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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노회 사사만세의거 기념예배(강연 및 자료)

이종덕 (익산노회,삼광교회,목사) 2009-04-12 (일) 15:28 14년전 6290  
 

(아래 원고를 기본으로 하여 문용기열사의 순교 후 남겨진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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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四.四만세운동과 그 역사적 의미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한국교회사)

1. 머릿글

이 글은 1919년 4월 4일 익산 구시장터에서 전개된 4.4 만세운동을 중심으로 익산 지역 3?1운동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익산 4.4 만세운동은 1) 3.1운동의 대중 투쟁 단계에서 지방에서 일어난 가장 치열한 만세시위의 대표적인 예라는 점, 2) 일제의 농지 수탈의 대표적인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저항운동이었다는 점, 3) 시위 현장에서 6명의 희생자가 나옴으로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을 국내외에 폭로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 4) 시위의 준비와 점화 단계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 등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2. 익산지역 3.1운동의 배경

2.1 일제의 익산지역 침투와 농장 건설

익산은 한말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된 대표적인 도시다.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전 익산은 “사방 십리 갈대로 뒤덮인 늪지”(十里蘆花不見沼)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압력으로 1899년 군산이 개항장이 되고 러일전쟁 이후 호남지역 농산물 반출의 전진 기지로 군산항이 개발되면서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도로를 개설되자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익산은 전략적으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더욱이 1909년 전라선의 지선으로 익산과 군산을 잇는 철도가 개설되면서 익산은 전북지역 교통 요충지로서 집중 개발되었고 익산에는 일본인 거류민을 중심한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1906년에 다나까(田中德次郞)가 일본인으로는 처음 익산에 들어와 여관을 차린 것을 효시로 상인들이 들어와 자리 잡았고 한일합병 이후에는 그 수가 급증하여 3백여 호에 1천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참고로 1915년 당시 익산 인구 분포를 보면 다음과 같다.
[표는 한글문서에서 참조]

전체 인구의 60%를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어 익산이 대표적인 ‘일본인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황무지 같은 전북 일대 땅을 헐값에 사들여 수리 시설을 하고 농지로 개발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일본인들은 기업 형태의 ‘농장’(農場)을 설립하여 농지 수탈과 경영에 나섰다. 농장은 일제의 농지 수탈의 상징이었다. 1914년 당시 익산에 근거를 두었던 일본인 경영의 농장으로 ‘1백 정보 이상’을 소유하였던 대농장은 다음과 같았다.
[표는 한글문서에서 참조]

당시 전북 전체에 일본인 농장이 40여 개 있었는데 그중 반이 익산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익산이 농장 관리의 중심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도 익산 구시장 언덕에 위치했던 대교농장은 익산지역 일본인 농장의 대표적인 존재였다. 대교농장은 일본 깃부현에서 대교은행(大橋銀行)을 경영하고 있던 기업가 오오하시(大橋興市)가 설립한 것으로 익산에 농장을 건설하던 1907년 가을은 전북 지역 일대에서 항일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였다. 오오하시의 대리인으로 익산에 와서 농장 개척의 실무를 맡았던 에다요시(枝吉元信)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익산 지역 땅을 계속 사들여 ‘전북 굴지’의 대농장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는 여관업자 다나까 등과 함께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자체 경비에 나섰으며 총독부와 교섭하여 일본군 수비대 및 헌병대가 익산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특히 대교농장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히야오(百尾覺太郞)는 자경단 단장으로 대교농장 뿐 아니라 익산지역 일본인 보호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처럼 대교농장을 비롯한 일본인 농장들은 무장한 ‘준경찰’ 경비조직을 운영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대교농장을 비롯한 익산 지역의 일본인 농장은 일제의 경제 수탈과 정치적 침략의 상징적 존재로 인식되었고 그만큼 한국인들에게는 ‘분노와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2.2 익산의 종교적 상황

