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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3) - " 복을 끌어 들이는 사람들 " / 설주일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23-01-22 (일) 17:38 1년전 383  

본문) 마 9:9~17, 사43:18-21, 44:21-23, 행16:25-34


주현절 셋째 주일이다. 게다가 오늘은 우리 민족의 최대 민속명절인 설주일이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흩어진 가족들이 만나서 서로 안부하고 조상들에게 세배인사 올리면서 후손들을 축복하는 아름다운 명절이다. 오늘을 맞이하면서, 부디 우리 모든 성도들과 가정들에게도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한다. 


결국 오늘 주일말씀의 주제는 아무래도 복(福)이라고 본다. 따라서 간단한 질문부터 해본다. 복은 누가 주시는가? 두 말할 것 없다. 창조조요 조물주이신 하나님이 주신다. 하지만 그 복은 누가 받는가? 크게 보면, 그의 피조물들이 받는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그의 자녀들과 백성들이 받는다. 그렇다면 또 묻는다. 그의 자녀들이라면 모두 받는가? 여기에서는 조금은 복잡해진다. 왜 그런가? 받기는 받되, 차이가 나고 갈라지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의 가정을 보라. 같은 부모 밑에서 낳고 자라 성장한 형제자매들도 그 복을 다 같이 받아서 누리던가? 아니다. 차이가 많다. 잘 받는 형제도 있지만, 빈털터리 형제도 나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부모의 차별정책 때문은 아닐 것이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기의 모든 자식들에게 축복이 고르게 분배되도록 할 것이다. 그런데도, 자식들은 결국 서로 갈라지고 차별을 보인다. 왜 그럴까? 부모 책임이 아니라며, 자식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 아닌가?    


모세는 일찍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친 바 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신30:19-20). 


이는 무슨 말씀일까? 여호와는 우리 앞에 두 종류의 메뉴인 생명과 저주를 깔아 놓으시면서, 이렇게 당부하셨다. 살기 위하여 생명(生命)을 택하라.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며 그를 의지하라. 이는 마치 무슨 말씀과 같은가?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의 분부말씀과 같다. 우리가 보통 에덴동산을 말할 때면, 선악과만 생각하는 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처음부터 먹으면 생명을 살리는 생명(生命)나무도 함께 주셨기 때문이다(창2:9). 


그런데 묘하게도 아담부부(인간)는 생명나무에 대한 관심보다는 먹으면 죽으리라는 경고를 받은 선악과에 더욱 관심이 컸다. 그게 그들 부부의 불행의 화근(禍根)이었다. 스릴과 모험을 좋아해서 그랬을까-? 아무튼, 아담부부는 삶에 구원과 생명과 영생을 안겨 줄 긍정(肯定)나무인 생명나무에는 아예 마음을 두지 않았고, 먹으면 멸망 받고 죽고 지옥가고 어둠의 세상으로 쫓겨나갈 부정(否定)나무에만 관심이 컸다. 그런 취향 때문에, 유혹자인 뱀에게 그토록 쉽게 넘어 갔고, 그들 영혼이 아주 간단하게 사냥당한 것이다. 그 대가는 무엇이었나? 너무너무 혹독하고 비참하고 후회되는 생애를 후손들에게까지 대(代)물림하며 지내야만 했다-. 


그 바람에 그의 후손된 우리들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죽음의 유혹에 더 관심하며 산다. 범죄요 죽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노름하고 마약하며 성범죄하고, 부정하고,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인하며 죄악에 끌려 다니며 산다. 이 저주의 고리를 끊어내야만 하는데-, 그게 무척 어렵다. 그러면 그런 저주의 고리를 끊어내고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 승리를 누리며 복을 향유하며 살아갈 방법은 있는건가?  


분명히 있다. 그것도 오늘의 말씀들 안에 그 방법이 잘 제시되어 있다. 총제적인 방안을 우선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과 여건 속에서, 선악과가 아닌 생명나무를 우선 취하는 생활을 습관화시키면 된다. 확실한 것에 집중하고, 미혹하며 유혹하는 것은 배제하고 사는 것이다. 주어진 여건에서 긍정적인 것을 선택하고 부정적인 것을 버리며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각을 잘 보여준 외경의 증언이 있다. 길을 가시던 중 거리에 버려져 죽어 썩은 개가 있었다. 사람들이 다 코를 막고 지나는데, 예수님은 그 개를 유심히 보시다가 이렇게 한마디 하셨다. ‘이 개는 이빨이 성하고나-.’ 이 마음과 시각, 곧 부정보다는 긍정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 예수의 구원사역이었다. 성공하는 자의 공통은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 시키는 사람이지, 단점에 붙들려 사는 자가 아니다. 생명과 승리는 결코 원망 부정 어둠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점에서 사도 바울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정말 복음이요 생명이다(살전5:16-18). 오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도 말씀을 통하여 바로 이 점을 집중해서 우리에게 주시고 일깨우신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복음서 / 마 9:9-17 /  “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


예수께서 세관원인 마태의 집에 초대되어 그곳의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고 계셨다. 그런 장면은 즉시 당시 정통 유대교도인 바리새인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게 된다. 이유는 하나다. 어찌 선생이란 고매한 자와 세리(稅吏)같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느냐는 것이다. 어찌 의인이 죄인과 함께 하느냐, 어찌 거룩이 속된 것과 함께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예수가 하늘의 소중한 질서라도 깨뜨린 양, 큰 과오를 범한 예수로 알고 비난한 것이다(12절). 


