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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2) - " 영적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 "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22-08-28 (일) 16:39 1년전 395  

분문) 고전 9:19-27, 잠 16:1-9, 마 5:27-37 


강림 후 열두째 주일이다. 성령강림 절기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간 성령과 말씀의 인도를 계속 받아오셨는데, 그렇다면 지금쯤 나는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 궁금하다. 당연히 예전과는 차이가 난 변화된 삶의 모습들이 내 삶에서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욕망에 의한 것보다는, 성령이 안겨주신 주님의 가치관과 뜻을 좇아 나온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내 안에 자리 잡은 주의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우선은 그 모델이 될 인물부터 확인하겠다. 바로 사도이신 바울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와 그의 복음을 접하면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 존재였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강경했던 모든 모습을 내려놓고, 그의 새 주인 되신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헌신과 복종의 삶에로 완전히 거듭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행9장 참조). 


그런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대하여 그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직접 증언한다. ‘나는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從)이 된 자이다. 이를 위하여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인간적인 자유를 포기했다’(고전9:19절). 이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그것을 포기했다. 그의 그런 선택은 그의 새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운 것이기도 하다(빌2:6-7참조) 무슨 목적에서 종(從)의 자리를 택했나? 모든 사람들을 다 얻기 위함이었다.   


즉 자기가 종이 되어 섬기게 된 사람들을 최대한 얻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20-22절). 그의 말, ‘얻는다’는 말은 무엇을 얻는다는 것인가? 물론 물질이나 세상적인 지위 따위를 말할 리는 없다. 바로 ‘구원(救援)하고자 함’이었다(22절). 자기가 예수와 그의 복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듯이, 자기가 이제 섬기게 된 이들도 최대한 구원하고자 함이었다.    


이런 생각은 바울이 자신의 구원받음은 본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또 다른 이들까지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행9:15 참조). 이 투철한 소명의식에 붙잡힌 바울은 그때부터 자신의 삶 전체를 그 복음 전하는 일(23절), 구원의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일에 바쳤다. 그 때부터 바울의 삶은 마치 하늘의 상(賞-prize)을 받기 위해 달음박질하는 경주자처럼 되면서, 전력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24절 참조).  


막상 시작해보니, 그 일은 이미 이겨야만 할 필승의 전쟁이었고, 그러기에 단순 집중해서 기어이 승리의 관(冠)을 받아내야 할 현장이었다(25절). 그것도 주님이 주실 썩어지지 아니할 생명의 면류관이 주인을 기다리는 곳이었다. 결국 이런 경주에 오른 바울은, 그런 경주자들에게 필요한 요인(要因)들이 무엇인지를 찾았고, 두 가지를 발견했다. 하나는 모든 일에 절제(節制)하는 일이요 또 하나는 자신의 몸을 쳐 복종(服從)시키는 일이었다(25,27절참조). 


사실 바울은 평생 이 두 가지, 자신을 엄격하게 제어하는 일과 꾸준히 목표를 이루어 가는 일을 통하여, 지금의 세계 복음화의 대업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이런 점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16:24)라는 말씀과도 연계된다. 절제의 삶으로 자기 편안을 제어하고, 몸의 안락을 억제하면서 자기에게 매인 십자가를 감당하는 삶으로 예수와 복음을 전 삶으로 증언한 것이다. 


구약 잠언의 내용은 이런 복음을 위해 절제된 삶과 자기 부정의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내용에 더욱 유의할 것인지를 집중해 준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heart)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 있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됨을 강조한다. 우리는 보통 행동 중심으로 자신을 평가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들을 견인하는 우리 마음을 우선해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2절). 결과 중심의 인간보다는 원인 중심의 하나님을 다시 보게 하고 있다.  


복음서에서는 자신을 모든 이의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내용들로 가득하다. 잠언과 동일한 내용들이다(28절). 내 삶의 중심인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면, 달음박질에서 결코 승리하지 못함을 강조한다. 특히 당신의 제자들에게 외부를 향하여 허황된 약속들이나 입장 표명에 강한 제동을 거신다. 무책임한 언사에 발목이 잡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확한 분별력을 발휘하여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해야만 승리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음도 제시한다. 


1. 서신서 / 고전 9:19-27 /  “ 내 몸을 쳐 복종함은 추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니라 ”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항상 그 말에 책임성도 안고 산다. 그런 점에서 목숨과 전 인격을 담은 증언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거룩하시고 진리 되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전하는 책임 때문에, 그에게는 그 증언들이 ‘제대로 전했는지’를 최후의 심판대에서 점검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의 이러한 경고는 여전히 커다란 부담이 된다. 곧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2:12참조). 


