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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3) - "오실 이, 오신 이, 다시 오실 이" / 성서주일-인권주일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22-12-18 (일) 14:29 1년전 497  

본문) 사 62:10~12, 요 1:19-28, 히 11:32-12:2  (시126편 참조)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완연한 겨울의 맛이든 요즈음이다. 코로나와 독감의 겹치기 공세가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몸조심이 요청된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성서(聖書)주일로 지킨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읽는 일과 보급하는 일을 목표로 삼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면서, 이 어지러운 세대에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우도록 힘써야만 하겠다. 특히 한 해의 성경읽기 뒷마무리도 잘하면 좋겠다.    


오늘은 또 우리 교단이 한국교회와 함께 인권(人權)주일로도 지킨다. 요즈음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집단 투쟁이 고조되고 있다. 정부는 이런 투쟁을 먹고 살만한 자들의 잇속 챙기기로 보면서 강경 대처에 몰입하고 있다. 법 만능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결과로 보인다. 그 바람에 생활고에 시달린 사람들의 죽음이 계속되고 있다. 이태원 참사자의 유족들의 외침도 이제야 소리를 내며 침묵을 깨고 있다. 진정 인권주일이 필요한 이유들이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불명예 타이틀들을 많이 가진 나라로 알려져 있다. 연세대 최영준 교수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한겨레/2.1),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살율, 가장 낮은 출산율, 가장 낮은 건강인식, 가장 높은 성별임금격차, 가장 많은 노인빈곤, 가장 약한 사회적 지지체계, 가장 높은 우울증 발현율을 보유한 것이다. 거기에다 비정규직 문제와 영세자영업 문제까지 심각하여, 그 수준은 질병 단계에 들어간 상태란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심각한 현상을 풀어줄 정치체제와 협력 구도가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현 보수정권은 성장과 경제논리에 치중하여 서민과 노동자의 희생만 강요하는 입장이라서 서로의 대화도 가능하지 않다. 이를 중재해 줄 종교계나 시민사회운동이나 원로그룹도 변변치 못하다. 혹이라도 대변하려고 하면, 정치논리와 이념논리로 몰아세우며 입을 봉쇄하려고 한다. 

이런 진영(陣營) 논리의 벽이 높은 데, 이를 위해 교회는 어떤 메시야 맞이를 준비해야 할까? 


어느 한쪽이 아닌 양쪽 모두의 시선과 관심을 집중시킬 인물로서의 메시야 소개가 필요하다. 마침 오늘의 참조 본문인 시편(詩篇)의 인물들의 탄성을 유도해 낼만한 반가운 소식이 절실하다. 그것은 모든 포로 된 유대인들의 증언처럼, 꿈꾸는 것 같고,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며, 혀에는 찬양이 찼고, 여호와께서 행하신 큰 일 때문에 포로 된 온 백성들이 기뻐하게 될 그런 반가운 뉴스가 모든 교회 강단에서 힘차게 증거 되어야 하겠다(시126:1-3참조).  


이를 위해 오늘의 세 본문들은 목마른 우리들의 전 시선과 관심을 오실 분 메시야 한 분에게 집중하게 한다. 그 분은 당신의 민족의 오랜 숙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도 오신 분이었고(구약 이사야서), 인류의 빈 가슴도 생명으로 채워 줄 분으로 오신 분이었으며(복음서/요한복음), 장차 우리 영혼의 영생의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서신서/히브리서). 


우리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난 주일의 말씀에서는 이런 분으로 만난 바 있다. 구약의 스가랴서에서는 영광(榮光)의 주로, 복음서의 누가복음에서는 평화(平和)의 주로, 서신서의 로마서에서는 긍휼(矜恤)과 사랑의 주로 오실 주님이셨다. 


그런데 오늘은 그 하나님을 당신의 백성들의 오랜 현실적인 숙원을 풀어주실 주님으로, 길 잃은 양들에게는 성령(聖靈)으로 거듭난 생명을 선물로 안겨 주셔서 어떤 환경에서도 악에 빠지지 아니하고 살게 하시는 구주로, 그리고 이 모든 땅의 수고를 마친 후 들어가게 될 본향에서의 영원한 생명(永生)을 안겨주실 목자로 만나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1. 구약 / 사 62:10-12 /  “ 성문으로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旗幟)를 들라 ”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아직 바벨론에서 돌아오지 못한 동족들이 올 길을 닦기 위해 성문 밖으로 나가라는 예언자의 긴급한 명령을 듣는다(52:2참조). 하나님이 몸소 오셔서 그들 포로였던 이들을  데리고 오실 터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적대적인 민족들을 꺾으시고, 그곳의 포로였던 백성들을 환국하게 하셨기 때문이다(40:9-10참조). 그 바람에 유대의 백성과 성읍의 신분은 포로에서 ‘여호와의 구속(救贖)받은 자’로 완전히 달라지게 됐다  


1) 이스라엘의 지난 70여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도성과 성전은 완전히 파괴당했고, 그곳에 머물던 백성들은 마치 버림당한 무리들처럼 고초와 슬픔, 굶주림과 질병들의 공세 속에서 살아왔다. 종종 주변 족속들의 약탈과 멸시에도 대응할 여력이 없이 지내온 눈물겨운 시절이었다. 그러기에 그때의 자기들은 여호와께서 아예 버리셨다고 생각하며 지낼 정도였다(신28:15-57참조). 특히 애가(哀歌)서는 그런 내부의 아픔과 탄식을 담고 있다.  


