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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2) - " 이웃 사랑으로 산 믿음의 증표를 보이라 " / 감사절, 영생주일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22-11-20 (일) 22:27 1년전 559  

본문)  신 26:4~15, 마 25:31-46, 약 2:14-26


창조절 열두 번째 주일이다. 절기로서는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다. 한국교회 대부분은 오늘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기도 한다. 전통적(傳統的)인 감사절의 흐름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교회마다 자기 교회의 사정을 고려하게 다른 날로 감사주일로 지키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은 또 다른 교회력 행사도 있다. 바로 한 해를 보내며, 앞서 하늘나라로 떠나신 교우들을 추념하며, 영생주일로 지키는 일이다. 교회력의 끝자락에서 지키는 영생주일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추수절을 맞이하는 말씀들 속에는 확실히 수확의 기쁨을 안겨 주는 일과 함께, 그 받은 축복에 대한 우리의 긍정적인 반응을 유도하고 있다. 그 반응은 두 가지 차원이다. 땅과 수확의 열매를 안겨 주신 창조주께 감사드리는 일이다. 그리고 수확의 혜택을 주변에 있는 힘겹게 사는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일이다. 이런 점은 우리 성서의 신앙인들을 향한 매우 특별한 삶의 문화적 요구이다. 즉 감사와 나눔을 삶에서 관습화하고 의식화하며 살라는 지침인 것이다.   


이런 감사절의 내용들은 매우 은혜로운 영적 깨우침이다. 왜 그런가? 보통 물질 충족으로 부자되는 일은 곧장 그 소유자의 육신만을 만족시키는 일로 귀결되는 것이 통례이다. 그래서 부유해지는 일이 곧장 죄 짓는 기회나 육신을 망가뜨리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감사절 지침들은 은혜를 베푸신 창조주께는 감사부터 드리고, 또 받은 것들로 주변의 궁핍한 이웃들, 외로운 이들의 갈증과 허기를 채워주는 기회를 갖게 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높인다. 


즉 소유로 인한 자신을 타락 위험을 지혜롭게 예방하고, 도리어 소유에 대한 선한 관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삶을 취하게 된 것이다. 결국 창조주를 향한 감사와 빈곤한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서, 자신의 구원 이외에도 공의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도 아름답게 공헌하게까지 된 것이다. 이 얼마나 귀한 삶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인가! 


이런 모습은 그들을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의 차별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해준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양 날개를 펴서 사는 건강한 사람들의 모델들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의 내용 속에는 이런 은혜로운 삶의 질서에 제대로 순응하지 못하고 지내는 이들이 확연히 눈에 띈다. 그들은 누구며, 또 어떤 특징을 보여주는 자들인가? 바로 주님을 믿기는 하되(교회생활은 하되), 이웃 사랑에는 맹인(盲人)인 사람들이다.   


오늘의 세 본문은 이 내용의 흐름을 세밀하게 전해 준다. 구약은 하나님 섬김의 원칙적인 두 차원으로서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한 구체적인 모습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복음서는 그런 지침을 온전히 지켜낸 무리들과 무지해서 실패한 무리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전한다. 반면에 서신서는 복음서와 본질적으로는 유사하지만, 알면서도 실천이 밑받침되지 못한 입술만의 신앙인의 문제와 그에 대한 냉혹한 주님의 정죄(죽은 신앙)가 올라와 있다.  


우리는 머잖아 영원한 심판대와 심판자 앞에 설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의 본문의 내용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과 지침을 받아야 하겠고, 특히 칭찬과 영접을 받은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의 문제점을 정확히 확인하여서, 내 자신 안에 아직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구원관을 보다 확실히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하여야 하겠다. 게다가 마침 다음 주일부터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待臨節)을 맞이해야 하겠기에 더욱 그러하다.  


1. 구약 / 신 26:4-15 /  “ 네 하나님께서 나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곳 땅에서 농사하여 가을 추수한 후, 그 맏물(첫 열매)을 가져다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제의(祭儀)적 절차를 좇아 행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그곳의 땅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함께 추수한 맏물을 드리는 일이다. 둘째는 그렇게 은혜로 받은 복(福)으로 레위인과 주변의 나그네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일이다.  


즉 지도자 모세의 목표는 분명했다. 수확한 물질로 주신 분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사랑을 고백하는 일과, 자기의 부요해 짐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더욱 빈곤함에 빠지게 될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위로연을 베풀며 즐거움을 함께 나눔으로서, 가난한 이웃들을 사랑으로 품고 사는 존재들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곧 항상 하나님을 공경하고, 더불어 사는 이웃을 향해서는 언제나 사랑과 돌봄이 굳게 자리하여 살아가도록 훈련시키려 하였다. 그 내용을 보자. 


