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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가 본 신앙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오청환 (서울동노회,강동교회,장로) 2009-01-16 (금) 22:49 15년전 4687  
 

장로가 본 신앙에서의 커뮤니케이션

                                                                                            강동교회 오 청 환 장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교수신문에서는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하는데 어쩌면 세상을 그리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신통한 생각이 들 정도인데 2008년도 올해의 사자성어로 “호질기의(護疾忌醫)”를 선정하였다고 한다. 호질기의는 병이 있는데도 의사한테 보여 치료받기를 꺼린다는 뜻으로 중국  북송시대 유학자 주돈이가 통서(通書)에서 남의 충고를 귀담지 않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 잡아 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병을 감싸 안아 숨기면서 의원을 기피해 자신의 몸을 망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는데 교수들은 미국산 쇠고기파문, 촛불시위, 미국발 금융위기를 처리하는 정부의 대응방식을 “호질기의”에 빗대어 비판하면서 선정하였다고 한다.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강조한 말이 소통(疏通)이라는 단어였는데 한해가 지나면서 한국의 지성인이 선정한 사자성어는 호질기의(護疾忌醫)였다니 어떻게 이렇게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을까. 이건 소통이 아니라 불통으로 일관해왔다고 말해도 과히 틀리지 않는 정부의 시스템인데 이런 현실이 지금만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때에도 민심과 불통 있었다고 말들 하는데 위의 불통세분이 모두 장로님이라는데 공통점이 있다고 말하면서 교인들 특히 장로님들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세상의 시선을 생각하면서 신앙에서의 신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알아보고 교회 내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장로의 역할 등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로 한다.


신앙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신앙과 신앙의 경험을 소통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본질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동안 교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단순한 복음 선포의 수단이나 기술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앙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계시, 즉 인간을 상대로 하는 자기 커뮤니케이션(Self-Communication)으로 보고 있다.

 히브리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고통에 신음하고 울부짖을 때 야훼께서 ‘나는 내 백성이 고통에서 신음하고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출애굽기 3:7) 바로 이 야훼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 사건은 히브리 백성의 이집트 탈출이라는 구원의 사건으로 이어져 형성된 것이 소위 계약 공동체(Covenant Community)였으며 이 공동체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하나님 백성의 신앙이 자유롭게 소통된다. 만일 단절이나 왜곡이 생겼을 겨우 커뮤니케이션이 파기되어 인간은 신에게서 소외된다. 이 관계회복을 위하여 제사장적 매개과정이 필요하게 되며, 여기에 고백과 용서의 관계의 정립이 생기게 되었다.

계약 공동체가 계약을 파기하고 공동체의 커뮤니케이션과 커뮤니온(Communion)이 붕괴되었을 때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뜻은 예언자들을 매개로 한 예언 운동으로 나타났으며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은 정의를 위한 예언, 정의를 위한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나타난다.

이 커뮤니케이션을 우리는 예언자적의 사명으로 이해하고 있다.


교회와 케뮤니케이션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자신의 계시요 커뮤니케이션으로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의 교신행위이다.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요한복음 1:14)라는 말의 뜻이다. 복된 소식 즉 복음(Good News)이 예수를 통하여 이 땅에 선포되는 커뮤니케이션을 형성되었으며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감림이 성령의 역사는 교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와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으로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제사와 성령의 오심으로 창립됐다. 구원의 기쁜 소식과 하나님의 기쁜 소식과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교회의 직무이고 사명이다. 교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의 표본은 예수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당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방법은 당대에 통용되던 모든 수단과 방법이었다.

일대일(면대면)전도, 대중설교, 소그룹 모임, 치유의 기적과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담당하셨던 모습 등에서 현재의 교회의 커뮤니케이션역할을 찾을 때이다.


사회와 교회의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지금 교계는 사회와 단절되어가는 현실을 절박한 심정으로 바라봐야 할 때이다. 기독교의 명칭을 개독교로 표현하는가 하면 목사를 먹사로 표현하는 등 갈등관계를 노출시키고 있다.

