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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회개주일 설교참고(일사각오)

정인 (전북동노회,전주시천교회,목사) 2008-03-01 (토) 16:57 14년전 5472  
 

                             一 死 覺 悟

                                                 요한복음 11장 16절


오늘은 우리 교단에서 신사참배 회개 기념주일을 지키는 특별한 날입니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민족문제로 대두 되면서,

과거 우리 민족이 겪었던 신사참배에 대한 문제에 대해,

회개와 각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은 우리 민족 문화를 말살하고자 했습니다.

일제의 사고방식을 강요하기 위해 우리 땅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우리 조선인들에게 강제로 신사 참배를 시켰습니다.

지금도 나이드신 어르신들은 신사가 있었던 곳을 압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살던 곳에도 모종이 있었는 데 그곳에 신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 시대를 거치신 분들은 대부분 강제로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던 뼈 아픈 기억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신사참배의 강요의 역사는 일제 말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신사참배는 일제의 최후의 통치 수단의 핵이었습니다.

신사참배의 역사는 일제의 통치사 만큼 길고도 지루했습니다.

일제는 1910년 8월 한일합방 직후부터 강권적으로 천황의 어진영(御眞影) 배례를 강요하였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105인 사건으로 인해 재판받은 판결문에도 나옵니다.


(이자는) 정주 신안학교의 교두로 ...... 일본천황의 최초의 천장절 집회에서 천황의 어진영앞에서 예배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행위이며 이를 거절한 단체의 가장 완강한 분자이다.

                                                - 105인 사건 재판 판결문의 일부 -


또한 1920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가 낸 논설에서,

일본 황실의 상징인 3종의 신기 즉, 거울, 주옥, 검이 우상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일제는 이것을 국체모독이라 간주해서 동아일보사에 정간 처분을 내렸습니다.


사실 독립 선언서에 나온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6명이 기독교 지도자였습니다.

이 정도로 기독교는 1919년 3·1 운동 당시까지는 자주독립 운동을 주도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더욱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인을 일본 천왕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폈습니다.


한국교회는 처음에 신사 참배가 우상 숭배를 금하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날 뿐 아니라 한 민족을 일본 천왕의 신민으로 만들려고 하는 일본의 계책임을 알고 산발적으로 저항합니다. 그러나 일제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구속하고 억압했습니다. 계속된 탄압과 강요를 이기지 못한 성도들과 교회는 결국 신사 참배 강요에 굴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노회들도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었고, 마침내 1938년 9월 한국 최대의 교단인 장로교회 총회까지 신사참배를 가결하기에 이릅니다.


신사참배 강요에 가장 먼저 참여한 교파는 제 7안식교에 이어서 천교주, 이어서 감리교입니다. 이들 교파는 1936년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불교는 아애 신사 참배에 대해선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일제가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킨 1940년대에는,

한국 교회는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종(鐘)을 떼어다가 받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우리 교계의 자발적 결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결정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대부분 잡아다가 투옥을 시킨 가운데 일본 경찰이 총과 칼을 들고 총회장소에 침입한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1938년 제 27회 장로교 총회 안건으로 신사참배 안이 채택될 때,

총회은 일본 헌병들과 경찰들 앞에서,

‘신사참배는 종교 의식이 아닌 국민의례이므로 교회가 참여해도 좋다’는 결의를 통과시켰습니다.

저는 당시 우리 교계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적어도 몇가지 문제를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신사가 과연 종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제가 신사가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신사참배를 정당화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둘째, 너무도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상당수의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이 너무도 쉽게 신사참배 강요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신사참배 강요가 1937년 중반까지는 학교에 대해서는 강경하면서도 교회에 대해서는

비교적 온건했던 것이 1937년부터는 교회에 대해서도 점차 강경했던 이유는

교파의 지도자에 따라 자신들의 지위, 명예보존에 연연하여 쉽게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어용단체의 임원이나 친일로 영합하는 사례가 흔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셋째, 신사참배는 신앙의 시금석(試金石)이었습니다.(신앙을 시험하는 잣대가 되었습니다)

제사 문제에 상당히 관용적이었던 천주교와 신학적인 입장에서 처음부터 자유주의 입장을 표방하던 감리교는 신사참배를 큰 무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보수주의 신앙을 견지하던 장로교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외세에 의해 그것마져 무너져 버렸습니다.


