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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그리스도교 유적지 순례 기행문(하)

김성 (서울동노회,예수원교회,목사) 2008-10-15 (수) 23:58 15년전 5377  

10/8(수) 셋째 날: 시마바라성, 하라성유적지, 아마쿠사 시로 기념관

시마바라는 나가사키 현 남동쪽의 시마바라 반도에 있는 작은 소도시이다. 옛부터 조용한 온천휴양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이 곳 시마바라를 찾은 것은 느긋하게 온천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겉으로 마냥 조용해 보이기만 하는 이 곳은 17세기 에도막부정권의 잔혹한 그리스도교탄압과 가혹한 수탈에 맞서 당시 기리시단(吉利支丹, Kirishitan)들과 민중들이 봉기해 죽음으로 항쟁한 시마바라난의 저항정신이 배어 있는 곳이다. 우리는 바로 그 저항의 현장을 직접 찾아보고 그 유적과 유물을 더듬어 보고자 이 시골 소도시를 찾은 것이다.

                                                               <시마바라성 야경>

일반적으로 시마바라의 난으로 불리는 이 민중봉기는 1637년 10월 시마바라에서 일어났다. 시마바라는 영주 아리마 나오즈미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주민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유독 많았다. 바다 건너편 아마쿠사 열도 역시 영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Konishi Yukinaga)가 영주로 있던 곳으로 “그리스도의 섬”으로 불릴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시마바라와 아마쿠사 모두 영주가 바뀌면서 과중한 세금징수와 잔인한 그리스도교탄압에 나서자 참다못한 민중이 막부정권에 정면으로 저항의 창검을 든 것이다. 3만7천명에 달하는 민중들은 바닷가에 위치한 하라성을 점거한 체 12만 막부관군과 맞서 이듬해 2월까지 5개월가량 저항을 벌이다 끝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막부군에 의해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시마바라의 난을 마지막으로 약 250년 후 나가사키의 오우라텐슈도에서 “신자재발견”이 이루어질 때 까지 일본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공적인 교회조직과 신자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시마바라성

우리는 시마바라의 난과 관련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시마바라성을 찾았다. 5층 건물의 천수각(天守閣)은 향토사료와 민속자료를 전시하는 민속박물관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중 1층의 기독교자료관이 포르투갈과 스페인과의 무역이 시작된 시대부터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시마바라난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자료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시마바라의 난을 이끌었던 당시 16세의 소년장수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의 유품 및 관음성모상 등 당시 기리시단들의 신앙생활과 관련한 유물들과 하라성을 폭격하는 네덜란드함선의 모습, 불타는 하라성을 그린 대형그림과 아마쿠사 시로 진영의 깃발을 그린 진중기(陣中棋) 그림 등도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쿠사 시로 진영의 군기>

하라성 공방전을 축소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있었다. 5층 꼭대기에 오르자 시마바라시 전경이 동서남북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자리한 너무도 평화로워 보이는 작은 도시이다. 우리 일행은 천수각 꼭대기에 앉아 가슴까지 시원하게 불어오는 시마바라의 바닷바람에 잠시 지친 다리품을 쉬었다. 다음 목적지는 하라성 유적지다. 아마쿠사 시로와 3만7천명의 저항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전몰한 곳, 이제 그 곳을 찾아갈 차례다. 하라성 유적지를 가려면 다시 호텔로 돌아가 호텔 앞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을 가야했다.

하라성 유적지(原城跡)

우리는 택시를 타고 호텔 앞으로 다시 돌아와 하라성 유적지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1시간을 넘게 달려서 한적한 바닷가 시골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우리 일행만이 달랑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하라성 유적지를 가리키는 길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

왔다. 세로로 된 직사각형의 초록색 표지판의 맨 위에는 십자가문양이 새겨진 네모난 동판에 부착되어 있는데 십자가 속에는 가로로 포루투칼어로 크리스챤을 뜻하는 Christao가 새겨져 있고 세로로는 한문으로 切支丹史跡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교 유적지란 뜻인 듯 했다.

                                                    <하라성 유적지를 가리키는 표지판>

버스에서 내려 20여분을 바닷가 쪽으로 걸어들어 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주변풍광은 너무 아름다웠다. 참으로 풍광이 좋은 곳에 하라성이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의 잔해가 이곳에 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성터에 오르니 아마쿠사 시로의 동상이 바다 쪽을 향해 서 있다. 칼을 찬 무사의 모습인데 가슴에는 십자가문양이 새겨져 있고 두 손을 깍지 낀 체 두 눈을 감고 기도하는 모습이다.

