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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 - " 아담과 그리스도 " / 개척선교-재일동포선교, 한가위감사주일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22-09-04 (일) 20:56 2개월전 113  

본문) 창 3:1~13, 22~24, 마 18:1-14, 롬 5:12-21  


창조절기가 시작되었다. 게다가 올해의 가을맞이는 추석(秋夕)명절(9.10일-토요일)과 함께 이르게 시작되기도 했다. 음력 명절이 이렇듯 빠르게 진행되는 일은 근래에 드물다는 느낌도 든다. 그래도 확실히 날씨만은 완연한 가을이어서, 조석간의 변화된 날씨는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확실히 계절은 음력(陰曆) 24절기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오늘 첫 주일은 총회가 제정한 두 선교(宣敎)주일이기도 하다. 하나는 재일동포선교주일이고 또 하나는 개척선교주일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희석이 되긴 했으나, 재일동포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일본 땅에는 우리 동포들이 다양한 이유로 귀국을 미룬 체 아예 그곳 이국땅에 거류민(居留民)으로서 지내는 이들이 수십만 명이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남한 계열의 동포와 북한 계열의 동포(조총련)들로 분리된 체 말이다. 


그들은 일본 정부의 심한 차별을 당하면서도 그곳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귀국해도 정착할 곳이 여의치 못한 이유가 핵심이다. 그러다보니, 소수민으로 점차 그곳 국민으로 귀화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그들을 위한 교민 교회들의 선교활동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다. 동시에 우리는 교회개척선교에도 여전히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교회는 본래 그리스도의 몸체이다. 그러기에 마치 우리 인간이 후손 생산을 위해 관심하듯, 교회 생산에도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의 허약한 모습 때문에, 개척까지 포기하려는 태도는 아주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중에 우리는 삼위일체 교회력의 셋째 해를 창조절과 함께 맞이하며 문을 열려고 한다. 해마다 이 절기가 되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과정을 접하게 된다. 오늘은 어떤 첫 메시지를 주시려는 것일까? 세 본문들은 이 메시지를 다양하고 종합적인 모습으로 접근하면서 우리의 삶에 새로운 각성을 안겨주시려 한다. 


창세기는 인간이 어떻게 그리고 왜 창조주와 멀어지면서 죄인이 되고 타락한 삶을 살게 되었는 지를 일깨운다. 복음서는 그런 타락의 현상이 우리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 지, 그래서 어떤 점에서 우리가 각성해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일깨운다. 서신서에서는 이러한 죄와 타락한 현상에 만연된 세상 삶에서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전하면서, 우리의 구원의 길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는 실낙원의 현장인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무리들이다. 그 거짓 세력들은 지금도 세상의 실세(實勢)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강한 대장이 있다. 복낙원의 길을 온 몸으로 전하고 제시하고자 이 땅에 오신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우리의 참 실세인 대장이시다. 우리는 그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대안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란 말이다. 이제 그의 가르침을 잘 배워 승리의 주역들이 되자.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깊이 숙지(熟知)하여, 불의와 거짓과 죄악의 권세를 장악하고 횡포를 일삼는 사탄의 세력을 말씀을 통하여 다시 직시하면서, 그 세력을 원천적으로 물리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가르침을 굳게 붙들고 극복해가는 슬기롭고 담대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하겠다. 


1. 창세기 / 3:1-13, 22-24 /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디 있느냐”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가장 가슴 아프게 직면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신과 가장 닮고 가까운 피조물이었던 ‘바로 그 인간(人間-아담)’에게서 배신(背信)을 당하신 사건이 발생한 일이었다. 물론 뱀이란 동물의 간교한 꾐에 넘어간 일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금지령이 내려진 선악과(善惡果)를 당돌하게 따먹게 되면서 신뢰(信賴)가 깨지게 된 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돌이킬 수 없이 아프고 쓰라린 치명적인 사건이 되고야 만 것이다.  


그 바람에 인간이란 존재에게는 원죄(原罪)란 무겁기 짝이 없는 죄인이라는 멍에가 부여되고야 만 것이다. 원죄란 무엇인가? 지음 받은 인간이 지으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을 말한다. 사실 선악과의 의도는 신인(神人) 사이의 차이도 인정하면서도 함께 공존할 기틀로서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신 핵심적 법규(法規)였는데, 인간이 간계한 뱀의 속임수에 걸려들면서 넘어서는 안 되는 수준까지 감히 엿보다가, 그렇게 쓰라린 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바람에 인간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아닌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에 더 적합한 존재가 되고야 말았다. 즉 모든 고귀한 생명들이 그 출발부터, 원(原)조상으로부터 부여된 하나님을 거역하는 패역(悖逆)성을 해결 받아야만 행복할 수 있게 될 안타까운 존재(?)가 된 것이다. 사실 인간이 선악을 다 안다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창2:7참조). 그것은 신만의 영역이다(22절).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성이 악에 대한 정보와 결합하면, 무슨 짓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점검해 보자.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결국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에덴에서 퇴출됨과 함께, 밀려오는 악의 숱한 현실에 허무하게 무릎을 꿇는 존재가 되면서 유한(有限)성을 가진 자의 뼈저림을 맛보게 되었다. 비록 생존 시 어느 정도는 독립하는 지식을 얻어서 행사하는 존재가 되기는 했으나(23절), 그는 다만 죽음이라는 철벽(鐵壁)을 대면해야만 했다. 여호와께서 범죄자가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는 일만은 단호하게 차단하셨기 때문이다(22,24절).    