1) 감사의 제물이 제사장의 손에 넘어갈 때, 그것을 바친 자는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다음과 같은 (뜨거운) 고백을 함께 드리고 경배를 드려야만 했다. 이는 마치 우리의 사도신조(使徒信條)의 암송과 같은 차원 그 이상이었다. 


-“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5-10절)


☞ 이 고백 속에는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재확인, 번성하게 된 경로, 그곳에서 받은 시련과 역경의 실상, 그로 인한 여호와께 부르짖음과 여호와의 놀라운 개입과 풍성한 도우심에 의한 출애굽하게 된 일, 그리고 이곳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정착한 후에 추수한 소출을 여호와께 바치게 된 일들이 압축되어 고백된다. 이 고백으로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백성이며, 동시에 하나님-조상-자신들이 하나임을 시인한다.   


2) 그와 동시에, 말씀으로 주어진 또 하나의 시행할 지침(指針)이 있었다. 바로 여호와께서 그와 그의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인하여, (지역의) 레위인과 주변에 가까이 지내는 객(客-나그네, 외국인 일용 노동자)과 함께 그 복을 나누는 일이었다(11절). 즉 받은 복을 독식하지 않고 빈곤에 시달리는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일이 위탁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도 하지만, 전하기도 하는 자임을 확증하는 일이었다.    


3) 이 일이 왜 그리 중요한가? 바로 받은 복을 전하고 나누기까지 해야만 아브라함의 제대로 된 후손임을 입증하는 일이고(창12:2-3참조), 그런 삶을 사는 일이 가장 큰 계명이며 영생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마22:36-40 참조). 그리고 그 길이 예수의 제자의 길이 때문이다. 모세는 이런 차원에서 그들에게 제도화된 셋째 해의 십일조인 ‘구제(救濟)의 십일조’를 통한 이웃 사랑의 실재를 더욱 강조하였다(12-14절 참조)


4) 여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바로 이런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구별된 헌금인 구제의 십일조를 모세가 ‘성물(聖物-sacred portion)’이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다(13-14절). 여기에서는 그 대상을 레위인과 객 이외에도 고아와 과부로 확대하고 있고, 왜 구제비가 성물인지를 사례 중심으로 설명하는 모습들이 첨가되었다. 성물은 언제 성물인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물질이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구별된 물질일 때 성물이다.    


5) 그런 점에서 이웃 사랑의 구제금은 오롯이 성물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목적을 위해서 그의 백성들은 그 비용을 다른 목적을 위해 오용(誤用)되게 해서는 안되었다. 그게 범죄이기 때문이다. 집안에 초상(初喪)을 당해도 손대지 아니 하고, 부정한 손길을 타지도 않게 하며, 망자(亡者)를 위해서 사용되는 일도 금하면서, 오직 여호와의 말씀대로 구제비로만 사용되어야 하나님 앞에 복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음을 말씀했다(13-15절 참조)   


2. 복음서 / 마 25:31-46 / “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본문은 이웃 사랑을 어떻게 하고 또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를 매우 실재적으로 가르쳐주신 분이 예수님이셨음을 알려준 내용이다. 그것도 마지막 주님의 재림 시에 마련될 심판정에서 거기 참여할 모든 대상들에게 어떤 판결이 선고될 지를 전하는 내용이다. 피할 자는 없었다. 단 한편은 오른편으로, 또 한편은 왼편으로 갈라지는 운명을 맞게 되리라는 판정이다(31-33절).  


그 판정에 대한 반응도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다. 물론 오른쪽이나 왼쪽 모두가 똑같이 의아스러운 반응을 보였다(37-39, 44절). 그것은 자기들은 주님을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는데, 어찌 자기보고 당신을 대접했다고 말씀하느냐는 것이다. 반대의 입장에 선 자들도 초점은 같았다. 자기들도 도무지 주님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어찌 주님 대접하기를 외면했다고 판정하느냐고 항변했다. 


