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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0) - " 오직 사랑의 힘으로 승리를 취하라 "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22-11-06 (일) 21:08 1년전 534  

본문)  삼하 1:17~27, 요15:12-17, 계 14:13-15:4


창조절 열 번 째 주일이다. 가을도 마무리에 접어들면서, 가을을 즐기려는 전국 곳곳의 축제들도 한창이다. 그런 중에 지난 주말(10.29)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불행한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다. 이태원의 핼러윈 축제에서 참석했던 15만명 정도의 대규모 인파 중에서 압사자(壓死者)자가 무려 155명이나 발생했다. 중경상자까지 합치면 300여명에 이른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이후의 또 다른 대 참사이다. 어찌 이런 일이 우리 땅에서 또 거듭되는가?   


사망자들이 대부분 젊은이들이고, 적잖은 수의 외국 관광객들이라는 말이 더욱 가슴이 아프다. 참석자들 그 누구를 탓할 성격은 아니다. 그러기에 고인들의 명복과 함께 유족들의 각별한 위로를 빈다. 그러면서도 신명기의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전하는 매우 혹독한 말씀이다. 특히 무속신앙과 우상종교에 빠져 지내는 현 위정자가 가슴에 새겨둘 말씀이다. 정신 못 차린 왕을 둔 백성들에겐 이런저런 시련들이 끝이 없을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붙게 하실 것이며 또 율법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다”(신28:58-61). 


우리 모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는 말씀(잠1:7)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짓 신과 우상과 가짜 선지자에 빠져 지내는 자는 속히 패망의 길에 빠질 것임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만군의 하나님이요 만물의 주되신 여호와를 사랑하고 가까이 하는 자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으로 반드시 범사에 복을 받아 누리게 된다. 특히 시대가 어려울수록, 믿는 자들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힘을 더욱 힘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내용들은 시련 속에서도 사랑과 믿음의 능력을 잘 보여 준 사람들의 영적 승리담을 소개하고 있다. 구약 본문에서의 모델은 다윗이다. 그는 왕 사울과 절친(切親)이자 그의 아들인 요나단 왕자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자(戰死者)로 떠나보내면서, 온 백성들에게 조가(弔歌)를 보급하며 그들을 추모한다. 그 내용에서 다윗은 그가 그들 부자를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으로 사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그 사랑의 힘이 그를 살렸다고 보인다.  


복음서는 주님께서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서로 사랑하라’는 분부를 새 계명으로 주신 내용이다. 그런데 이 서로 사랑은 당신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카토스’(katos) 사랑이었다. 제자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보여주신 사랑이다. 곧 받아본 대로 제자들 서로 간에게도 사랑해야 하는 그 사랑이었다. 그 정도의 사랑이어야만, 제자들은 예수 이후의 시대에도 서로 하나로 결속되어, 작은 예수들로 세상을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신서인 계시록의 내용도 그렇다. 하늘의 음성(심판)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14:13). 이는 이 세상의 엄청난 박해와 배척 속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사랑이시다’라는 확고한 신앙을 고백하다가 죽임을 당하여 순교한 믿음의 사람들을 향하여, ‘수고를 그치고 안식을 하라’며 위로하시는 말씀이다. 이들은 그런 불퇴전(不退轉)의 믿음으로 세상의 폭력과 숱한 우상 종교들의 공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들을 만난다.   


결국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오직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세상의 숱한 악들과 싸워 이기며, 자기가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녀요 제자이며 백성임을 온 세상에 성공적으로 입증한 사람들의 승리담(勝利談)이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이 본문 내용에 담긴 그 흐름과 뜻을 보다 정확히 숙지하여, 우리도 세상을 이긴 믿음의 전사가 되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가야 하겠다.


1. 구 약 / 삼하 1:17-27 /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이스라엘은 큰 슬픔과 충격에 빠졌다. 그것은 왕인 사울과 왕자인 요나단이 길보아에서 전개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21절) 무참하게 전사(戰死)당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왕과 왕자 부자가 같은 전장에서 참변을 당한 일은 유대 왕국으로서의 최대의 치욕이자, 위기가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빠른 수습(收拾)책이 중요했다. 이에 당시 사울과는 대척점에 있었으나 국민적 지지도가 높았던 다윗(삼상18:7)이 지혜를 발휘하면서, 그 위기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그 방법은 그 부자(父子)를 위한 애가(哀歌)를 만들어 전 국민이 추모하도록 하고, 그들의 업적과 탁월함을 기리고 부각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특히 자신의 정적이었던 사울 왕을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언사를 일절 금하고, 그들이 생전에 조국과 백성을 위해 남긴 업적만을 기리고 그 명예를 드높이게 하는 내용만을 노래하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차원 높은 정치적 수완도 발휘한 것이다. 