                                                   <하라성 유적지의 아마쿠사 시로 동상>

시마바라의 전봉준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

오래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 사진을 본 후로 나는 이 동상을 내 눈으로 직접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칼을 찬 사무라이 무사와 십자가, 그리고 기도하는 두 손! 어딘지 서로 잘 조화되지 않을 것 같은 어색한 조합이기에 아마쿠사 시로의 동상이 주는 인상은 굉장히 강렬했다. 16살의 소년으로 3만7천명의 민중을 이끌고 12만의 에도막부군과 맞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쟁을 이끈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세월의 풍상에 이제는 비문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된 그의 초라한 비석 앞에서 나는 그가 시마바라의 전봉준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동학혁명은 반봉건민중운동과 동학이라는 신흥종교가 결합하면서 일어난 민중혁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마바라의 난은 동학혁명과 그 성격이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부정권의 과도한 수탈에 맞선 반봉건민중운동에 그리스도교라는 신흥종교가 결합하여 일어난 민중혁명이 시마바라의 난이다. 그렇다면 아마쿠사 시로는 사회,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신천지(新天地) 개벽(開闢)을 꿈꾸었던 시마바라의 전봉준이 아닐까? 그가 꿈꾸었던 신천지의 꿈은 그 시대엔 비록 무참히 깨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들 가슴에 보다 자유롭고 보다 평등하며 보다 아름다운 새 세상에 대한 영원한 갈망의 바람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아마쿠사 시로는 이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고 맥박을 요동치게 만드는 자유의 혼이 되었다. 억압과 착취아래 짓눌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부풀게 하고 조아리던 머리를 들고 굽은 허리를 펴고 일어서게 만드는 자유의 바람이 되었다. 우리 일행은 아마쿠사 시로 동상 앞에서 이번 여행을 통틀어 일곱 명 일행 모두가 다 나오는 유일한 기념사진 한 장을 찍었다. 마침 그곳을 찾은 일본 순례객 덕분이었다.

                                           <아마쿠사 시로 동상앞에 선 진주시찰회 목회자들>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와 30분정도 버스를 기다린 후 구치노츠(Kuchinotsu)행 버스에 올랐다. 구치노츠는 시마바라반도 최남단에 있는 포구로 그 곳에서 페리를 타고 아마쿠사로 건너가야 한다. 이제 남은 일정은 구치노츠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페리를 타고 아마쿠사해를 건너 아마쿠사로 건너간 다음에 혼도시에 있다는 아마쿠사 시로 기념관을 찾아가는 것이다. 아마쿠사 시로 기념관이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 찾아가는 그리스도교유적지이다. 기념관 관람이 끝나면 기차를 타고 후쿠오카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셈이다. 하라성 유적지에서 버스를 타고 15분쯤 달려 구치노츠에 내렸다. 아마쿠사로 가는 시마테츠 페리표를 끊은 다음 터미널 옆 식당에 들어가서 라멘으로 늦은 점심식사를 때웠다. 아마쿠사까지는 페리로 30분 걸린다고 한다.

아마쿠사

오후 2시 30분, 페리를 타고 아마쿠사해를 건너 맞은 편 아마쿠사에 3시에 내렸다. 구치노츠보다도 더 작은 그야말로 시골포구다. 배에서 내리자 터미널마당에 아마쿠사 동상이 서 있다. 터미널 마당 한 켠에 택시 몇 대가 서 있을 뿐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무도 한적하다. 우리 일행 중 유일하게 일본어가 되는 정목사님이 가게에 들어가 아마쿠사 시로 기념관을 찾아가는 길을 물었는데 우리는 너무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대답을 들어야 했다. 아마쿠사 어디쯤엔가 있을 줄 알았던 기념관이 차로 한 시간 쯤 가야하는 곳에 있다는 것과 더욱 문제는 그리로 가는 버스가 무려 두 시간을 기다려야 온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순간 막막했다. 두 시간이나 기다려 버스를 타고 아마쿠사 시로 기념관을 찾아간들 그 때는 이미 문을 닫았을 시간이니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될 터이고, 그렇다고 택시를 타고 가자니 차 한 대당 우리 돈 20만원을 내라 하니 밥 사먹을 돈도 모자랄까 걱정하고 있는 마당에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정목사님이 택시기사와 흥정한 끝에 봉고 한 대를 우리 돈 15만원에 타기로 결정을 보았다. 아마쿠사 시로 기념관에 들러 기념관을 관람한 후 후쿠오카로 올라가는 기차를 타는 미츠미(Misumi)역까지 데려다 주는 조건이었다. 비록 15만원이라는 예상외의 경비가 들기는 했지만 봉고택시를 이용하기로 결정한 우리의 선택은 분명 잘한 선택이었다. 비록 마감시간에 쫓겨 기념관을 차분하게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은 남았지만 기념관을 본 후 미츠미에서 기차를 타고 구마모토를 거쳐 후쿠오카에 저녁 7시 늦지 않은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봉고택시를 이용하기로 한 신속한 결정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택시 두 대에 40만원을 요구하던 일본택시기사와 가격흥정을 벌여 봉고 한 대 15만원을 이끌어낸 정목사님의 공로가 크다.

