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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1) - " 차별이 아닌 자비와 긍휼의 품격을 "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22-08-21 (일) 07:34 1년전 437  

본문)  약 2:1-13, 사 57:14-19, 눅 14:1-11


강림 후 열한 번째 주일이다. 지난 주간은 엄청난 물난리를 겪으면서, 적잖은 인명피해와 재산 피해도 속출했다. 말로는 100년만의 폭우라는 말도 들리는데-, 문제는 이런 기록적인 피해가 이제부터 시작일 정도가 될 만큼, 기상이변이 빈번해지고, 그로인한 재앙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인간이 자연을 대한 그릇된 행동에 따른 자업자득 차원의 것이어서 더욱 우려가 된다. 문제는 이런 데도, 회개할 줄 모르는 인간 세상의 빗나간 대응들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새 집권자의 입은 원전을 통한 전력증강과 경제발전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상은 세계적인 탈(脫)원전과 비(非)탄소배출 정책을 통한 녹색(綠色)혁명 및 수소 중심의 새 에너지 정책을 추구하는 현상과는 정반대이기에, 일종의 매우 부끄러운 정책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신처럼 밀어붙이고 있다는 데 있다. 금방 세계로부터의 역풍이 불 터인데-, 그럼에도 오만을 부린다. 정말 회개할 줄 모르고, 겸손할 줄 모르는 위정자의 허황된 뱃장을 보는 듯싶어, 국민의 일원으로서 심히 염려스럽다. 


마침 오늘 주시는 세 본문은 믿음과 성령으로 구원을 받는 무리들이 품고 살아야할 품격(品格)에 대하여 집중한다. 곧 성령 받은 자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할 것인지를 집중해서 말씀하신다. 이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의해서 구원받게 된 성도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할 것인지를 집중해서 제시한 말씀이다. 성숙한 태도는 어디에서 나오나? 성숙한 그의 기품(氣品)에서 나온다. 특히 성령의 사람은 당연히 높은 품격을 갖추어야만 한다. 


우리는 예수 믿는 자라는 하나만의 영적 간판만으로도, 행동의 제약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다. 결코 함부로 살지 못한다. 그만큼 부담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품고 살아가야할 마음의 자리는 무엇일까?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그런 점에서 강한 지침을 준다.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품성과 인격을 주목하게 하면서, 그를 믿는 우리들도 당연히 그 주님의 마음씨를 본받아 살아가야 마땅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 하나님의 품성은 긍휼(矜恤)과 자비(慈悲)이다. 하늘 부모는 땅의 자녀들도 마땅히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고 있다. 


오늘의 세 본문들은 차별이 얼마나 더러운 죄악인지를 일깨운다. 이를 위하여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는 성부 하나님의 놀랍고도 포용적인 품성에 대하여 폭넓게 소개한다. 그러면서 서신서에서와 복음서에서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차별 유형에 대하여 소개하면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신다.  


주목할 것은 서신서에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흔히 범할 수 있는 차별의 잘못된 사례를 지적한다. 곧 내가 상대를 주도적으로 차별하는 그릇된 행위에 관한 사례와 교훈을 말해 준다. 그러면서 그런 오류에서 벗어날 방법들을 한두 가지로 제시한다(12-13절). 반면에 복음서에서는 자신 스스로를 주변 사람들과 차별화시키면서 자신을 높이려는 오류와 위험성에 대하여서 지적한다. 스스로를 높이면서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교만과 우월감이 갖는 위험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와 동시에 이런 함정에서 구원 받기 위한 방법도 제시한다.  


이제 세 본문에 나타난 성령 받은 자들에게 필요한 품격을 보다 잘 배우고 익혀서, 주님으로부터 보다 온전히 쓰임 받는 자들로 살아가자.


1. 예언서 / 사 57:14-19 /  “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고---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라”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 어떠한 지를 전하는 말씀이다. 한마디로 어버이의 마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서도 두 가지 유형이 있음이 드러났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통회하고 겸손하게 순복하며 나아오는 자녀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가까이 하지 못하고 어버이와 거리를 두는 자녀들이다. 그들은 부모를 많이 힘들게 한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은 그들 각자에게 어떻게 대하시는가?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된다.


1) 하나님의 마음은 일단 당신이 지적하신 말씀에 통회(痛悔)하고 겸손(謙遜)하게 반응하면서 나오는 자녀들(가까운 데 있는 자/19절)에게 함께 하신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복 돋우어 주고,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해주신다(15절. 표준새번역).  


