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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타마, 군마지역의 조선인학살현장을 가다 (1)

김종수 (,,) 2009-08-21 (금) 10:12 14년전 4464  

아주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엿장수 구학영(具學永)씨를 아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923년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더구나 그가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곳은 일본 사이타마이기 때문이지요.

 

엿장수 구학영(具學永). 그는 왜 일본으로 건너갔는지 알수는 없지만 당시의 사회상황을 통해 짐작해봅니다.   

 

일제는 강제합병으로 대한제국의 권리를 빼앗고 우리나라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불황에 허덕이는 일본인들에게 농업이민을 장려하고 빼앗은 토지를 싸게 불하했지요. 그 결과 전체 농민의 80% 가까이가 소작인이 되었고, 일년내내 농사를 지어도 수확의 60~70%를 소작료로 빼앗기고, 각종 세금으로 이중 수탈당해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총독부의 명에 따라 만주 땅 간도로 간 사람들도 있고, 혹은 높은 봉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 일본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어떤 이는 탄광의 노동자로 또 어떤 이는 일본군의 군복을 반드는 피복공장으로 또는 철도노동자로 힘든 일들을 해야하는 곳에는 일본의 차별받는 하층부락민과 더불어 조선인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구학영(具學永)씨도 이 때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제대로 된 직장에서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엿장수를 하며 하루하루 연명을 하였지만, 마을사람들은 그를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1923년 9월 1일, 도쿄에서 커다란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재난을 당하는 관동대지진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땅이 갈라지고 해일이 일어나고 집은 뒤집히고, 점심하려고 피워놓은 불길이 여기저기 흩어져 그만 곳곳에서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군복을 만드는 피복공장에도 불이 옮겨붙어 이 곳에서 일하는 재일동포 조선인들은 불길을 피해 혼비백산하였고, 거대한 불길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삼켜버려 일대의 거리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 지진으로 인한 화재로 인해 불에 타죽은 시신들          

 

이 혼란의 와중에 일본의 차기권력자들은 불안해진 정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권력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우물에 독약투여, 산업시설에 폭탄투척, 곳곳에서 소요, 부녀자 겁탈 ' 등을 저지르고 있는 이들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이를 빌미로 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불을 지르고 있다고 하는 등의 유언비어를 전국의 행정기관에 타전하여, 모든 조선을 '적(敵)'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유언비어는 모든 신문에 더욱 부풀려져 보도되면서 일본민중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엿장수 구학영(具學永)은 지진이 일어나던 1923년 사이타마와 군마 등 일본의 간토(關東)지역을 오가며 고물을 수집하거나 쇠붙이를 수거하여 엿으로 바꾸어주며 하루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도쿄에서 일어난 재난을 듣기는 하였습니다만, 설마 자신이 독약을 투여했거나, 폭탄을 투척한 무시무시한 조선인으로 여겨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을의 사정도 잘 알았고, 마을 사람들도 그를 잘 알았으며 어쩌면 아이들도 그를 잘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엿장수였으니까요.  

 

그러나 지역의 지주와 상공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마을의 재향군인들, 혹은 일반 젊은이들을 끌어모아 '자경단'을 만들었습니다. 자경단들은 오직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체포하고 몽둥이로 내려치고,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집단학살하였고, 거적대기 아래에 숨어 목숨을 구하려는 여성들을 끄집어내어 잔인하게 학살하였습니다. 심지어 자경단들이 너무도 두려워 경찰서를 찾아가 살려달라고 숨을 숨기려는 이들까지 끌어내어 집단적으로 달려들어 살해하였습니다. 

 

엿장수 구학영(具學永) 역시, 자경단을 피해 요리이 경찰분서(奇居 警察分署)에 가서 보호를 받고 있었으나, 이웃마을 자경단들이 들이닥쳐 끝내 그를 끄집어내서 수십명이 일본도와 쇠갈쿠리로 처참하게 살해하였습니다.

 

엿장수 구학영이 살해당한 86년이 흘러 한국의 아이들과 일본의 현장연구 등 20여명이 지난 8월 11일 한국의 소나무로 만든 塔婆(토오바)를 가져가 그의 무덤에서 추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비를 찬찬히 살펴본 순간 저는 마음에 심하게 요동치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가 살던 고향마을의 주소가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朝鮮 慶南 蔚山郡 廂面 山田里> 라고 말입니다.

구학영의 묘에는 그의 출신을 알리는 주소가 적혀져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엿장수 청년 구학영의 이야기.

구학영은 광분한 자경단들이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찰서를 찾아와 보호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찰서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에 '뭐라도 일을 해야겠다며 경찰서 여기저기 돋아나 있는 풀을 뽑고 청소를 했다는 당시 기록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참가자들은 어깨를 들먹이며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이미 한국 역사교과서에서도 사라져버린 관동대진재 사건을 새삼스레 끄집어내어 무얼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냥 잊으면 될 것을 왜 86년 전 일본에서 학살당해 땅에 묻혀버린 '코리안제노사이드'를 이제와서 그 진실을 밝혀내어 무얼하겠는가? 아니 일본이 어떤 나라인데 그들이 철저히 숨기려 하는 일을 밝히려 드는가?하는 염려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유족들도 나타나지 않고, 1956년의 한일협정 이후로는 그 어떤 식민지범죄에 대한 배*보상을 논의할 수도 없는 판에 무슨 수로 진실을 규명할 수 있겠는가?하는 걱정어린 말씀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나, 이렇게 주소까지 적혀있는 신원이 확실한 당시 28세의 젊은이 구학영(具學永)은 어쩌면 그 오랜 시간동안을 이렇게 한국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을까요? 울산 산전리 고향마을에서는 그가 객지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일을 지금도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경남노회 목회자 여러분!

엿장수 구학영(具學永)의 유족을 찾아 주십시오.   

연락처 : 070-8275-6075 (진실규명을 위한 한국사무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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