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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노회 진주시찰회 일본그리스도교유적지 순례 기행문(상)

김성 (서울동노회,예수원교회,목사) 2008-10-15 (수) 23:14 15년전 6070  

2008 경남노회 진주시찰회 일본그리스도교유적지 순례 기행문

김성 목사 (남해 당항교회)

경남노회 진주시찰회에 속한 목회자 7명은 지난 10월 6일(월)∼9일(목)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 큐슈지역의 그리스도교유적지를 순례하는 역사기행을 가졌다. 여행의 기억과 그리스도교유적지를 돌아보며 얻은 감흥이 잊혀지기 전에 이번 여행의 발자취를 기록해 두고자 한다.

10/6(월) 첫째날: 부산에서 후쿠오카를 거쳐 나가사키로.

우리 일행을 태우고 오전 8시 30분 부산항을 출발한 후쿠오카행 쾌속선은 3시간 후인 오전 11시 30분 후쿠오카의 하카타항에 도착했다. 개인적으론 2002년 8월에 가족과 함께 큐슈지역을 여행한 이후로 6년 만에 다시 밟아보는 일본 땅이다. 6년 전 뱃전에서 멀어지는 하카타항을 창문 밖으로 바라보며 과연 또다시 이곳에 와 볼 수는 있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에 후쿠오카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문에서 얼굴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언제부턴가 어디 낯선 곳을 가면 내가 과연 죽기 전에 이곳에 다시 한 번 와 볼 수는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마음이 짠해지곤 한다. 그래서 낯선 풍경, 낯선 사람 하나하나가 마치 다시는 보지 못할 님이라도 되는 양 조금이라도 더 깊이 기억 속에 묻어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곤 한다.

입국절차를 마치고 하카타항에서 버스를 타고 하카타역으로 향했다. 오늘 우리 일행이 가야하는 곳은 나가사키다. 나가사키까지는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20여분 버스를 타고 하카타역에 도착했다. 하카타역 구내의 일본식 덮밥체인점 요시노야(吉野家:Yoshinoya)에서 규동(소고기덮밥)으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였다. 그리고 함께 부산을 출발하지 못하고 다음 배로 후쿠오카로 오고 있는 일행 목사님 한분을 기다리느라 역 구내의 KFC에서 커피를 한잔씩 하며 기다렸다.

 오후 2시, 뒤쫓아 합류한 목사님까지 모두 7명의 진주시찰회 목회자들이 나가사키행 급행열차 카모메에 올랐다. 일본그리스도교유적지 순례라는 이름으로 큐슈지역의 나가사키(長崎), 시마바라(島原), 아마쿠사(天草) 일대를 둘러보는 일종의 역사기행의 길에 나선 것이다. 나가사키까지는 대략 2시간 남짓한 시간이 걸린다. 후쿠오카를 벗어나자마자 차창 밖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풍경이 이어진다. 결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정말 오랜만에 기차를 타본다. 6년 전에 일본에서 기차를 타본 이래 아마 처음일 듯 싶다. 신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부산의 교회를 섬기는 덕분에 3년 동안 매주 기차를 타고 수원-부산을 오르내렸는데 그 후 기차 탈 일이 없어졌다. 오랜만에 타보는 기차가 너무 좋다.

나가사키에 도착해 우선 호텔을 찾아 짐을 풀고 나가사키시내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노면전차를 타고 하마노마치로 갔다.

                                               <나가사키역 앞 노면전차 정류장>

하마노마치는 하마노마치 아케이드를 중심으로 다이마루백화점 등 백화점과 쇼핑센터, 음식점들이 밀집해 있는 나가사키의 최고중심가다. 우리 일행은 하마노마치 아케이드를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1927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는 돈까스 전문점엘 들어갔다. 각자 취향대로 주문을 하니 할머니가 직접 손으로 돈까스를 만들어 튀겨 내오는데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모두 흡족한 얼굴로 식당을 나왔는데 다만 이번 여행에 살림을 맡은 박목사님만이 이렇게 먹으면 곤란한데라며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빠듯한 여행비용에 한끼당 평균 식사비용이 나름 정해져 있는데 첫날 저녁식사비용이 조금 과했다는 뜻이었다. 그랬거나 말거나 내일 먹을 것은 내일 걱정하기로 하고 일본에서의 첫날밤은 맛있는 돈까스가 준 적당한 포만감과 모처럼 얻은 자유와 해방감에 마냥 흐뭇하게 지나갔다.