얼마 전에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원작으로 하여 이창동이 감독을 하고 전도연과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진 전도연이 신앙을 접하고 변하는 과정에서  아들의 살해범을 용서하고자 교도소에 찾아가서 수감자를 면회하는 과정에서 얼굴이 편안한 죄인을 보고 전도연이 의아해서 묻는 전도연에게 자신은 하나님으로 부터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대화 속에 전도연이 하나님에 대해 반발하는 모습을 보고 여러 생각이 있었다.

 구원(용서)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진리는 믿는 사람이라면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피해자의 용서 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며 뻔뻔할 정도로 편안해하는 수감자의 신앙모습에 구역질이 날것이다.

 과연 우리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사고 속에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과 병든 자에게 다가가며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고 형제와 다툼이 있었다면 예물을 두고 화해하고 오라고 하셨는데 지금 우리는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면 나의 이웃과 형제와의 관계는 상처를 주어도 괜찮은 것인지 지금 우리는 나의 구원의 확신과 축복이 과연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나의 주위 사람에게 임재하신 성령이 나에게 임한 성령과 과연 올바른 관계의 성령인지 영의 커뮤니케이션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 이이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관자의 영과 일치하는 영이 나에게 임하시기를 항상 묵상으로 간구하는 삶이 사회와 단절된 하나님의 영을 살리는 믿음일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에서 장로의 역할

 교회공동체에서 흔히들 “가장 힘든 것은 인간관계”라는 말을 한다, 인간관계 대부분은 의사소통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큰소리가 나는 이유가 내려진 결정이 잘못되어서 그렇다기보다 그 결정에 내가 소외되었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누군가 소통의 반대말은 ‘소외’ 혹은 ‘외로움’이라고 정의했다. 사전에 서로가 소통했다면 협력하여 선을 이루었을 텐데 충분한 교감이 없었기에 분쟁으로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소통은 그 교회의 성격과 질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중하나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교회의 의사결정 과정이나 결과가 공개되더라도 대개는 아무 반향을 일으키지 못할 만한 결정이 대부분인데도 제한적으로 공개하거나 공개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다.

목회자나 장로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선민의식과 전문가의식과 경륜자의 연륜을 은근히 앞세워 정보를 독점하고 평신도들과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하면서 갈등이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교회내 구성원간의 갈등표출시 목사와 평신도와의 사이에 장로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수행하느냐에 따라 교회의 평온도가 결정된다.

 또 다른 하나는 교인의 중층적 의식구조로 인하여 발생되는 갈등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교역자 청빙에 관한 의식구조에서 교인과 교역자 모두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인은 사회추세에 따라 목회자청빙의 모든 과정에 본인들이 참여하고 싶어 하고 알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자기교회의 목회자가 다른 교회의 공개청빙에 지원한 사실을 알면 그 목회자를 보는 시각이 곱지 않고 설교도 은혜롭지 못하여 불편한 관계가 된 다. 그렇기에 목회자는 말 그대로 청빙을 원하고 있다. 이런 중층적사고속에 장로는 자유롭지 못하기에 현명한 리더쉽은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맺는말

 신앙적으로 장로는 확고한 구원관과 선민의식에 의하여 자기 확신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강하다. 장로대통령들에서 보듯이 자기 확신에 의한 고집으로 국민으로부터 커뮤니케이션이 요구되고 있으나 잘 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의 기독교문화도 자기만의 구원세계에 빠지므로 인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기에 사회로부터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을 요구받고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독점적 믿음에 대한 우려이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처럼 성령은 공유된다. 나의 구원의 확신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믿음을 정죄하면 성령의 교통이 차단되기에 하늘나라는 멀기만 한 것이다.

 나에게 임하신 성령과 너에게 임하신 성령이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대 진정한 성령의 임재이기에 교회는 평온을 이루수가 있다.

 장로는 교회 내에서나 사회에서 주변사람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여야 하고 평온하게 하여야할 의무가 있기에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방법과 이웃 간에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것이 하늘에는 영광을 돌리고 땅에는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닮아가는 삶이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장로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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