, 여러분은 어떤 마음과 어떤 점에서 감사드리고 싶은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얼마 전까지 온 세계는 물론 우리 개인의 삶까지도 크게 옥죄어 왔던 코로라19로부터의 해방된 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지난 2년 넘게 온 세계를 꼼짝 못하게 움직임을 통제해왔던 그 전염병 공포에서 벗어나고, 게다가 우리 전 교우들과 함께 무사히 통과하면서 맞이하게 된 점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위축되었던 교회의 제반 신앙 활동도 이제 다시 활기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이번 감사절은 판데믹에서 엔데믹으로 넘어간 후에 맞이한 첫 감사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차분히 우리의 변화된 삶의 여정을 성찰하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사실 지난 코로나 시대는 본의 아니게, 직장도, 학교도, 교회도, 가족도, 각종 모임들이 억제되고 차단당해왔다. 그 바람에 대면 영역은 위축되었고, 비대면 영역은 호황을 누렸다. 삶의 문화와 정신 환경에도 질적인 큰 변화들이 잇따랐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포스트(post)-코로나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후반기 첫 주일에 맞이하는 오늘 감사주일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좋은 필터링(filtering-걸러냄)의 기회가 될 것이다. 곧 그 동안의 우리도 모르게 축적된 내면의 변화들이, 과연 나에게 복된 것인지 아니면 여과(濾過)시켜 내야할 것인지를 분별해야할 좋은 기회가 되리라 보이기 때문이다. 


잠시 자신을 향해 묻자. 그간의 대 격변기에 나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무엇에서 성장했고 무엇에서 퇴보했는가? 현저한 변화가 있었다면, 그게 진정 어떤 것인가? 계속 붙잡아 두어도 될 만한 것인가, 아니면 미련 없이 잘라버려도 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관계들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가? 진전인가, 후퇴인가? 내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관계는 보다 소중해진 건가, 아니면 크게 후퇴한 것인가? 


특히 이 시점에서 내가 더욱 바라보고 좇아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인가, 물질인가? 보이는 건가, 보이지 아니하는 건가? 영적인 건가, 육체적인 건가? 대체 무엇이 지금의 나를 유지하게 하고 지탱하여 준다고 보는가? 내 미래를 위한 삶에서는 무엇을 향하여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가? 점점 단축되어 가는 내 삶의 여정을 위해, 나는 어떤 삶의 디자인을 하고 싶은가? 이런 문제에 대한 답변은 내 미래의 삶의 품질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생각에 도움을 줄 이야기꺼리 하나가 있다. 이천 년 전의 사마리아에서 살던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이다(행8:18-). 그는 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밀려왔다. 예루살렘에서 자기 마을에 온 사도들(베드로와 요한) 때문이었다. 그들이 와서 기도하자 마을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삶의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되면서 그들을 좇은 무리의 물결이 일어나자, 그는 그 변화에 부응하여 사도들에게 요청했다. ‘돈을 얼마든지 줄 터이니, 내가 안수하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해 주소서’(19절). 


베드로는 분노했고 저주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했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20,22절). 그러자 큰 두려움에 빠진 시몬은 즉시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라며 애원한다(24절). 아마도 자비를 받았으리라 본다. 


마술사 시몬의 모습에서 무엇이 보이나? 그는 예수와 성령 그리고 믿음의 능력까지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보았던 자였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본 것이다. 신앙과 황금만능주의가 공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질주의를 극복한 신앙인인가? 여전히 내 안에도 하나님보다도 돈을 더 사랑하는 기류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진정한 감사는 돈과 하나님을 함께 사랑하는 자세에서는 나오지 못한다. 시몬처럼 선(先)물질, 후(後)하나님이면 불가능하다. 사도처럼 선 하나님, 후 물질의 질서가 확실하여야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오늘의 복음서 맨 끝의 말씀이 더욱 가슴에 다가온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16:13).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시종 물질 사랑을 경계하며 하나님의 뜻에 헌신할 물질사용을 권하는데, 이 이유는 우리의 온전한 감사를 하게 하고자 함에 있다. 


1. 서신서 / 딤전 6:6-19 / “돈을 사랑하지 말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서 영생을 취하라”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믿음의 젊은 동역자 디모데와 그의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보낸 목회서신(牧會書信)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신앙의 지침들을 제시한다. 