10/7(화) 둘째날: 평화공원, 우라카미덴슈도, 원폭자료관, 26일본성인순교지

일본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역사기행이 시작된다. 오늘 하루 나가사키를 둘러보고 저녁에 시마바라까지 가야한다. 나가사키에서 시마바라까지는 기차로 대략 2시간 정도 걸린다. 마음이 바쁘다. 호텔 체크아웃 후 호텔 프론트에 짐을 모조리 맡겨놓은 다음 우리 일행이 제일 먼저 찾아 나선 곳은 평화공원이다. 나가사키는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함께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이다. 원폭투하로 당시 나가사키 인구 24만 명 중 7만 4천 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평화공원은 원폭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고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고자 세워진 공원이다. 호텔 앞 전차정류장에서 전차를 타고 마츠야마마치(松山町)역에 내려 길 건너 평화공원에 오르는 계단을 올랐다. 평화의 샘, 평화의 종을 지나 공원 제일 안쪽에 세워진 평화기원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처럼 평화기원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청동색의 이 평화기원상은 피폭 10주년을 맞은 1955년 나가사키 출신의 조각가 기타무라 세이보(北村西望)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늘을 향한 오른손은 하늘에서 투하된 원폭을 가리키는 것으로 원폭의 위험을 경고하는 의미이고, 옆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이고, 지긋이 눈을 감은 것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뜻이라고 한다.

                                                           <평화공원의 평화기원상>

평화기원상 양 옆에는 추모의 탑이 있는데 그곳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종이학이 유리병 가득 담겨져 놓여 있었고 실에 길게 꿰어 늘어뜨린 종이학이 마치 화환처럼 바쳐져 있었다.

우라카미텐슈도

평화공원에서 내려와 우리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우라카미텐슈도(우라카미천주당)이다. 우라카미텐슈도는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폭심지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500m떨어진 언덕위에 위치한 교회당이다.

                                                           <우라카미텐슈도>

원래 건물은 프랑스 선교사 프레노신부의 감독 아래 1895년 착공해 무려 3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1925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아시아 최대의 교회당이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폭심지에서 겨우 5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던 이 교회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원폭 투하당시 교회당 안에 있던 신부 두 명과 수십 명의 신자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당시 우라카미성당의 교인이 12,000명가량이었는데 원폭 투하로 8,500여 명의 교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지금의 교회당은 1959년에 원폭으로 붕괴된 이전 교회당을 모델로 하여 복원한 것인데 1962년 대주교성당(Cathedral)으로 지정되었다. 교회당 입구에 목이 잘리거나 검게 그을린 성상(聖像)들이 원폭 당시의 참상을 묵묵히 보여주고 있다. 평화로운 교회당을 배경으로 목이 잘리거나 검게 그을린 체 서 있는 성상들의 모습이 평화를 염원하면서도 끊임없이 전쟁과 살육을 일삼아 온 인간의 사악함과 어리석음을 무언으로 꾸짖고 있는 듯하다.

                                       <원폭으로 목이 잘리고 검게 그을린 성상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우라카미텐슈도를 나와 우리 일행이 향한 곳은 교회당 근처의 나가사키원폭자료관이다. 이 자료관은 나가사키 피폭50주년을 기념하여 1996년에 개관한 곳이다. 자료관에는 피폭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각종 사진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의 실물모형과 원폭이 개발되어 전쟁에 실제 투하되기까지의 과정을 사진과 도표로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전시관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원폭으로 붕괴된 우라카미텐슈도의 측면벽 잔해였다.

그리고 폭심지로부터 800m 떨어져 있던 케이호중학교에 세워져있었다던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린 급수탱크탑의 모습은 당시 원폭의 위력을 짐작케 했다. 미국은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상공에 일명 패트맨(뚱뚱보)라고 이름붙인 무게 4.5톤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폭자료실에는 폭심지에서 800m 떨어진 산노 신사 부근의 민가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벽시계가 전시되어 있는데 시계바늘이 11시 2분에 멈추어져 있다.