그 효과는 지대했다. 비록 한 동안 나라가 다윗의 유대와 이스보셋(사울의 아들)의 이스라엘로 양분이 되어 있었으나(40여년), 결국은 다윗 중심의 통일 왕국 이스라엘을 이루게 되는 쾌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삼하5장 참조). 중요한 점은 그의 정치력 발휘가 개인적 야망이나 술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제 그 과정에서 나타난 다윗의 행위와 그 내용을 보다 면밀히 살펴보겠다. 


1) 두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조가가 제정 공포되자, 그것은 <활의 노래>로서 유다 온 백성들이 부르도록 가르쳤고, <야살의 책>에도 등재되게 하였다(17-18절). 야살의 책은 여호수아 시절에 아모리인을 공격하는 데 시간이 부족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자, 여호와가 해와 달을 머물게 하셨다는 놀라운 기록이 올라와 있는 매우 무게 있는 그들의 역사서였다(수10:12-14참조). 


2) 먼저 전사자들의 명예 보전에 힘을 쏟았다(19-20절). 그 둘을 유다의 영광으로, 용사와 방패로 높혔다(19,21절). 그리고 그의 전사소식에 적군 블레셋 진용인 가드와 아스글론에 퍼지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내용을 담았고(20절), 그들이 전사한 땅 길보아를 저주하기도 했다(21절).  


3) 그들의 전쟁에서의 용맹스러움과 담대함(독수리처럼 빠르고, 사자처럼 강했다)도 드높혔다. 동시에 그들 부자의 극진했던 서로의 사랑을 상기시키며 죽음의 자리에까지도 함께한 사실을 높이 평가했다(23절). 아울러 그들이 왕으로서 평소에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고 한 사실을 지적하며 그들의 전사를 함께 슬퍼하자고 권했다(24-25절).  


4) 요나단 왕자와의 특별한 개인적 우정과 사랑도 거론했다(25-26절). 다윗은 사울 왕의 질투와 공격을 받으며 삶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왕자인 요나단의 제의로 언약을 맺게 되면서, 다윗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등의 상상을 넘어서는 돌봄과 보호를 받기도 했다(삼상18:3-4 참조). 다윗은 그런 왕자를 형(兄)이라 부르며, 그의 사랑은 ‘심히 아름답고 기이(奇異)하여 심지어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다’라고까지 평하면서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5) 이 일로 요나단과 다윗은 서로 모든 인간적 조건을 뛰어넘을 순수한 이웃 사랑의 본을 보여 준 인물들임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다윗의 사울 왕에 대한 사랑은 어떤 내용의 것이었나? 다윗에게 사울은 정적이자 원수였는데, 어찌 다윗은 그런 자에게까지 끝까지 예의를 보였는가? 그것은 그가 왕으로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21절 참조). 그 이유 때문에, 다윗은 사울을 몇 차례 공격이 가능했을 때에도 포기했고, 그를 존중했다. 


☞ 그것은 그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결국 다윗은 조가 보급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사람으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정적이자 원수까지도 사랑한 자임을 보여 주었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귀하고 높게 평가하신 것이다. (☞ 다윗의 이런 모습을 대하니, 우리의 현실에 가슴이 아파온다. 현 우리나라 집권자가 다윗의 이런 모습을 잘 본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적 제거와 심판에 혈안이 되어서는 망한다는 것이 진리임을 잘 깨닫기를 바란다)


2. 복음서 / 요 15:12-17 / “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본문은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둔 시점에서 나온 예수님의 말씀이다. 점점 십자가 사건과 이별이라는 고강도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당부의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이었다(12절). 그것만이 예수 이후의 시대에서 제자들이 예수의 사람들로 살아남아 새 역사의 주역으로 하나님 나라를 활짝 열어갈 결정적인 비책(祕策)이었기 때문이다. 


1) ‘서로 사랑하라’는 지시는 새 계명(誡命)이었다. 하지만 주님의 이번 계명이 새로운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란 조건 때문이었다(12절,상). 이웃 사랑의 계명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그 조건은 ‘네 몸을 사랑하듯이’였다. 그러기에 자기의 컨디션 여하에 따라서, 이웃 사랑의 척도가 변질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조건은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듯’이란 공적 조건이 부기되었다. 곧 십자가에서 죄인인 나를 위해 주님이 목숨을 내어주신 그 사랑을 받은 자처럼‘ 서로가 사랑해야 되는 그런 사랑이었다. 