1) 부(富)하려 하는 마음을 품지 말고 살자(9-10절). 왜 그럴까. 이유는 부(rich)하려고 할 때부터 사람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게 되고, 그 결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9절). 그뿐 아니다. 돈 사랑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됨을 모르고, 마귀가 거기에 쳐 논 미끼에 끌려들어 각종 미혹(迷惑)을 받으면서 돈의 종이 되어, 믿음에서도 떠나가고 세상의 각종 근심을 끌어안고 사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10절).  


2) 그 대신 자족(自足)하는 마음으로 살자(6-8절). 왜 그럴까. 우선은 경건(敬虔)에 큰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건이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 사랑을 누리고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딤전4:8, 마6:25-34,빌4:11-12,히13:5 참조). 우리 인생은 본질적으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존재인데, 이를 알고 처음부터 욕심을 버리고 현재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주어진 것만으로도 족한 줄로 알고 살고 있으니, 그 삶이 평안 속에 지내고 있음이 아닌가-!


3)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확실히 싸워서 취해 두어야할 영역이 있다. 바로 영생(永生)이다! 그것은 우리가 의(義-정직), 경건, 믿음, 사랑, 인내, 온유를 따르는 삶에서만 거둘 수 있는 열매이다(11-12절). 여기에서도 잊지 말자. 이런 영적 삶의 내용들을 꾸준히 견지하는 데에서, 우리는 영생이 내게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이다(13-16절 참조).   


4) 사도는 여기에서 왜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두어야 할 것인지를 분별해 준다.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과 영생을 취하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삶의 내용들이 무엇인지를 안내해 준다(17-19절 참조).  


돈을 좇은 자는 물질이 가진 불안정한 특성에 따라 살고 있는 자들이기에, 매사에 그 삶과 인격까지도 불안정한 삶속에서 살기 마련이다. 정함이 없다는 말이 그 말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을 신뢰하며 좇으면 자신의 삶도 무너지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그런 물질주의자들의 위험성을 감안하고 상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믿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는 누군가? 오직 빛과 생명과 영생의 주를 섬기는 무리들이 아닌가! 절대 휘달릴 수 없는 우리다.  


다만 우리의 할 일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혜와 사랑을 전하고 나누어 주는 생활이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힘쓰며 자비와 사랑을 공급하는 일에 전념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장래 자기의 참된 생명(영생)을 확증해가는 일에도 절대 필요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18-19절). 


2. 구약 / 출 32:1-4 /  “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神)을 만들어 달라 ”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당신의 산 시내로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실 십계명 돌 판을 제작하시는 중에(18절 참조), 모세의 부재(不在)에 불안해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시간을 못 참고 자신들을 인도해낼 신(神)을 만들어 섬기기 시작했음을 전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율법을 받게 될 축복의 시간에, 정작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금 고리들로 여호와가 아닌 또 다른 신(神)을 만들어 섬기는-, 크나 큰 배신의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이런 충격적인 엇박자 사건은 12자파 정탐꾼의 보고 사건과 함께,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생활에서 가장 큰 불행한 사례로 기억되게 된다. 따라서 여호와의 진노를 받게 되면서, 백성들 삼천 명에 레위인의 손에 도륙(屠戮)을 당하는 일 외에도(출32:28),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입성도 못한 체 광야에서 진멸되는 심판을 받기도 하였기 때문이다(민14:32-35참조).  


왜 그랬을까? 하나님은 이미 출애굽의 전 과정을 통하여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심을 충분히 입증해주셨는데도, 백성들은 그 약속들(출23:30-33)을 믿지 않고 좀 더 구체적인 보장을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 민족들이 추구한 자연의 여러 세력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모습들을 기억하면서, 자기들도 형상(形象) 제작의 죄에 빠져들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내어, 그게 자기들을 인도할 신이라고 외쳤다. 가장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짓을 행하였다. 