1) 간교한 짐승 뱀은 집안의 먹거리를 주관하는 여자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어법(語法)을 동원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1절). 이에 여자가 수다스럽게 답변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2-3절). ‘죽으리라’며 단호했던 하나님의 말씀(2:17)을 ‘죽을까 하노라’라는 듯한 애매모호한 지시로 둔갑시켰다. 여자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발판을 깔아 논 것이다.  


2) 용기를 얻는 뱀이 오히려 확신을 주는 말을 던졌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오히려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4-5절). 이 말로 뱀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눈을 갖도록 유도한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과 같이 될 것을 경계하여, 인간에게 선악과를 못 먹도록 금지했다고 왜곡한 것이다. 마치 가나안 정탐 후,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10지파 대표들이 말한 여호와에 대한 악담과 흡사했다(신1:24-28 참조). 

  

3) 뱀의 간교에 넘어가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게 된(4-5절) 여자는 그 순간에 선악과를 보는 눈이 바뀌어졌다(6절,상). 한결 뻔뻔해진 마음으로 결국 그 문제의 열매를 과감하게 따먹었고, 남편에게까지도 주었고 먹게 하였다(6-7절). 그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눈이 밝아지기 시작했는데-, 자신들부터 보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자신들이 벌거벗고 사는 모습을 보았다. 부끄러움을 알게 된 순간이 온 것이다. 그 바람에, 나무 잎으로 치부(恥部)를 가리게 됐다. 


4) 이번에는 늘 반갑기만 하던 하나님이 갑자기 두려운 대상이 되었다.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은 그 부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자 나무 사이로 숨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며 찾으시기에 이르렀다(9절). 범죄와 타락한 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게 되는 지를 확인해주는 순간이 온 것이다! 가슴 아파하시는 하나님, 부끄러워 도망하고 숨어 사는 신인(神人)관계가 조성되고 만 것이다(10절).   


5) 아담 부부의 숨는 모습에 당황하기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원인 규명에 들어가자, 남자는 여자만을 탓하지 않았다. 여자를 안겨주신 하나님 때문이라고 변명하면서, 하나님 탓으로 둘러댔고, 여자는 뱀의 꾀임 때문이라고 변명했다(11-13절). 타락의 밑바닥이 드러났다. 


6) 하나님이 헝클어진 판 정리를 하셨다. 먼저는 당신의 세계를 타락한 인간으로부터 방어(防禦)하고자 하셨다. 인간들은 이미 선악을 아는 존재가 되었으니 그런 그들의 탐욕적인 망동(妄動)이 허용되면, 에덴도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신 것이다. 격리(隔離)가 절대 필요했다. 그래서 여호와는 일단 그 타락한 부부를 에덴에서 추방하시면서, 생존을 위해 땅에서 노동(勞動)하며 살도록 조치하셨다. 동시에 쫓겨난 그들이 혹 에덴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취하여 당신들처럼 영생(永生)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고,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과 불 칼을 가진 하늘의 종들이 세워서 출입을 막으셨다(22-24절 참조).  


2. 복음서 / 마18:1-14 / “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복음서는 그렇게 격리되어 죄악으로 얽혀 살게 된 이 땅에, 하나님께서 그 후 어떤 대응을 하셨는지를 보여주신 현장 이야기이다. 비록 하나님은 죄인들을 당신의 세상과는 격리조치는 하셨으나, 그러나 그런 인간들을 버리지는 못하셨다. 오히려 더 애뜻하게 사랑하시면서 진정 한 사람이라도 건져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셨다. 그게 바로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일이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잃은 자를 찾으시는 생명구원운동을 펼치신 일이었다.     


1) 본문에 나타난 현장은 율법이 선포된 유대교의 나라 이스라엘이었으나, 그곳 역시 인간 타락상에 신음하고 탄식하는 곳이었다. 자기들끼리 명예욕이 판치고 있었고, 사람을 차별하고 업신여기는 일들이 만연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자칭 의인과 죄인이 판치는 모순된 현장이었다. 그런 난제(難題)를 어떻게 풀어갈까? 그게 바로 메시아 예수께서 감당하실 몫이었다. 


