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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이훈삼 (경기노회,주민교회,목사) 2007-06-08 (금) 15:31 14년전 4780  
 ** 김성 목사님의 영화 감상문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영화를 보았습니다.

 1. 지난주일 오후에 교우들과 함께 영화 ‘밀양'을 보았습니다. 비오는 밤 번개(?) 모임으로 안산까지   가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로 교인들과 함께 영화를 본 것은 여러 해 만입니다. 꼭 이것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타서이기보다는 이 영화가 기독교적인  소재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 작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2. 처음부터 끝까지 화면은 하나도 낯설지 않습니다. 영화를 위해 특별 제작한 세트장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보고 경험한 일상의 공간들을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너무 평범해 식상할 것 같은 배경들…, 음악조차도 익숙한 뽕짝 계열,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납치되어 죽임 당하는 내용이 있지만 별로 자극적이지도 않고, 정말 영화 같은 극적인 전개나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140분이 넘는 상영 시간은 짧은 영화가 아닙니다. 카메라는 거대한 스케일, 극적인 전개, 놀라운 반전도 없이, 쌩얼(맨 얼굴)의 주인공 둘레를 어루만집니다. 그런데도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왜일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하니, 감독이 아주 리얼하게 재생해 놓은 한국 교회의 풍경에 어느새 나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한국 영화에서 개신교는 희화화(戱畵化)의 대상이었습니다. 고상하고 상식을 지닌 현대인들이 보기에 ‘교회는 웃기는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마음껏 유포했습니다, 영화 ‘할렐루야’처럼! 그래서 이번에는 감독이 또 어떻게 한국 교회를 비꼬고 조롱할 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잔잔해서 밋밋하기 쉬운 이 영화에 긴장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3. ‘밀양’은 신앙의 보다 철저한 육화(肉化, Incarnation)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을 수 없다던 주인공 신애가 아들의 죽임을 통해 비로소 신을 믿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신앙인이라도 자기 꿈의 전부였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을 통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의 음성이 맴돌았을 것이고, 신애는 끝내 용서의 결단을 내립니다. 그러나 용서를 선언하려고 찾아간 교도소에서 그녀는 이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고 평안을 찾았다고 말하는 범인을 만납니다. 거기엔 이미 죄인은 없었습니다. 용서할 대상을 잃어버린 용서할 사람의 상실감이랄까…! 세상만사는 모두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여가는 방식은 세계를 통해서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세계를 향한 죄가 곧 하나님께 행한 죄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용서는 죄인과 하나님이 직거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피해 당사자인 인간은 거세되는가? 이것을 진정한 용서라고 부를 수 있는가? 영화는 이것을 묻고 있습니다. 80년 광주는 아직 신 군부 세력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죄인들이 스스로 이미 용서 받았다고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용서의 블랙 패러디(Black Parody) 아닌가?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역사가 생략된 기독교 신학, 신앙은 가능한 것인가? 인간과 세계를 빼버린 초월적 신앙이야말로 가장 신앙적인 듯 하면서도 사실은 가장 반 기독교적이며,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종교적 항의를 세속적 필치로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4. 영화는 기독교의 근원적인 문제를 일상의 화면을 통해 비판적으로 제기하면서도, 현실 개신교에 대한 배려와 희망의 끈은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주인공 신애는 하나님을 향해 계속해서 저항합니다. 교회 기도회 시간에 탁자를 세게 쳐대고, 은혜 충만한 야외 집회에는 몰래 대중가요를 틀어놓아 찬물을 끼얹고, 신애를 위해 기도회를 여는 집의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자신을 신앙으로 인도한 신실한 교회 장로를 노골적으로 유혹하며, 마침내 창조주에 대해 피조물이 할 수 있는 극단적 저항으로서 자살을 시도합니다. 영화의 원작 ‘벌레이야기(이청준 작)’에서는 신애가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영화는 이것을 자살 미수로 바꾸어 놓았다고 합니다. 영화는 원작의 극단적인 파멸과 신 부정이라는 절정 부분을 획기적으로 완화시킨 것입니다. 이 영화에 묘사된 한국 교회는 나름대로 따뜻하고 긍정적입니다. 아들의 화장터에서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신애가 꽉 막힌 가슴을 열며 오열로서 새로운 길에 접어든 것은 교회의 부흥 집회였습니다. 또한 상처 깊은 신애를 위한 교인들의 따뜻한 배려와 사랑, 신애의 유혹에 하릴없이 무너져버릴 것 같았던 장로가 마지막 순간에 하늘을 두려워하며 자기를 지키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애를 마음 깊이 사랑하면서 주변을 맴도는 종찬(송강호)의 존재는 이 영화가 아직 기독교에 대해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영화의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이 물음의 전망이 그리 비관적이지 않은 것은 신애 옆에서는 지순한 종찬이 끝까지 그녀를 지키고 있으며, 그는 순전히 신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사이비 신자였지만, 신애가 교회를 떠난 뒤에도 오히려 자신은 계속해서 교회를 다닌다는 점에서, 이 둘의 사랑과 삶의 회복, 그리고 상처투성이의 세상에 한국 교회가 기여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5. 파란 하늘을 보여주면서 시작한 영화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는 햇살에서 멈춥니다. 그러자 자막이 올라가는 극장 안에서는 낮은 불만이 새어나옵니다, ‘이게 끝이야?’ 극적인 결말, 명백한 심판, 예상치 못한 반전 등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결말마저 너무 싱거워 보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이런 말들이 이어지겠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명확함을 원하지만, 삶과 역사의 한 본질은 ‘명확하지 않음’입니다. 그것은 곧 인생과 역사의 주체인 신의 경륜이 지닌 모호함(Ambiguity)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의 세계 경영이 때로 불분명하고, 부조리(不條理)해 보인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확신하고 고백하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다보니 하나님은 파랗고 밝고 투명한 빛이시지만, 그 비밀스러운 빛(밀양, Secret Sunshine)을 받는 세상에는 의심, 저항, 갈등, 죄악, 굴절된 용서 등 여러 가지 지저분한 것들이 끼어 앉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 햇살이 닿는 신애의 집 마당 저 구석처럼!


 ( 2007. 6. 10 주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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