2) 그러기에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이 계명이 피할 수 없는 명령(命令)이 되었다. 서로 사랑에 목숨을 걸어야 되는 사람이 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런 계명에 순복하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축복의 약속(約束)들이다. 멍에 후에 누릴 위로를 반대급부로 제시해 주셨다.   


3) 그게 무엇인가? 예수의 친구(親舊)가 되는 것이다(14절). 더 이상 종(從)이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공인하신 예수의 친구, 아들의 친구로 우대되는 것이다. 마치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인 모세를 친구처럼 대하시듯(출33:11)하는 절친한 관계가 되고, 다윗이 요나단과의 언약을 통하여 왕자에 버금한 사랑을 받게 되면서 왕위에 나아갈 디딤돌을 얻게 된 것처럼, 우리의 위치도 승격(昇格)되리라 하셨다. 승격의 효과 역시 놀랍다. 바로 예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되기 때문이다. 열매가 항상 있는 삶이 되는 것이다(16절). 

    

4)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주님은 당신이 가진 모든 하늘의 소중한 것들을 우리에게도 안겨 주시고 누리게 해 주시고 싶어 하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주님의 십자가 사랑 체득에 임해야 한다. 소위 주님이 보여 주셨던 ‘카토스’사랑을 내 것으로 끌어안고, 그 맛을 알고 이웃과 성도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예수의 절친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 됨의 시금석이다. 


3. 서신서 / 계 14:13-15:4 /  “ 지금 후로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


계시록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고백 때문에 박해와 죽임을 당하며 숱한 환란을 겪으며 살았던 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을 하늘 세계로 불러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대응은 어떨 것인지를 미리 보게 하셨던 내용이다. 특히 그곳에서 그는 박해와 탄압으로 숱하게 순교한 이들이, 영원자의 위로 속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영광스러운 모습도 목격하였다.  


1) 죽은 자, 곧 순교자들을 향한 위로와 축복의 음성이 먼저 들렸다(14:13).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러자 성령의 화답이 이어졌다. ‘그렇다 그들의 수고가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이게 무슨 말인가? 지상의 성도들이 인간 우상인 황제 종교를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하신 왕으로 경배하면서, 그 일로 인하여 숱한 박해를 당하고 순교(殉敎)로 목숨을 잃었던 이들을 위로(慰勞)하신 것이다. 


2) 그러면서 세상을 향한 심판을 수행할 하늘의 천사들이 예리한 낫으로 무장하여, 불의한 횡포에 대한 심판을 이미 개시한 내용도 보여주었다(14:14-20절). 여기에서 천육백 스다디움이란 숫자는 세상의 폭을 상징하는 숫자이며, 1스다디움은 192m를 대신한 길이를 말한다. 


3) 또 15장의 일곱 천사와 일곱 재앙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최후의 진노의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그때에 짐승과 각종 우상 숭배들에 굴복하지 않고 죽음으로 승리해낸 자들이 나타나, 유리 바닷가에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며, 그런 주의 행하심이 의롭고 참되다고 찬양하였다. 그들의 찬양은 오직 주만 거룩하시며, 주의 의로우신 일이니, 만국은 그 앞에서 경배하게 되리라고 외치고 있었다(15:1-5 참조).  


4) 이런 하늘 찬양대의 모습은 이 세상의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한 믿음으로 하나님 사랑과 선한 일에 목숨을 다 바쳐 충성한 주의 백성들에게 부여될 영원한 미래를 예표(豫表)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현재 우리의 신앙의 각성과 함께 큰 희망도 안겨 주는 내용이 될 것이다. 


o 지금은 정신 차려야할 때이다. 지구촌의 제반 현상이 전 인류를 위협하는 기이한 일들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란 전 인류를 향한 전염병의 공세에도, 지구촌은 각성을 못하고 오히려 자기 패권이나 집단 이익에 몰입하면서 전쟁과 세력 싸움에 휘말려 들었다. 그런 중에 우리 대한민국도 정말 퇴행적인 정신과 낡은 내용을 가진 세력이 집권하면서, 우리 국민에게는 물론, 온 세상 나라들로부터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제 2의 아합과 이세벨이 등장했다. 영적 정신적 사상적 환경이 아주 불량해졌다. 교회들도 정신을 못 차린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제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올바른 길이 어디일까? 오늘의 말씀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방향을 잡아야 된다. 서로 사랑하는 일만이 살 길이다. 개인이나 교회나 나라도 그렇다.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고 뭉치면 다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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