2) 그러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 때에 어디에 계셨나? 그들이 생각한대로, 하나님은 정말 그들을 버리셨는가? 그럴 리 없다. 다만 온 이스라엘에게의 포로기는 자신들의 범죄와 여호와에 대한 배신으로 인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징벌을 받아, 복역(服役)하는 때였다(사40:2). 따라서 형기가 만료되기까지는 그들은 국내외에서 패배자요 포로자로서 치욕의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들이 회개와 반성의 기간을 거쳐 새 이스라엘로 거듭날 기간이어야만 했다. 


3) 그러면 그 때의 하나님 여호와는 무엇을 하신 걸까? 하나님의 대 변신이 본격화되는 때였다.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에서 온 세상 만민의 참 신인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당신을 알리시는 기간으로 삼으셨다. 다니엘서가 바로 그 증언서이다. 거짓 신들 중에서 참 신이 바로 유대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리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 제국의 왕들의 입술로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참 신임을 고백하게 하는 기적을 나타내셨다(단3:28/ 대림절(1)본문). 

   

4) 실례(實例)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유대인 포로들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로 인하여 유대인의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금지했고(3:29), 메데 제국의 다리오 왕은 다니엘로 인하여 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도록 명령하고 이 하나님을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다(6:26-27절). 그러다가 바사(페르시아) 제국에 들어가서는 고레스 왕이 원년에 유대인 포로들에게 본국에 귀국 명령을 내리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다(스1:3). 돌아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나와 나의 제국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사45장).


5) 선지자 이사야는 바로 이 놀랍게 크신 일을 행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떠나간 백성들을 이끄시고 –마치 선한 목자처럼- 당신의 땅 유대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계시기에, 예루살렘에 머물던 백성들은 서둘러 나아가서 맞이할 채비를 갖추라고 독려하였다. 성문 밖으로 나아가고, 백성이 올 길을 닦아 큰 길을 내고(High way), 거친 돌도 제거하며, 모두를 결집시킬 기치(旗幟-깃발-banner)도 내 걸도록 하라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였다(10절). 이런 환영과 영접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은 돌아온 자들이나 맞이한 자들 모두를 하나로 묶어내시었다. 


6)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호와의 선포(宣布)도 시달되었다. 이는 예루살렘의 신분 회복과 새로운 지위 부여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부터 시온은 구원과 해방 받은 백성이다. 새로운 상급과 보응은 이것이다. 곧 ‘거룩한 백성’이요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이며, ‘찾은 바 된 자’요, ‘버림받지 아니한 성읍’이라는 지위와 신분 회복의 공포였다(11-12절). 실로 오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어둠과 슬픔과 눈물과 고통과 죄의식의 깊은 늪에서 구원해내시는 주님이셨다. 


2. 복음서 / 요 1:19-28 / “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 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그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막1:8) ” 


세례자 요한의 등장과 그로 인한 백성들의 뜨거운 반응은, 당시의 강고한 유대교 종교사회에 고대하던 메시야 오심에 대한 큰 기대를 품게 한 사건이었다. 그가 광야에서 외친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눅3::4-5,사40:3 참조)는 내용은 이사야의 것과 일치했다. 그의 길 닦기로서의 회개 촉구의 외침은 파장이 커서, 많은 백성들이 회개에 참여했고, 그 확증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서 물세례까지 받았기 때문이었다(눅3:10-14).    


특히 요한의 세례가 촉구하는 회개의 성격이 메시야적이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것이 평탄해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눅3:5-6, 사40:3-5 참조). 그의 회개와 물세례 운동은 탈(脫)유대적이면서도, 온 세상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누가는 당시의 백성들이 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가 아니냐’라며 궁금했다고 전한다.(3:15참조)


1) 본문은 이런 국민적 궁금증에 대하여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이 반응하고 나온 일이었다. 그래서 당국자들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대체 네가 누구냐’를 물었다. ‘네가 그리스도냐, 아니라면 혹 그의 전위대로 온 엘리야냐(말4:5-6참조) 아니면 그 역할을 수행하러온 선지자이냐’를 집중해서 깨물었다(19-22절).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었다.   