아마쿠사 시로 기념관

아침에 호텔을 체크 아웃할 때 프론트 직원에게 아마쿠사 시로 기념관의 위치를 물었더니 하나같이 정확한 위치를 모른 체 구치노츠에서 배를 타고 아마쿠사로 건너가면 된다고만 가르쳐 주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게 나의 실수였다. 나중 알고 보니 기념관은 우리가 기차를 탈 미츠미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가미아마쿠사시(上天草市)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미아마쿠사시의 아마쿠사 시로 기념관>

폐관 30분 전에 간신히 기념관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우선 1층 영상홀에서 입체안경을 쓰고 3D영화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는 아마쿠사 시로”라는 15분 정도 되는 영화를 보았다. 그 흔한 영어자막 하나 없어 대충 영상으로만 내용을 짐작하며 봐야했다. 한 젊은 무사의 눈을 통해 아마쿠사 시로의 시마바라 난이 무엇을 위한 싸움이었는지를 소개하는 내용인 듯 했다. 1층 전시관엔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전국시대 실권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일본에 복음을 전한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형상이 실물크기로 제작되어 전시되어 있었고, 하라성 전투장면들이 미니어처로 제작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2층엔 조용한 음악과 편안한 빛의 조명아래 조용히 묵상할 수 있는 명상홀이 있었다.

기념관을 나와 미츠미역에 도착하자 기차가 출발하기 6분전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다음 기차를 타기 위해 꼼짝없이 역에서 1시간을 기다려야 할 뻔 했다. 미츠미(三角)-구마모토(能本)간을 운행하는 간이열차를 타고 1시간 걸려 구마모토 역에 도착했다. 구마모토에서 후코오카(하카타)까지 급행열차로 바꿔타야 하는데 구마모토 역에 도착하니 하카타행 열차 아리아케가 출발하기 4분전이었다. 또다시 황급하게 기차를 옮겨 탔다. 기차가 출발했다. 후쿠오카 도착예정시간이 저녁 7시 8분이다. 중간에 돌발 상황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저녁 늦지 않게 후쿠오카로 돌아갈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미츠미나 구마모토에서 간발의 차이로 기차를 탈 수 없었다면 아마 밤늦게라야 후쿠오카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쿠오카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캐널시티에 위치한 호텔에 짐을 풀고 지하 식당가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시내구경에 나섰다. 어제 오늘 시골로만 돌다가 도시로 돌아오니 새삼 눈이 휘둥그레졌다. 확실히 도시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 여행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하는데 아무 할 일도 없이 그저 도시의 밤거리를 이리 저리 걷는 것도 즐겁고 재미있다.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10/9(목) 다시 부산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톈진으로 갔다. 환전을 하고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은행 문이 열기 전이라 톈진을 이리 저리 걸으며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구경하고 아침시간 벼룩시장처럼 잠깐 영업하는 Breakfast Cafe에서 아침요기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사진에 담았다.

                                                                      <텐진거리의 Breakfast Cafe>

프론트에서 알려준 대로 미쓰비시 은행을 찾아 환전을 한 후 백화점과 플라자 몇 곳을 구경하며 선물을 구입하고 Tower Records에서 일본의 신세대 바이올린 연주자 에미리 미야모토(Emiri Miyamoto)의 앨범을 두 장 구입했다. Emiri Miyamoto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교향악단의 오보에 연주자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한 실력파 연주자로 14살 때 독일 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1위를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아직 앨범을 구할 수 없는 연주자인데 Tower Records에서 보니 그녀의 두 번째 앨범 Tears가 클래식앨범 판매 차트 1위에 올라있는 걸로 보면 머지않아 국내에서도 라이센스음반이 곧 발매되리라 생각한다. 앨범재킷을 보면 미모 또한 대단하다. 탁월한 음악적 재능과 완벽한 미모! 하나님께서 이렇게 몰아주시는 사람을 보면 참으로 부러운 생각이 든다.

 후쿠오카에서의 마지막 점심식사는 캐널시티 지하의 유명한 이치란(一蘭)라멘이었는데 별로 반응들이 좋지 않았다. 돼지뼈를 고아 만든 돈꼬츠라멘의 국물이 영 느끼한 모양들이다. 식사 후 택시 두 대를 나눠 타고 하카타항으로 출발했다. 3박 4일 일본에서의 짧은 여정이 모두 끝났다. 너무 일정이 빡빡해서 모처럼의 여행이 여유로운 쉼이 되지 못하고 육체적으로 고된 점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유를 만끽하며 동역자들과 함께 유서 깊은 신앙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동역자들과 함께 이런 여행을 자주 하고 싶다. 정대성, 명기식, 최재웅, 김성철, 문경호, 박영도 목사님과 함께 한 이번 일본그리스도교유적지 순례는 오래도록 추억할 뜻깊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2008. 10. 15 김성 목사(남해 당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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