넷째,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신앙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명백한 민족운동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적 동기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했지만 그 이면에는 기독교 민족주의 정신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항거의 주체의 개별적 의도야 어떠하든지 민족운동 내지는 민족 수호운동,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신사 참배에 대한 철저한 회개 의식에 결여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과거 일제치하에서 대부분의 교회가 신사참배를 어떠한 형태로든 정당화시키려는 몰역사적이고 비 신앙적인 행위에 대해서 우리는 철저히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해방 후 1945년 12월 북한 5도 연합노회에서는,

“전 교회는 신사참배의 과오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근신할 것”이라는 결의가 있었습니다. 이어서 1946년 6월에 열린 남부총회에선 “제 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는 결의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결정에 불과 했습니다.


신사참배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배교 행위였다는 철저하고 근본적인 회개가 뒤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은 십계명중 첫째, 둘째, 더 나아가 셋째, 넷째 계명을 어긴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회개하기 위해, 신사참배 회개주일을 정하고 오늘 이렇게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일제가 우리를 통치할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목숨이 달아나는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수많은 민족의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집요한 일제의 탄압에도 굳굳하게 신앙을 지키며 묵묵히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 간 신앙의 선배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었습니다.


철원교회의 박봉진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년간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밀양의 함양교회 김하석 목사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고문을 받다가 대구 보인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조치원교회 김동훈 전도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뭇매를 맞아 순교했습니다.

신안주교회의 김지봉 집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경찰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신학생 김은규는 5개월 동안 서대문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깁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옥중 고백시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  옥중 고백시  【】

                                                                    주 기철 목사


주님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다 피하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 위하여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은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다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골고다의 길, 영문 밖의 길, 주님 가신 길

내 따르오리다.


그러면서 시를 썼습니다.


  【】  영문밖에 길 【】

                            주기철 목사

                     

      서쪽하는 붉은노을

      영문밖에 비추누나

      연약하온 두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밖의 길이라네


      한발자욱 두발자욱

      걸어가신 자욱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간악한 유대병정

      포악한 로마병정

      걸음마다 자국마다

      가진포악 지셨구나


      아픈다리 싸매주고

      저는다리 고쳐주사

      보지못한 눈을열어

      영생길을 보여주니


      칠전팔기 할지라도

      제십자가 바로지고

      골고다의 높은고개

      나도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어찌 못가오랴


      주님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아오니

      고생이랴 못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



한 3년전에 나온 책으로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광로 장로가 쓴,

“신사참배는 하나님 배반”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기철 목사’ 라는 책이 시중에 나와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막내 아들과 아버지 목사와의 마지막 대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의 아버지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

13살이던 소년이 70이 넘은 노인이 된 지금 떠올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순교하기 20일전, 잠깐 보았던 모습이다. 당시 어머니는 면회실 문을 천천히 여셨다. 문 밖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잠깐이라도 아버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나를 보시며 웃고 계셨다. 7∼8m 앞, 푸른 죄수복에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이었다. 3초쯤 바라보았을까?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숙여 큰 절을 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땐 어버지의 모습은 사라지고 눈앞에는 붉은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것이 우리 부자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주기철 목사님은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후 첫 설교에서 “신사참배는 십계명의 제 1계명과 같이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범죄요, 하나님에 대한 배신입니다”고 말할 정도로 신념이 확고했습니다.

그 이후 주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로 다섯 차례나 투옥되었으며 일제는 1939년 평양노회를 조종해 주기철 목사를 파직하고 평양 산정현 교회를 폐쇄했다고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에 다섯번째 마지막으로 구속되기 직전 잠깐 석방되어 가족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산정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나의 5 종목의 기원” 이라는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고별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양을 함께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초 당하시고 피흘려 죽으셨는데 내 어찌 무섭다고 내 주님을 모른 체할까? 오직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일제는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고문을 자행해 주 목사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고 합니다. 공중에 매달린 채 죽도록 매질을 당하는 모습은 어린 아들에게 공포 그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스무번을 세기 전 주 목사는 공중에 매달린 채 실신했다고합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주기철 목사님의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두손을 깍지 끼고 ‘오, 주님’을 계속 외쳤고,

일본경찰은 고춧가루를 푼 물을 코와 입에 붓고 잔혹한 고문을 다시금 자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번엔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똑같이 고문했습니다.

이런 공포 속에 대부분 신앙을 저버렸지만 주기철 목사는 두손을 깍지 낀 채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사참배는 절대로 할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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