2)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과 뜻을 고집하면서 하나님과의 긴장 관계에 빠져 사는 무리들(먼 데 있는 자/19절)이다. 이들은 물론 하나님을 완전히 등진 자들이 아니라, 관계는 유지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는 등거리를 유지하며 사는 무리들이다. 사실 이런 자들이 훨씬 더 많잖은가! 그 바람에 이들은 스스로 많은 상처와 고립감과 좌절들도 맞보고 사는 형국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쉽게 돌이키지도 못하고 사는 자들이기도 하다. 


3)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모습을 보이실까? 계속 거역하고 힘들게 하기에, 아예 내쳐버리실까, 그래서 아예 관계를 절단해버리실까?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향해서도 여전히 당신의 애정과 사랑의 끈을 견지하고 계신다. 그의 입장에 대한 선지자의 증언을 살핀다.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잘되도록 교육하고 훈육하되, 그래도 어긋난 길에서 스스로 돌이키지 못하고 언저리에서 맴돌고 지내는 모습을 보면, 그로 인하여 당신은 분을 품거나 그들과 한없이 다투거나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먼저 주도적(主導的)으로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것이라 하셨다. 그 부분에 대한 말씀을 직접 들어보자. 왜 그의 마음이 복음인지를 알게 되리라! 


-‘나는 사람들과 끝없이 다투지만은 않는다. 한없이 분을 품지도 않는다. 사람에게 생명을 준 것이 나인데, 내가 그들과 끝없이 다투고 한없이 분을 품고 있으면, 사람이 어찌 견디겠느냐? 사람의 탐욕스러운 죄 때문에 내가 노하여 그들을 쳤고, 내가 노하여 나의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마침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길로 가버렸다. 사람의 소행이 어떠한지, 내가 보아서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고쳐 주겠다. 그들을 인도하여 주며, 도와  주겠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겠다“(16-18절/ 표준새번역)


4) 결국 아버지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가까운 데 있는 자는 물론이고 먼 데 있는 자들까지도 다 당신의 자녀요 백성들로 품으신다. 그의 넓은 품에 있는 평강(平康)의 세계로 안아 주신다. 이 내용은 마치 눅15:11-32에 소개된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의 내용과 흡사하다. 큰 아들은 물론이지만, 돌아온 탕자에게까지도 차별 없는 대우를 해주시는 아버지를 본다. 그렇다. 하늘 아버지가 안겨 주실 평강인 ‘샬롬’(shalom)에는 평화, 행복, 성공, 건강. 회복 등이 주어진다(19절). 이제는 교회들이 이러한 아버지의 넓은 품성을 제대로 익혀야만 한다. 


2. 서신서 / 약 2:1-13 /   “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罪)를 짓는 것이니 ”


이 대목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교회 공동체가 상대를 외모에 따라서 차별하고 나선 아픈 모습을 먼저 제기한다. 본문에서 야고보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사람을 외모에 따라서 차별(差別)하면 아니 됨을 강조한다. 그것도 교회당에 출입하는 교우들을 상대로 빈부귀천(貧富貴賤)에 따라서 그 대우를 달리하는 일이라면, 그런 차별은 악(惡)한 생각에서 나온 것임을 엄중히 지적한다(1-4절).  


그러면서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어떻게 상대하시는 지를 일깨운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에는 부요하게 하시고, 또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도 상속받게도 하셨음을 상기시킨다(5절). 그런 하나님의 배려를 받는 가난한 자들을 신자들이 업신여기는 일은 얼마나 위험하고 두려운 일인가를 상기시킨다(6절,상). 곧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서, 율법도 그런 자를 차별 죄뿐 아니라 모든 악행한 범법자로도 정죄하리라고 경고하였다. 이는 차별에 의한 죄에 대한 심판은 율법에서 처리됨을 예고하신 것이다(9-11절 참조). 


그러면서 야고보는 차별하는 자들에게 되묻는다. 너희를 압박하는 사람이나 너희를 법정으로 끌어가는 사람은 바로 부자가 아니냐는 것이다(6절).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존귀한 이름을 (얕잡아 보거나) 모독하는 사람도 바로 그 부자들이 아니냐고 묻는다(7절). 이런 점에 대한 분별도 못한 체, 육체적인 조건 만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범죄한 것이고, 부자에게는 비굴(卑屈)한 것이며, 가난한 자에게는 교만한 짓을 가한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각자 마음의 중심을 잘 잡아야만 한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모든 주변 이웃들에게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교훈에 따라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레19:18참조).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법을 준수한 일로서 율법의 심판에서도 자유하게 될 행위이기 때문이다(8절). 차별 없는 이러한 이웃 사랑의 품격이야말로, 성령 받은 이들이 갖추어야할 지고한 덕성이다.  