곧 자기들이 만든 신을 숭배하는 우상(偶像)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하나님이 출애굽 때 안겨주신 그 귀한 물질과 소유로, 황소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서 그 신이 자신들을 인도할 신이라 선포했다(1절). 십계명 제1(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과 제2(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죄를 범하고 나왔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어찌 그들에게 거룩한 땅에 입주를 순순히 허락하실 수 있겠는가!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대안으로 만든 신상인 ‘황소’는 힘과 생식력의 상징인 어린 수소를 가리킨 것이었다. 그들이 여기에서 외친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다’(5절)란 표현은 그 일로 여호와의 무서운 징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후에 또 다시 이스라엘의 가장 불행한 남북의 분단되는 시대에 다시 등장하여 위력을 발하였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1세가 주전 926년에 남 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예배에 대응하기 위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바로 이 수소 상 둘을 세워서, 본격적인 황소신상 중심의 우상숭배 시대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호8:5-6참조). 여호와를 획기적으로 부정하고 말았다. 결국 여호와 신앙이 무너진 북왕국 이스라엘은 편할 날이 없다가, 끝내 일찍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도 이 아론의 황소상은 여전히 위세를 떨친다. 그것은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뉴욕의 월 스트리스 광장에 명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관광객들은 그곳에 세워진 황소상을 찾아 그 생식기를 만지면서, 자기에게 임할 돈과 번영의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 돈과 물질의 신을 찾는 무리들이 있는 한, 아론의 황소상은 기리 위세를 떨칠 것 같다. 하지만 돈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고 복을 주신다고 믿는 이들을 위한 길은 전혀 다르다. 


3. 복음서 / 눅 16:1-13 /  “ 이 옳지 않는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하였구나 ”


본문은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로운 재물 사용법에 관한 비유이다. 본문은 불의와 지혜란 공존할 수 없는 주제들이 얽혀 있어서 독특하다. 청지기는 자신이 주관한 재물로 주인에게는 불의한 짓을 행하였으나, 자기의 불행한 때를 대비해서는 지혜롭게 처신한 한 일로 인하여, 결국 주인의 칭찬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불의한 내용과 지혜로운 재물 사용법을 보자.

    

1) 불의한 모습은 그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로서, 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데 있었다(1절). 이는 청지기로서의 기본이 크게 잘못된 모습임에는 분명하다. 그 바람에 그는 주인에게 불려가, 그 직무 정지를 당하고, 뒷 청산을 명받게 되었다. 시련기에 들어선 것이다(2-3절).   


2)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난국을 헤쳐 갈 통찰력이 있었다(4절,상). 비록 자리와 물질 관리에서는 퇴출되지만, 그러나 부끄럽지 않게 퇴각(退却)할 길을 찾아낸 것이다. 그것은 채무자들의 부채액을 크게 탕감내지 삭감해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채무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친구가 되면서, 주인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분’이라는 명예까지도 안겨준 행동을 취한 것이다. 결국 그는 주인의 물질로, 주인에게는 명예를, 자신에게는 피난처를, 빚에 시달리던 채무자들에게는 실질적 도움을 안겨 주었다(4-7절 참조).   


3) 그런 지혜로운 행동에 주인의 칭찬이 나왔다. 주님도 그런 청지기의 지혜 있는 행위를 평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권하셨다. ‘불의(不義)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러면 그들이 너희 천국 입장 시에 확실한 보증인이 되리라’(9절 참조).

 

본래의 내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위탁해 주신 것을 사용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이 청지기가 살아날 수 있었음은, 자신이 그 재물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의 이름으로 힘든 이웃을 돕는 일에 사용한 까닭이다. 그래서 주인과 그의 재물의 가치를 고양시킨 것이다. 재물로 주인과 이웃을 함께 섬김으로서 자신도 살 길 찾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12절 참조). 


o 재물은 자기에게 없는 안정을 줄 수 있다고 속으며 믿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눅12:16-21,막4:19,습1:18참조).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이 그 마력에 빠져서, 재물에게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의탁하며 산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까지도 그런 재물의 유혹 속에 빠져 산다는 점이다. 저 시몬 마술사와 광야의 황소 신 숭배자들처럼 말이다. 부디 꿈을 깨자. 하나님 이외에는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 줄 이는 없기 때문이다. 돈이 아닌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비록 물질이 무서운 불의성을 가졌다 해도, 그래도 우리에게 물질은 필요한 것이다. 다만 그 물질이 내 것이 아니라 주신 하나님의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결코 내 탐욕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고난 받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되도록 수고해야만 한다.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를 학습하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하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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