익산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불교, 그 중에도 ‘내세지향적인’ 미륵불교의 중심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는 억압받는 종교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익산 지역의 불교는 더욱 ‘민중적’ 성향을 띄게 되었다. 이같은 민중 불교의 사회 개혁적 성향을 잘 드러낸 것이 3.1운동 이후 이 지역에서 발원한 원불교(圓佛敎)이다.
그러나 3.1운동 당시 이 지역 종교를 주도한 것은 기독교였다. 익산 지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군산이 개항되기 전이었다. 1894년 전주 선교부를 개척한 남장로회 선교사 전킨(W.M. Junkin)은 1896년 군산 궁말에 자리잡고 (전군도로가 나기 전이라) 만경강 뱃길을 따라 전주를 오가며 ‘호남 선교’를 추진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목천포 아랫동네 남전(南田)에 복음이 들어왔다. 즉 1899년 봄, 군산 전킨의 사랑채에서 남전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김정현’과 ‘이성일 댁(부인)’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 남전 사람 12명이 세례를 받아 불과 1년 사이에 남전 교인수가 30여 명에 이르렀다. 처음에 남전 교인들은 옥구 구암리교회, 김제 송지동교회 등지로 예배를 드리러 다니다가 1900년 봄부터 남전의 이윤국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독립 교회가 되었고 1901년 초가 5간 예배당에 이어 1915년 12칸짜리 양철지붕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남전에는 1910년 이전 남전교회에서 설립한 도남학교(道南學校)도 있었다. 학교 설립자 김정직을 비롯하여 민족 의식이 강한 교사들이 와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1921년 신성학교(信聖學校)로 이름을 바꾸어 1930년대 말까지 존속하였다. 다른 지역의 기독교 학교와 마찬가지로 도남학교도 일제시대 민족 계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기독교 외의 종교로는 천도교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일본인들의 종교로는 불교 계통으로 동본원사(東本願寺)와 일련종(日蓮宗)이 1912년부터 포교를 시작하였고 1913년 가을에는 익산 신사(神社)까지 건립되어 일본 종교의 성세를 구가하였다.

3. 익산 3.1만세 운동

3.1 군산과 전북 지역 만세운동

1919년 3월 5일 전라북도에서는 처음으로 군산 영명학교 학생들과 교인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날 시위를 주도하고 체포된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朴淵世, 1883-1944)가 바로 남전리 출신이었다. 후에 목사가 되어 목포에서 목회 하다가 천황숭배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순교한 그는 1906년 남전교회에서 부친(박재형)과 함께 세례를 받은 후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 신명학교를 거쳐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있던 중 3.1운동을 맞았다.
박연세는 1919년 2월 25일경 군산에 내려온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로부터 <독립선언서> 1백여 매를 전달받고 영명학교 교사 고석주, 이두열, 김수영, 교인 김성은, 유희순, 기독병원 사무원 양기준, 유한종, 양성도 등과 시위를 준비하였다. 본래 계획은 3월 6일 군산 장날을 기해 시위할 계획이었으나 거사 전날(3월 5일)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영명학교를 급습하여 학교 안에서 선언서 2천 장을 발견하고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등 교사, 학생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교사 김윤실이 학생들을 동원해 시위를 시작하였고 기독교 여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여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군산 시위를 촉발시킨 김병수는 김제 유강리 출신으로 신명학교와 군산 영명학교를 거친 박연세의 제자였다. 그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세브란스병원 약제사 이갑성의 지휘를 받아 전북 지역 조직 확산의 책임을 띠고 군산으로 내려와 박연세와 접촉한 후에 남전교회 교인들과도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한 후 서울로 다시 올라가 3월 5일 서울의 학생연합시위에 참가한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3월 5일 군산 시위는 만세운동이 전북 전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군산 시위 이후 임실(3월 12일), 전주(3월 13일), 고창(3월 15일), 청웅(3월 15일), 정읍(3월 16일), 김제(3월 21일), 신태인(3월 21일), 삼례(3월 23일), 오수(3월 23일), 남원(3월 23일), 산서(3월 23일), 진안(3월 25일), 장수(3월 26일), 금산(3월 29일), 무주(4월 1일), 옥구(4월 1일)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 들어서면서 그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처럼 전북 지역 각지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일제는 군과 경찰 병력을 증파하였는데 특히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익산에는 일본군 제4연대 소속 병력 1개 중대를 주둔시켜 삼엄한 경비를 펼치게 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익산에서 시위가 늦게 일어난 이유는 이같은 일본군 병력의 철저한 감시 때문이기도 했다.