2) 이에 요한은 그들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서 이렇게 답했다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사야의 말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20-23절). 그러자 그들은 되물었다. ‘그렇다면 왜 세례를 베푸느냐’(25절). 요한의 대답은 분명했다. ‘나의 세례 행위는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고자 함이다(31절). 나는 물세례뿐이지만, 뒤에 오실 이는 너희에게 성령(聖靈)으로 세례를 주시리라’(막1:8,참조).   


3) 요한의 물세례, 예수의 성령세례-, 이 둘은 이때부터 하나님 백성의 구원의 디딤돌이 되었다. 회개의 징표로서의 물세례는 신앙인의 입문(入門) 조건이 되었고, 성령세례는 입문한 이들이 구원받은 성도(聖徒)로 거듭나게 되는 필수조건으로 자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요3:5참조). 물세례는 자신이 믿는 자가 되었다는 표지라면, 성령세례는 그가 이제 거룩한 백성이요 여호와의 구속(救贖)함을 받게 된 자가 되었음을 확인 받는 증표라고 설명할 수 있다. 


4) 근본이 하나님과 예수의 영이신 성령은, 그를 받는 자의 마음과 삶에 깊이 개입하셔서 그 삶을 예수 중심의 삶으로 변화하게 하신다. 심령(마음)을 새롭게 하시기에 그렇다. 그래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존재인 새 사람을 입게 한다(엡4:23-24). 그 지향점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요, 그가 품으시는 범위가 전 우주적이요 세계적이며 모든 피조 세계 전체를 향해 살게 하신다(엡4장 참조). 또한 은사 주셔서 사랑하게 하시며, 소명을 주셔서 일하게 하신다.  


5) 오늘의 복음서는 오신 메시아 예수를 바라보게 하되, 성령세례를 주시는 예수를 보게 한다. 

그래서 우리같이 이방인인 자들에게, 성취자로서의 예수와 오실 자로서의 그리스도를 함께 보도록 인도하신다. 그만큼 지금 우리의 세상은 진정한 믿음의 씨름이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3. 서신서 / 히 11:32-12:2 /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위대한 믿음의 전사로 승리했던 선진(先進)들을 열거하며 소개한다. 이들은 그 시대 시대마다 굴곡진 역사 속에서 하나님 여호와를 향한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리며, 그 시대를 구원해내는 메시야적 사역들을 감당해 온 이들이다(32-38절). 기자는 이들을 가르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로 평가한다. 


그런 연고로 그들은 세상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광야로 산으로 동굴로 토굴로 유리하면서 살았다(38절). 그런데 그들은 그런 삶으로 그들의 믿음은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으로 예비하신 약속된 것’은 아직 받지 못했다(40절 참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부여된 구원의 약속으로서, 성령 안에서 그날을 대비하면서 사는 우리들이 합류하기까지 기다려야할 영원한 위로와 영생에 관한 최후의 것들이다. 


1) 이 마지막 구원 문제 해결은 역시 오실 예수를 바라보며 사는 일이다. 왜 오직 예수인가? 그는 믿음의 인도자(=창시자(創始者)로서, 믿음의 길을 앞서 걸어가신 분이기 때문이다.(빌2:8) 또한 그는 믿음의 완성자(完成者)(=온전케 하시는 이)이시기 때문이다(12:2). 그러기에 믿는 자들이 그를 바라보고 그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하다. 목자만을 따르는 양들처럼 해야 한다. ‘바라보자’(아포론테스)는 ‘한 초점을 향해 계속적으로 응시하는 것’인데, 믿는 자의 시선이 바로 믿음의 주이신 예수만을 응시하며 살아가야 됨을 일깨우신 것이다.   

   

2) 이를 위해 당부하신 두 가지 말씀들도 중요하다(12:1-2). 하나는 죄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점이다. 죄 멍에는 무겁기 때문에, 우리를 쉽게 지치게 하고 빗나가 탈선하게 한다. 또 하나는 잘 참아야만 한다. 주님이 십자가에서의 수모를 그 앞에 놓인 기쁨을 생각하시면서 참아내셨듯이, 우리도 믿음 때문에 겪어야 될 시련과 아픔들을 잘 극복해낸 승리자가 돼야 한다. 이 믿음 승리의 원칙을 굳게 지켜서, 땅의 삶을 의롭게 하고, 이후 삶도 영생에 이르게 해야겠다. 


o 지금까지 우리는 오실 이- 오신 이- 다시 오실 이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속에서 만났다. 그는 분명히 우리의 고단한 삶의 현실적인 과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메시야이시다. 하지만 그는 오셔서 당신의 삶과 당신의 보혜사를 통하여, 우리를 믿음의 전사(戰士)로 훈련시키고 승리하도록 이끄시는 이시다. 


이 일을 능력 있게 감당하고자 우리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우리의 시선과 관심을 항상 집중하며 살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부족한 능력과 지혜를 채워주실 성령의 충만한 임재도 간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 분은 항상 그를 의지하는 우리의 한계와 빈 그릇을 넉넉히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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