야고보는 더불어 조언한다. 우리는 자유를 주는 율법에 따라, ‘앞으로 심판받을 각오로 말도 하고 행동해야 한다’(12절). 이는 언행의 무게와 함께 책임감도 일깨우신 말씀이다. 상대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그 내용을 나를 향해서 적용해보는 자성(自省)과 자율(自律)의 훈련을 생활화하면 우리는 어떤 인물이 될까? 분명히 언행에 품격이 달라질 것이다. 비판이나 비난 대신에 훨씬 더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마음이 담긴 메시지가 내 입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끝으로 그는 예수 복음의 핵심적 영성인 자비와 긍휼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기를 요구한다. 이는 죄인을 향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긍휼을 실천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자신도 역시 긍휼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3절,상, 마5:7참조). 따라서 그는 이렇게 재(再)강조한다. ‘하나님의 심판(審判)은 자비(긍휼)를 베풀지 않는 자에게는 무자비하다. 그러나 자비(긍휼)는 심판을 이긴다’(13절,하). 


3. 복음서 / 눅 14:1-11 /  “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여기에서는 상대를 향한 차별이 아니라,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해서 더 우대하고 더 대접받게 하려는 자기(self)-차별적 행위가 초래할 위험성을 다룬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와 그리스도 제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미련한 것이지만, 그래도 현장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들이어서 예수께서 교육 차 이 문제를 지적하셨다.  


주님은 여기에서 최후에 있을 하나님의 ‘자리 재(再)배치’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신다. 심판자인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자리 배정은 인간들의 취향과는 아주 다르기에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한다. 이 땅에서 자기를 높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끝자리를 배정받고 싶은지, 아니면 이 땅에서 섬기는 자로 살다가 그 날에는 영광의 자리로 배정 받기를 원하는 지를 결단해야 한다. 시작은 바로 이 땅이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선택은 우리의 영원을 결정짓는다.  


1)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식탁 초대에 응하셨다(1절). 거기에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도 함께 한 듯한데, 그들은 예수의 처신에 대하여 늘 의혹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마침 주님 앞에는 수종(水腫)병으로 고생하는 환자 한 사람이 와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과연 안식일에 예수가 병자를 고칠 것이냐에 관심하고 지켜보는 중이었는데, 주님은 그런 주변의 비판적 관심에 전혀 구애(拘碍)됨이 없이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4절).  


2) 주님의 그런 행동은 대체 어떤 마음 때문이었을까? 주님에게는 치유한 일로 당신이 비난을 받는 것보다는, 그 환자가 당신으로 인하여 온전한 몸을 회복하여 삶의 행복을 찾게 된 일을 보는 것을 더 선하고 중요한 일로 보셨기 때문이다(마12:12). 결국 그 병자를 향한 주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그 감시자들의 반대를 단호히 거부하신 것이었다. 그 바람에 주님은 그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영광을, 그 환자에겐 새 삶을 부여해 주셨다. 


3) 뿐만 아니라 주님은 그런 비판자들의 교만한 삶의 태도를 문제 삼으시면서, 제자들을 일깨우셨다. 그들은 언제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게 되면, 주인의 안내 없이도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행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자에게는 더 높은 사람이 들어오면, 강제로 아랫자리로 끌려 내려오는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7-9절, 잠25:6-7 참조). 


4) 그러기에 주의 제자들은 주인의 요청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 스스로 높은 자리를 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 어떤 부끄러움도 있을 수 없는 ‘낮은 자리’(끝자리)에 앉으라. 그 후에는 주인의 요청에 응하면 된다.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을 것이다(10절). 이런 교육과 함께 주님은 다음과 같은 삶을 지시하셨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절). 우리는 주님이 높여주시기까지는 항상 낮은 자리를 고수하며 살아야 한다. 

    

o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를 배우라’라고 하셨다(마11:29). 온유(溫柔)와 겸손(謙遜)의 예복이 예수의 사람들의 유니폼임을 가르친 것이다. 이는 무례(無禮)와 오만(傲慢)의 행동으로는 주 앞에 설 자리가 없음을 단호히 말씀하신 것이다. 평소의 삶에서 보여 줄 겸손과 섬김, 긍휼과 자비의 품격이 중요하다. 꾸준히 채우자.  


우리에게 이런 품격이 잘 갖추었을 때, 전도도 잘 될 것이고, 선교에도 생명력이 발산되어 다양한 열매들도 거두게 될 것이다. 만일 이런 기본도 못 갖추어졌다면, 우리의 모든 수고들은 헛될 것이다. 그만큼,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소명의 자리에 선 우리들은 우리를 부르신 이의 뜻과 의지를 받들기 위해서도, 우리를 보다 낮추고 겸손의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부요를 위해 죽음도 끌어안으셨다. 우리도 그 주님을 위해 손해와 고난을 감당해가자.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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