2) 실타래는 천국에 관심을 갖게 된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나왔다(1절). 서로 높은 곳만 바로 보고 사는 현실에서, 예수님은 그들 모두의 시선을 정반대로 향하게 하셨다. ‘어린 아이와 같은 자’, ‘작은 자’를 가장 중요하게 보라고 하셨다(3,6절). 특히 그들은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존중하며, 영접하여 실족하지 않도록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바로 천국에서도 큰 자라고 강조하셨다(4절). 


3) 그러면서 주님은 당신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당신을 영접하는 일이라면서(5절), 동시에 그들 중 하나라도 실족(失足)하게 하면 그는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났다고까지 역설하셨다(6절). 심지어 내 손발 지체가 실족의 도구가 되거든 찍어 내버리고 남은 장애인의 몸으로 영생에 들어감이 낫다고 하셨다(8-9절) 그런데 약한 자들을 실족하는 일이 왜 죄가 되는 지에는 특별한 연유가 있었다. 


4) 그 이유는 이렇다. 곧 그 약자들을 돌보는 천사(天使)들이 하늘 아버지를 항상 뵙고 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10절). 이것은 우리의 약자 상대의 모습이 하늘 아버지께 항상 직보(直報)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 성경은 강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없어도, 약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은 숱하게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의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면, 그는 세상의 작은 자들을 특별히 관심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겠다. 


5) 아울러 주님은 잃은 자를 찾는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잃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을 주목하고, 울안에 있는 99마리 양들 두고서도 1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뜨거운 마음을 품고 사는 제자들이 되도록 독려하셨다(12-14절). 대부분의 우리 교회들은 울안의 다수에 관심을 집중한다. 울 밖의 소수에겐 무관심하다. 기득권자의 득세가 횡행할 수밖에 없다. 작은 자를 향한 관심이 회복되어야할 때이다. 교회 선교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3. 서신서 / 롬5:12-21 / “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바울은 인간 역사에서 두 명의 아주 대조적인 조상들이 있었음을 소개한다. 첫 조상 아담은 자기를 살리고자 모두를 죽인 조상이었다. 둘째 조상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를 살리고자 자기를 죽인 조상이었다. 그 바람에 우리 인류사에는 어둠과 탐욕의 역사와 빛과 은혜의 역사가 맞물려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다. 첫 조상은 원죄의 역사를 대물림하였다면, 둘째 조상은 은혜와 구원의 역사를 상속하는 분이 되신 것이다. 


이 둘은 지금도 아주 강한 힘으로 역사와 세상을 자기 방향으로 견인하고 있다. 아담과 예수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셀까, 누구의 힘이 우월할까? 분명한 것은 아담의 힘은 혈육으로 우리를 이끈다. 본능과 체질로 힘을 과시한다. 굉장한 힘이다. 하지만 예수의 힘은 그런 혈육과 본능을 떠나야 만날 수 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야 실체를 볼 수 있다(창12:1). 자기를 부정해야 되고, 자기 십자가란 멍에를 매야 가능하다(마16:24). 그러기에 말씀과 의지와 가치와 믿음의 힘이 우리를 그 예수와 만나게 한다. 우리의 눈을 밝게 한다. 


그 세계에 들어서면 무엇이 우월한가가 제대로 보인다. 아담의 파멸작용보다 예수의 구원작용이 우월함을, 범죄의 힘보다 은혜의 힘이 우월함을, 정죄의 힘보다 의롭게 하심이 우월함을, 사망과 불의의 힘보다 생명과 의의 힘의 우월함을, 그리고 죄의 결과에 비하여 은혜의 풍성함과 결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것임이 새삼 보인다. 새 아담의 계보원이 된 증표다!  


o 이제 선택과 결단만 남았다. 아담이냐 예수냐. 피의 상속이냐 십자가의 은혜를 취하느냐. 살고자하여 죽을 것이냐, 죽고자 하여 살 것이냐. 계산은 이미 끝났다. 이제는 타락의 옛 옷을 다시 걸쳐 입으려고 하지 말라. 은혜의 옷으로 만족하려고 하라. 교만하여 남을 실족하게 하는 자리는 안된다. 낮을 자와 잃은 자를 존중하면서, 나도 함께 구원을 취하는 자리로 나가라. 


원죄의 발목잡기에서는 완전히 해방되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제2 아담의 의와 생명의 사랑에 속하는 데에 있다. 우리의 교회와 공동체도 그릇된 명예와 불필요한 우월감의 늪속에 빠져들면 안 된다. 더 낮은 곳으로, 더 잃은 자를 향한 곳으로 한걸음씩 나아가야만 희망이 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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