3.2 익산 지역 만세시위 준비

이같은 상황에서도 익산 지역의 민족주의자들은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 첫 시도는 천도교쪽에서 나왔는데 3월 10일을 기해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중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두 번째 시도는 3월 16일 익산역 주변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으나 조기 진압으로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일본군 헌병대 1개 중대가 익산에 증파되었고 일본인들은 자위단 조직을 한층 강화하였다. 이처럼 익산에서는 일본군과 자위단의 삼엄한 경비로 시위다운 시위를 하지 못한 채 3월을 보냈다. 그러나 전국 각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 시위에 대한 정보는 익산 주민들을 자극하였고 계기만 주어지면 대대적인 시위로 발전될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폭발 직전의 폭약과 같은 분위기였다. 문제는 누가 심지에 점화를 하느냐에 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남전교회 교인들이 나선 것이다. 3.1운동 당시 남전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최대진(崔大珍) 목사는 정읍 고부 출신으로 그의 형 최중진(崔重珍)과 함께 동학 농민혁명 때 농민군에 가담하여 투쟁한 경력이 있던 민족주의자로 예배시간에 ‘출애굽 사건’과 관련된 설교를 종종 하면서 교인들에게 민족 의식을 불어넣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문용기를 비롯한 남전교회 교인들과 만세 시위를 준비했다.
문정관(文正寬)으로도 불린 문용기(文鏞祺, 1878-1919)는 남평 문씨 시중공파(侍中公派) 17세손으로 오산면 관음리(觀音里, 행정구역으론 오산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南聚奎)이 한말(1894년) 종4품 부호군(副護軍) 벼슬을 한 ‘호남 선비’ 집안 출신으로 군산 영명학교를 거쳐 1911년 6월 목포에 있던 ‘짠왓킨스중학교’(영흥중학교)를 1회로 졸업한 후 함경도 갑산에서 미국인 광산회사에서 통역으로 8년 일하다가 고향에 내려와 군산 영명학교와 남전 도남학교 등지에서 영어와 한문을 가르치던 중 3.1운동을 맞은 것이다. 그는 박연세를 통해 군산 영명학교 학생들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백여 장을 전달받아 본격적인 시위 준비에 착수했다.
남전교회교인들은 4월 4일(음력 3월 4일) 구익산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고 정명안, 박다연, 이성춘, 정군덕, 김만순, 박영문, 최대위(일명 최월봉) 등 교인들이 태극기와 선언서를 제작하였다..그리고 거사 당일, 시위대를 3대로 나누어 1대는 익산역, 2대는 구시장, 3대는 동익산역에서 시위를 시작하여 군중을 이끌고 대교농장으로 집결하기로 하였다. 대교농장은 일제 침략의 상징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3.3 익산 구시장 4.4 만세 시위