                                                     <원폭으로 오전 11시 2분에 멈추어 버린 벽시계>

당시 원폭의 시간이 오전 11시 2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한 번의 원폭투하로 나가사키시의 45%가 파괴되었고 사망자 7만 3,884명, 부상자 7만 4,909명, 당시 나가시키 인구 24만 명 중 30%가 사망했다. (1950년 나가사키시 원폭자료보존위원회 조사) 그 중에는 일본에 강제로 끌려와 나가사키의 군수공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조선인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다. 피폭 당시 나가사키에는 3만명이 넘는 조선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미쓰비시중공업계열의 조선소, 제강소, 군수공장 등에서 노예처럼 강제노동에 혹사를 당하고 있었는데 이 중 2만명 가량이 폭사(爆死)하고 1만명 가량이 해방후 피폭의 고통을 안고 귀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자폭탄이 폭발하면 태양열의 1000배에 해당하는 고열이 1~2초 동안 지상을 덮치는데 이 고열로 인해 반경 2.5km안의 생명체는 그대로 숯덩이가 되고 만다고 한다. 그래서 피해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에는 유독 새카맣게 숯덩이가 되어 나뒹구는 시신들의 참혹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많았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불탄 모습>

엄마와 아이가 함께 나란히 불타 숨져있는 사진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고, 새카맣게 숯으로 변한 어느 여학생의 도시락과 아마 그 도시락의 주인공인 듯 도시락 뒤로 놓여져 있는 친구들과 함께 화사하게 웃으며 찍은 생전의 사진이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까만 숯으로 변해 버린 도시락>

자료관 안내지를 보니 이 도시락은 폭심지에서 700m 떨어진 이와카와마치에서 숨진 쓰쓰미 사토코양(당시 14세)의 유품이다. 도시락 뒷면에 “2-3 쓰쓰미 사토코”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아침에 집을 나설 때 그것이 엄마와의 마지막 작별이 될 줄 소녀는 꿈엔들 생각해 보았을까? 친구들과 도란도란 둘러 앉아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웃음꽃을 피우던 점심시간은 어제가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상상이라도 해보았을까? 점심시간을 한 시간 앞둔 오전 11시 2분, 태양열의 1000배가 넘는 핵폭풍이 14살 난 어린 소녀의 꿈 많은 인생도, 딸의 손에 도시락을 쥐어주며 따뜻한 미소로 등교길을 배웅해 주었을 소녀의 엄마도, 친구들과 도란도란 나누어 먹었을 조그만 도시락도 모두 한 순간에 새까만 숯덩이로 만들고 말았다. 나는 그 도시락 앞에서 좀처럼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몇 년 전 태백의 석탄박물관을 관람할 때의 일이다. 광부들이 캄캄한 지하 채굴장에서 도시락을 까먹는 장면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곳 앞에서 왈칵 울음을 쏟고 말았다.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탓에 눈자위만 하얗게 남은 광부들이 땅 속 수백 미터 아래 새까만 채굴장 속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까먹는 그 모습에 어찌나 목이 메던 지. 광부들의 도시락 속 밥이 지하 채굴장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어찌나 하얗게 빛나던지! 새하얀 그 도시락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새까만 석탄가루를 들이마시며 일하던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한 가닥 위안이자 안식이요, 그 도시락을 손에 쥐어준 지상(地上)의 처와 자식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지하(地下)에서 두더지처럼 땅을 파며 모질게 살아야 했던 이유였다고 생각하니 광부들 도시락의 하얀 밥이 그렇게도 안쓰럽고 슬퍼 보일 수가 없었다.

주인을 잃은 체 새까맣게 숯덩이로 변한 소녀의 도시락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움과 슬픔을 넘어 분노가 치밀었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가장 참혹한 시간으로 바꾸어버린 전쟁의 폭력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자료관엔 이외에도 피폭 당시 원폭의 위력을 짐작케 하는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두개골이 붙어버린 철모, 사람의 손뼈가 녹아 유리와 엉켜 붙어 마치 화석처럼 굳어진 것 등이 상상을 초월하는 피폭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원폭낙하중심지

원폭자료관을 나와 우리일행은 자료관에서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원폭낙하중심지로 향했다. 조그만 공원으로 꾸며진 그곳에는 원폭순난자명봉안(原爆殉難者名奉安)이라 쓰인 원폭사몰자(原爆死沒者)를 추모하는 검은 색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 일행이 추모비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일본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참배를 나온 듯 했다. 대표로 보이는 아이 세 명이 앞에 서서 경례구호를 하자 추모비 앞에 늘어섰던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 숙여 묵념을 한다. 이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이토록 참혹한 전쟁의 피해를 입은 자신들을 단지 전쟁의 피해자로만 생각하도록 교육을 받고 있지는 않을까?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일본도 유사시를 대비해 핵무장을 하고 군사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일본우익정치세력의 집요한 왜곡된 역사교육에 이 아이들도 세뇌되어 가고 있지는 않을까? 착잡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원폭희생자추모비에 참배하는 일본초등학생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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