하지만 그들은 하늘의 주인 되신 예수로부터 책망(責望)을 들어야만 했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의 초대에 응하신 이유가 밝혀졌다. 그것은 세리 마태란 인물과 그 집안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었다. 세 가지 이유에서 주님은 레위 마태의 초대에 응하신 것이다. 


1) 마태란 세리(稅吏)를 죄인의 무리에서 건져내기 위함이었다(12절). 당시의 세금징수원은 로마의 정권에 복역하는 자들이란 세속적 오명(汚名)에 시달리며 사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징수된 세금의 상당부분이 로마 황제에게 들어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매국노의 일원으로 취급된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무 직에 있는 이들은 상당한 재능과 실력이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 직업 때문에, 오명에 시달리며 사는 것은 삶의 또 다른 고통이었다.    


세리 마태도 예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접대한 것은, 자신의 그런 난감한 처지에 대한 아픔을 주께서 해소해 주시기를 바랬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은 그의 초대를 환자(患者)가 외치는 나를 구해 주십시오’(SOS-Save our soul)란 호소로 들으신 것이다. 


2) 그래서 주님은 그를 어둠에서부터 구하시려 하셨다. 바로 그의 초청에 응하시면서 그를 당신의 제자의 일원으로 부르신 것이다. 그의 소중한 재능과 재산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임받고 사용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자 하셨다(10:3,막2:14참조). 그 바람에 그는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예수의 복음사역에 쏟을 수 있게 되었고, ‘마태복음’까지 집필하여 예수의 생애를 온 세상에 전한 인물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정금처럼 나온 보화가 된 존재였다.


3) 여기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신지,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를 분명히 밝히셨다. 주님은 자신을 환자들을 치료하고자 찾아온 의사의 신분으로 규정하셨다(13절). 의사는 환자를 부르기도 하지만, 찾아가기도 한다. 여기서 환자는 망가지고 무너지고 빠지고 쓰러진 힘없는 자들이며, 기득권에 밀려난 힘없는 무리들이었다. 예수는 그들을 위하여 오셨음을 분명히 하셨다. 반면에 당시의 종교인들은 그들이 죄 값으로 그렇게 병을 얻었다고 매도한 인물들이었다. 


4) 예수님은 그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에게 호6:6에 근거하여 따끔하게 충고하셨다. ‘내가 긍휼(矜恤)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라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라(13절)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종들이 어려운 백성들, 죄의 멍에로 신음하는 사람들과의 공감력(共感力)을 나누지 못한 체 예배만 드리면 된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문제만 보지 말고, 장점도 보고 축복하라고 하셨다. 그렇다사람에게서 문제만 찾는 바리새인들에게는 아무런 생명의 역사도 없었으나장점을 찾고 도움을 주고자 하시던  복된 마음을 가진 예수님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계속 나타난 것을 주목하자.


2. 구약 / 사43:18-21, 44:21-23 /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다” 


유대와 이스라엘은 이제 매우 중요한 길목에 서게 된다. 지난 바벨론 유수(流囚)기 70여 년의 세월이 끝나게 되면서, 이제는 본국으로의 환국할 시점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새로운 시기의 도래는 그들 스스로는 알 수는 없고, 역사와 인간의 움직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아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임박한 격변의 때를 대비하도록 당신의 종인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통보하기 시작하셨다. 그 내용을 살펴본다. 


1) 여호와는 백성들에게 환국에 임하는 자들로서, 기억하지 말 것과 기억해야 되는 것을 각각 제시하신다(43:18절, 44:21절 참조). 그렇다면 무엇을 기억하지 말고, 또 기억해야만 하는가?


-기억하지 말 것은 그들의 이전 일과 옛적 일이다. 그들의 바벨론 70년은 죄책감의 노예로 살아온 세월이었다. 조상들의 죄, 자신들의 무기력한 삶의 책임 등에 매여 마치 수형자처럼 복역하며 지냈다. 하지만 이제 그 복역의 때가 끝나서 해방과 자유가 부여되었기에,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죄책감에 속박된 마음에 매어있으면 더더욱 안 되었다(사40;1-2 참조). 게다가 이런 놀라운 해방 사건은 여호와께서 그곳의 황제인 고레스를 감동하셔서, 주어진 은혜의 큰 사건이었기에, 더더욱 발목 잡힐 이전 것에 매여서는 안되었다. 하나님께 찬양만하면 되었다.        