1) 이들 모두는 함께 주님을 믿고 사랑하면서도 자기들이 믿는 주님이 계신 곳은 함께 몰랐다. 그래도 오른편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믿었으나, 어려운 이웃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지켜 행하며 산 무리들이었다. 반면에 왼편 사람들은 이웃 사랑을 하라는 계명을 인지하고 지냈으나, 실제로는 전혀 실천하지 않고 지낸 것이었다. 그래서 오른편 사람은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양 날개를 행사했고, 왼편 사람은 한쪽 날개만이란 불구로 살아왔던 것이다.   


2) 그러면 주님은 어디에 계셨던가? 주님은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이 지상에 당신의 거처도 두고 사셨다. 그곳은 공간인 성전이 아닌 당신이 늘 관심하고 애정을 품으셨던 사람들이었다, 이는 마치 모세가 함께 네가 받은 복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라면서 지목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었다(신26:12참조). 본문에서 주님이 거론하신 대상들은 주린 자들-목마른 자들-나그네 된 자들-헐벗은 자들-병든 자들-갇힌 자들이었다. 


3) 오른편 사람들은 이웃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며 실천한 자들이다. 그들은 먹을 것을 주었고, 마시게 하였으며, 객을 영접하였고, 웃을 입혔으며, 돌보아 주었고, 찾아봐 주면서 그들을 계속 섬기며 산 것이다(35-36절). 그는 그들과 함께 계신 주님을 노상 만나며 지낸 것이다. 그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 자였다(약2:13참조). 하지만 왼편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의 차원에서 예배와 헌금 생활 등에는 충성되게는 살았으나, 주변에 어려운 이들의 삶에는, 저 부자의 행태처럼, 이웃 사랑 계명은 외면하고 살았다(눅16:19-21). 주님을 만날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았다(42-43절). 


4) 주님의 판정은 정말 엄중하고 아팠다. 오른편에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면서 영생을 판결하셨고(40,46절), 왼편에는,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절)라며 영벌(永罰)을 판결하셨다(46절 참조). 이제 곧 그 판결이 우리를 기다린다. 어느 것이 우리 것일까?   


3. 서신서 / 약 2:14-26 /  “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본문은 믿음을 통한 하나님 사랑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확신하면서, 신앙의 또 다른 축인 이웃 사랑이라는 선행(행함)이 없이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담은 말씀이다(14,17,20,24,26절). 앞의 복음서에 담긴 메시지에 대한 명쾌한 정리로도 보인다. 


1) 행함이 없이 믿음 생활에만 매달리는 그들의 도피처는 입술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웃 사랑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외면한다. 이웃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자기들에게는 손해(損害)라는 착각에 빠져든 이유로 보인다. 진정한 믿음이 없음이다. 그래서 어려운 교우들을 만나며, 입술의 서비스를 하곤 한다.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라고 복빌어 주면서도, 정작 그에게 필요한 쓸 것에는 아주 몰라라 한다. 참 무익한 존재이다(16절).


2) 이런 사람은 행함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아무런 생산성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 죽었다는 것은 실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잔인한 평가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께 나왔는데, 그렇게 얻은 믿음이 지옥이나 갈 믿음이며 죽은 것이라면, 그게 얼마나 무익하며 헛 인생을 살고 있음을 말하는가! 시간 낭비요 물질 낭비요 헛수고가 될 자이기 때문이다. 귀신은 참 믿음을 가진 자들만 두려워 할 뿐임을 결코 잊지 말자(19절). 


3) 구원에 대한 방법론적 착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 말이다. 옳다. 참 믿음은 구원을 안겨준다. 하지만 명심해야한다. 참 믿음은 그런 믿음이 진정한 것임을 입증할 행동이 밑받침된 데에서 평가된 것임을 말이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방인인 기생 라합도 그랬다(21-25절 참조). 따라서 믿음은 그 진실함을 행위로 입증해 주어야만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 입증할 행위는 달리 없다. 어려운 이웃들을 향한 나의 사랑에서 나온다.  


o 이제 창조절기를 보낸다. 그러면서 주의 오심을 고대하는 대림절기에 돌입한다. 이제는 냉정히 내 자신의 신앙의 뼈대가 제대로 형성되어 있는지를 확실히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신앙의 두 날개로 날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왼편 무리들처럼, 보이지 않는 주님에게만 사랑을 드리려고 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한 날개만으로는 망한다. 반드시 이웃 사랑의 행동하는 모습을 드러나야 한다. 죽은 신앙 모습으로 인생을 끝낼 수는 없잖은가 


오른편 무리들의 말씀과 계명을 좇아 살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일 뿐이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고, 받은 복을 세상 만민에게 전하는 참된 복을 받았던 그 후손들이 되기를 다짐하자.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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