마침내 4월 4일 당일이 되어 교인들이 아침 일찍이 교회 마당으로 모였는데 정작 시위를 이끌 최대진 목사가 보이지 않았다. 전북노회장이었던 그는 4월 2일부터 전주에서 개최되고 있던 전북노회에 참석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남전교회 교인들은 시위를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하고 ‘목사 없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몸에 숨기고 시위 장소로 이동했다. 도남학교 졸업반 박영문(朴泳文)은 학생들을 지휘하였다. 구시장과 익산역 주변으로 진출한 교인들은 정오를 기해 시위를 시작했다. 문용기가 이끄는 구시장 시위대는 익산역이나 동익산역에서 시위대가 합류하기 전에 거세게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시위대는 ‘3백 명’(일제측 기록)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구시장 골목길로 해서 언덕 위 대교농장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놀란 대교농장 자위단과 헌병들이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압군의 발포와 곤봉 구타, 난자 행위가 자행되었고 시위대를 이끌던 문용기를 비롯하여 박영문, 장경춘(張京春), 박도현(朴道鉉) 등 남전교회 교인과 시위대를 따르던 익산 사람 서공유(徐公有)와 이충규(李忠圭)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당시 군산에 주재하고 있던 장로교 선교사 불(William F. Bull, 부위렴)이 미국에 보낸 비밀 문건에서 그날 사건 현장을 읽을 수 있다.
“정한 시간이 되자 그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만세 소리를 듣고 군인들이 공포를 쏘며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막을 수 없었다. 그러자 군인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발포하였고 현장에서 수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동시에 소방대원들이 군중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며 닥치는 대로 곤봉과 손도끼를 휘둘러 많은 부상자를 냈다. 일본군인 하나가 시위대를 이끌던 젊은이를 붙잡아 연행하려 하자 그는, ‘죄 지은 게 없으니 갈 수 없다’고 버텼다. 군인은 ‘그렇다면 여기서 죽일 수도 있다’고 위협하자 그는 머리를 고추 세우고 가슴을 내민 채, ‘죽일 테면 죽여라. 그러나 내 입에서 만세 소리만은 막지 못한다’ 하였다. 군인이 칼을 뽑아 그의 가슴을 찌르자 그는 피를 쏟으며 땅에 넘어졌다. 가슴에 꽂았던 칼을 빼는 군인을 향해 그는 ‘네가 나를 죽인다만 하느님께서 이 일로 네 나라를 벌주실 것이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조선 독립 만세’를 세 번 크게 외쳤다고 한다. 그날 현장에서 여섯 명이 살해되었는데 모두 기독교인이다.”(W.F. Bull, "Some Incidents in the Independent Movement in Korea", 1919)

대교농장 앞거리에서 자행된 일제의 폭력 진압은 제암리 사건(4월 15일)과 함께 3.1운동 기간 중 가장 잔인했던 일제 만행의 대표적인 예로 기록되고 있다. 그 날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익산지역 주민들은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고 더 이상 시위가 이어지지 못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희생자들은 제대로 장례조차 치를 수 없었다. 특히 문용기 집안의 경우엔 죽어 들어온 아들의 시체를 보고 그의 노모와 아홉 살 난 딸이 혼절해서 그 길로 별세했고 네 살 된 딸도 병을 앓다가 그해에 죽어 문용기의 아내(崔貞子, 1887-1955)는 한 해에 시체를 넷을 치워야 했다. 그는 남편이 입었던 ‘피 뭇은 옷’(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 중)을 간직하여 해방 이후 그날의 일제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증거물로 삼도록 했다.