나는 증언자요 전도자로서, 자신을 향하여 어떤 엄격한 통제와 점검을 가하고 사는가? 아니면 노상 무책임한 언사를 남발하고 지내는 것은 아닌가? ‘마치 아니면 말고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정말 두려워하자. 우리의 증언들은 반드시 그 증언의 정당성과 진리성을 점검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처럼 ‘나도 버림당할 수 있다’는 마음의 두려움을 가진 증언자들로 살아가자(27절). 이제 이렇게 평생 종의 멍에를 자진하여 매고 산 바울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자.  


1) 그의 가슴에는 세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뜨거운 소명감이 충만해 있었다. 먼저는 율법 아래에 사는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그의 판단은 율법만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율법 없이 살아온 이방인들이었다(20-21절). 그리고 인간적인 도움이 필요한 모든 약한 자들이다.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정치적 약함을 포함한 모든 연약한 자들을 구원하기를 원했다(22절, 상). 물론 그밖에도 여러 종류의 사람들도 다 품었다. 


2) 이를 위해 그는 먼저 자신을 그들에게 맞추려는 변신(變身)도 서슴지 않았다. 동종(同種)의식을 갖게 될 때, 사람들 사이는 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이 그들에게 주입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시도했다. 다만 몇 사람이라도 건질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전력을 다했다. 마치 경기장에서 상(賞)을 위해 달음질하는 사람같이 했다(24절). 


3) 이런 목적의 성취를 위해 그가 취한 두 가지 자체 준칙(準則)들이 있었다. 그 대상은 바로 남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들이었다. 그것이 결국 오늘의 복음의 바울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첫째는 절제(節制)였다(25절). 오직 사람을 얻기 위한 복음과 선교의 일들 밖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자제했다. 비록 그 일 때문에, 파생되는 또 다른 손해와 미안한 일들도 담대히 감수(感受)하며 살았다.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이라는 목표 달성의 효과를 극대화시켜서, 주인이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자기 몸을 쳐서 복종(服從)시키는 일이었다(27절). 사실 큰일을 수행하는 데에는, 뜻밖에도 가장 큰 원수와 장애물이 자기 자신일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도 큰 일을 하려다가 중단하고만 일에는 뜻밖에도 자신의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하지만 바울은 단호했다. 그리고 엄격했다. 자기 몸의 평안을 찾으려는 유혹을 계속 거부하면서, 자신의 몸이 오히려 가장 훌륭한 복음의 도구로만 활용될 수 있도록 전심을 기우렸다.   


2. 복음서 / 마 5:27-37 /  “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이 어떻게 자신을 보다 온전히 관리하여야 하는 것인지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두 가지 매우 구체적인 몸의 지체들에 대한 관리 지침(指針)들을 주셨다. 


첫째는 마음(heart)을 잘 다스리는 일이다. 사실 우리는 행동만 실수하지 않으면 된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주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시다. 인간의 지체(肢體)에는 보이는 몸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도 지체들로 보신 것이다. 게다가 모든 행동은 그 마음속에서 나온 결과물이 아닌가. 그러기에 주님은 마음부터 다스려야 행동도 온전할 수 있음을 지적하셨다. 


1) 그 구체적인 사례로 주님은 간음죄(姦淫罪)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남자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이미 그 마음에 간음한 것이다’고 하셨다(28절). 사실 이 판단은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 내용이다. 세상은 행동이 없는 마음만의 간음을 범죄로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 모두를 지으신 창조주의 시각은 다르다. 마음에 음욕(淫慾)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죄에 빠진 자로 보셨다. 바로 이 점을 깨달아야 마음관리를 잘할 수 있다.


2) 그러면서 주님은 우리를 범죄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지체들이라면, 그것이 눈이건 손발이건, 그 지체들을 과감하게 빼어 내거나 찍어 버려서라도, 남은 전체 지체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하게 하여 구원 받게 하라고 권고하셨다(29-30절). 이는 사실 마음에서 나오는 범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새삼 일깨우신 말씀이 아니겠는가-! 타락한 마음(?) 때문에 소중한 내 지체들이 애꿎은 절단(切斷)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3) 또 하나는 말(언어)이다. 중심을 잘 잡아서, 헛튼 소리나 지키지 못할 약속이나 서원이나 맹세들을 금(禁)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매사에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하라고 지시하셨다(33-37절 참조). 맹세(盟誓)를 하지 말되, 하늘로도 말고, 땅으로도 말며, 예루살렘으로도 말고, 자신의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모든 맹세들은 임시방편적이고 그 이름들에게 누를 끼칠 뿐이지, 본질상 사람의 진실성, 성실성 등을 보장해 주지 못하기에 그랬다. 