-반면에 기억해야 될 일은 이제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이다. 새 정체성을 갖는 일이다. 더 이상 강대국의 노예도 아니고 어느 힘 있는 자의 백성도 아니다. 오직 여호와께 속한 그의 종이요 백성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게다가 여호와는 그들을 지으신 분이며, 잊지 않고 지난 세월도 계속 돌보시고 지켜 오신 목자이셨다. 고레스를 당신의 종으로 감동하셔서 백성들을 해방하셨으니, 백성들은 더더욱 소명(召命)감으로 충만하여야 했다. 그래야 이제 묵은 과거, 쓰라린 형벌의 멍에에서 벗어난 자유민으로 새 출발을 온전히 할 수 있었다.     


2) 귀환을 통하여 보여 주실 여호와 ‘새 일’(a new thing)에 관심을 집중하며 그로 인하여 놀라운 믿음을 갖고 여호와께 찬송하도록 하라고 명하신다(19-21절). 그 새 일은 무엇인가? 그들이 본국에 귀환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이끌고 오는 그의 백성들은 더 이상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리된 백성이 아닌, 하나의 이스라엘이요 유다민족으로 통합되어서 돌아오는 일이었다. 여러분, 분열은 쉽지만 통일과 통합은 얼마나 어려운 지 알잖는가-? 


이 일은 실로 기적중의 기적인데-, 오직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그들을 묶어주셔서 된 일이었다. 어떤 일인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셔서 흩어졌던 백성들이 모여들어 그 길을 하나로 걷게 하시고, 그 물을 한 물로 마시게 하시는 그 방법으로 그 두 흩어진 이스라엘과 유다를 바벨론에서의 귀환하는 길목에서 하나로 묶어내신 것이었다(21-23절 참조). 실로 놀라운 제2의 출애굽이요 이스라엘의 재창조이셨다. 아,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때가 언제올까!   


☞ 사실, 이 대목은 우리 양무리 교우들에게는 흥분을 일으키는 내용이다. 1994-1996까지의 성전매입을 위한 기도의 제목 때문이었다. ‘광야에 길을, 사막의 강을 내어 마시게 하소서-’. 그 응답으로 지금의 우리 교회 성전이 마련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할렐루야 !!!


3. 서신서 / 행16:25-34 / “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


한마디로 바울과 실라의 처지는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복음전하는 일을 자기들의 풍속을 헤치는 짓이라고 고소되어 관에 끌려가 몹시 얻어맞고 고문까지 당하고 투옥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당사자인 바울과 실라는 밤이 깊은데도 기도하고 찬송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죄수들이 들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잇달아 발생했다.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흔들리며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매인 것들도 벗겨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자던 간수는 옥문이 여리고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충격을 받아 자결하려한다. 그때 바울이 큰소리로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충격 받은 간수는 이 두 죄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느냐’며 묻고,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는다’는 대답에 따라서 그들 전 가족이 세례를 받고 큰 기쁨을 얻게 된다. 빌립보 선교의 교두보가 구축된 순간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무엇인가? 박해 당한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취한 믿음의 행동이다. 그들은 일체 원망하거나 구속한 자들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고난과 박해를 감사하며 찬양했다. 그 까닭은 그렇게하여 자기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 일로 알고 감사했던 것이다. 만일 원망하거나 실망하고 있었다면, 그런 빌립보의 기적과 열매가 가능했을까? 불가능하다. 감사하고 긍정하는 믿음의 선택이 그곳 모두를 변화시킨 것이다. 


o 성도 여러분, 올 해 토끼띠 해 계묘(癸卯)년에 큰 복을 받으시기 축원한다. 그러려면 마음의 소망만으로는 안 되는 것을 여러분은 이제 아셨다. 복 받으려면 복을 끌어들이려는 믿음과 행동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 그것은 긍정의 힘을 극대화하는 일에서 나온다. 원망이나 불평이나 비난이나 좌절 대신에, 적어도 가진 것에 감사하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받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품고 살 때이다. 축복은 긍정하고 열린 마음의 소유자의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 속에 들어있는 변화에 대한 열망을 주목하며 그들을 죄 밖으로 끌어내는 지혜를 보유하자. 낙심과 좌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소명감을 불어넣어주는 능력자들이 되자. 언제나 예수를 향한 긍정적인 시선 속에 삶의 변화와 복을 불러온 사도들의 놀라운 믿음을 본받자. 부디 우리의 관심을 생명나무에 집중하는 삶이 되어, 년중 내내 복을 받으시길 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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