4. 맺 음 글

지금까지 1919년 4월 4일 익산 구시장 대교농장 앞에서 거행된 만세운동을 중심으로 익산지역 3.1운동을 살펴보았다. 자료의 한계로 충분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익산지역 3.1운동은 다음 세 가지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민족저항운동적 성격이다. 3?1운동의 일반적 성격이 그러하지만 익산 지역 3?1운동은 일제의 정치?경제?사회적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의 성격이 강하다. 이는 군산과 함께 익산이 한말 이후 전개된 일제의 경제적 수탈 과정에서 개발된 지역이자 그 피해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다. 일제의 침략 행위가 강했던 만큼 그에 대한 저항도 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익산은 일본인들에 의해 개간되고 일본인 거류지 변모하면서 일본의 한국 진출과 침략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도시가 되었다. 결국 이들에게 삶의 기반을 빼앗긴 익산의 토착민들은 만세운동을 통해 저항과 독립의 의지를 표출하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4 만세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운동의 맥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농민저항운동적 성격이다. 4월 4일의 만세 시위는 한말 이후 농지 개간을 빌미로 일본인들에게 농지를 수탈당하고 소작으로 전락한 익산 지역 농민들의 분노와 저항이 표출된 것이다. 이는 만세 시위대가 익산지역의 대표적인 일본인 농장인 대교농장을 목표로 삼았다는데서 잘 드러난다. 지금도 남아 있는 대교농장의 거대한 창고 건물은 일제시대 이 지역 농산물 수탈의 생생한 증거라 할 수 있다. 4?4만세 시위를 주도한 남전교회 교인들을 비롯하여 시위에 참여했던 시위 군중들은 대부분 장을 보기 위해 온 농민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일제의 교활한 수법으로 농지를 잃고 소작으로 전락한 농민들의 분노가 4?4 만세시위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4 시위는 탐학한 집권 세력에 저항한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맥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종교저항운동적 성격이다.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3.1운동은 모의 단계로부터 대중 투쟁 단계에 이르기까지 종교저항운동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이 철저하게 종교(천도교?기독교?불교) 대표들로 구성되었다는 점과 시위 과정에서 종교 기관과 조직이 동원되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익산의 4.4 만세운동도 그런 경향이 확인된다. 비록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 세력이 연대하여 연합 시위를 벌이지는 못했지만 익산에서도 만세 시위는 종교 세력에 위해 주도되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3월 10일 천도교인들이 만세시위를 준비한 것이나 남전교회 교인들이 4.4 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그 예다. 특히 4.4 만세 시위는 남전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이 치밀하게 역할을 분담하고 시위 준비물까지 준비함으로 일본군 헌병대 1개 중대가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던 익산 한복판에서 성공적인 시위를 전개할 수 있었다. 특히 시위 현장에서 문용기를 비롯한 기독교인 4명이 희생됨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민족 사랑을 구현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말 이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투쟁함으로 기독교가 국권 회복과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 구원의 종교로 인식되었는데 3?1운동을 통해 그러한 인식이 더욱 확고해졌음은 물론이다.

이같은 역사적 성격을 지닌 4.4만세운동은 시간과 지역의 한계를 넘어 오늘 한민족 공동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3.1운동에서 배워야 할 지혜는 세 가지다.

첫째, 지역 갈등 극복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 오늘 한민족 공동체가 당면한 위기 상황이 남.북, 동.서지역 갈등과 분쟁에서 야기된 것이라는 점에서 민족 공동체의 내부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는 지역 갈 등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3.1운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민족의 자주 독립이라는 단일 목표로 지역을 초월하여 함께 투쟁했던 3?1운동의 정신이 되살아나야 할 것이다.

둘째, 정의구현을 위한 평화투쟁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 3.1운동은 불의한 세력에 대한 정의로운 투쟁의 전통을 세웠다. 일제는 농지 개발이란 명목으로 교활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 익산 지역의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3.1운동 참여자들은 폭력을 수반한 불의한 세력에 굴복하기보다는 죽음으로 저항하는 정의의 길을 선택하였다. 오늘 한민족 공동체 안에 암적 요인으로 세를 확산하고 있는 온갖 부정과 부패, 불의과 위선 구조에 대한 정의로는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더욱이 일제의 폭력을 수반한 진압에 익산 민중은 평화적 시위를 끝까지 추구함으로 비폭력 평화운동의 전례를 보여주었다.

셋째, 종교적 각성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 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민족과 함께 하며 희생을 감수했던 기독교가 점차 개인주의, 기복주의 종교로 변질되면서 ‘민족주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다. 그 결과 민족이나 사회 현실 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개인 구원이나 내세지향적 신앙으로 흘러 역으로 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의 종지(宗旨)는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세상(사회) 위에 군림하는 종교가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흰옷을 입고 몸 속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익산 구시장으로 향했던 1919년 4월 4일의 남전교회 교인들의 모습이 오늘도 재생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4.4 만세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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