    

4) 따라서 복음을 위해 모든 이들의 종의 삶을 선택한 이들은 그 자신의 말들이 임기응변용이 아닌, 자신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보증해 줄 수 있을 정확한 의사표시로서의 ‘예’(yes)와 ‘아니요’(no)를 말해야 한다고 하셨다. 특히 예수와 그의 진리의 복음이 모든 인간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신다고 전파하며 살아갈 사람들로서는,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가장 정직한 표현으로서의 예와 아니요를 드러냄으로서, 자신의 소명 수행에 차질 없게 하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3. 구약 / 잠 16 : 1- 9 /  “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心靈)을 감찰하시느니라” 

문제는 마음이다. 대체로 마음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갖게 될 핵심적 지체요 처소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하나님의 일차적 심판을 받게 될 내 영적 지체임에도 불구하고(마5:28),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자신으로부터 무시되거나 악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라. 우리 중에 자기 마음의 오류(誤謬) 문제 때문에, 스스로 가슴 아파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행동의 잘못에는 비교적 곧장 반성해도, 마음의 잘못들은 너무도 외면해 해버린다.  


이제는 이 점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 점에서 잠언서의 지적은 매우 날카롭다. 특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監察)하신다’는 2절을 보자. 이 말씀은 인간의 보편적 모순과 하나님의 가차 없는 심판을 동시에 밝히는 말씀이다. 사람은 언제 자기 행위가 깨끗하다고 볼까? 자기 마음을 행동과 함께 보지 못할 때이다. 비록 마음은 악했어도,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런 모습은 세상에 길들여진 내 모습이다. 하지만 내 마음도 지체로 만드신 하나님은 전혀 다르시다. 내 행동 이전에 내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먼저 & 함께’ 살피시기 때문이다. 이때 안팎이 동일하면 심판은 단순하다. 하지만 마음은 선했는데 행동은 악했던 자와 마음은 악했는데 행동은 선하게 나온 자 경우는 판단이 복잡하다. 이렇게 비유하고 싶다. <안팎 동일 형>은 바울, <속선밖악 경우>는 베드로, <속악밖선 경우>는 가룟 유다 형이었다. 


인간은 불행히도 속을 못 본다. 마음은 은폐된 영역이어서 자신만 알 뿐이다. 하지만 창조주의 눈길만은 피할 수 없다. 그게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의 심판 기준도 차원이 달라야한다. 행동만 보지 말라, 그리고 그 마음도 함께 올려놓고 보라! 이 일만 성숙해지면, 우리 집 아이들을 보다 더 잘 지도할 수 있으리라. 우리 교우들의 엉뚱한 행동도 긍휼과 자비로 참아낼 수 있으리라.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만은 이제 보다 훨씬 더 엄격해질 수 있으리라---!!! 


기도는 하나님의 제단 위에 내 마음을 올려드리는 시간이다. 그게 우리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는 일이다(3절). 내 행위로 심판받으려 하지 않고, 내 마음으로 심판받으려고 하려는 것이다. 특히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 앞에 설 자리가 없다. 창조주의 벌을 피하지 못한다(5절). 하지만 비록 행동에서 미숙하고 엉뚱하게 표현이 되었더라도, 그 마음이 사랑과 진실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그는 속죄 받을 것이고 그 자신도 결국 의(義)롭게 될 수 있다(6절).   


선하고 의로운 행위는 당연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 선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원수까지도 끌어드리는 은혜까지 입게 된다(7절). 선한 마음을 추구하는 영적 사람의 삶은 소득 우선주의에 있지 않다. 정의롭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삶을 더 관심한다(8절) 


o 마음(영) 관리에 전심을 다하자. 그럴 때 주님의 응답은 필연적이다. 물론 내 뜻에 의한 것은 아니라 그 분의 뜻에 따른 것일지라도 말이다(1절,9절 참조). 그런 사람은 무엇을 하든, 여호와께서 그 일에 개입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빛을 보게 될 것이다(3절). 우리는 주님의 종들이요 백성들이다.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자들이다. 그의 핵심적 조건은 내 마음이란 지체를 행동이란 육체적 지체보다 더 중요시하고 우선시하는 일이다. 나에게 기도가 살아있으면, 그 놀라운 일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마음의 통제 속에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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