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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강해 ; 목사님 글을 읽으면서 생각났던 신문의 칼럼입니다

이종덕 (익산노회,삼광교회,목사) 2010-05-18 (화) 19:28 13년전 5898  

국민일보 어제 날짜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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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공간 너머(20100517)

관찰사 수령 향리 토호

우리나라 행정구역 명칭은 도(道), 시, 군, 구, 연, 리, 동, 도(島) 등으로 나뉜다. 행정구역이니 만치 지도상에 평면으로 표시되는 것이 당연하고 명칭도 그에 합당하게 돼 있지만, 도(道)만은 ‘면’이 아니라 ‘선’ 개념이다 길을 뜻하는 도(道)를 행정구역 명칭으로 쓴 예는 갈은 한자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에서도 극히 드물다.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경우가 있고 일본 홋카이도(北海島)가 있는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도가 행정구역 명칭으로 정착된 것은 고려시대의 일이다. 그 행정 책임자를 안찰사라 했는데, 지방을 순회하며 행정 실태를 조사하고 조세를 거두는 일 등을 맡았다. ‘안찰’이란 누르고 살핀다는 뜻이며, ‘도’란 안찰사가 지나는 길을 의미한다. 경주와 상주를 잇는 길이 경상도가 되고 충주와 청주를 잇는 길이 충청도가 되는 식이다. 안찰사는 안렴사, 도관찰출척사 등을 거쳐 조선 초기에 관찰사로 바뀌었고 이 이름은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도 관찰사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정해진 길로 다니며 관찰하는 왕의 사신(使臣)’이라는 뜻이다.

신라 말엽 중앙정부의 통제가 이완되자 지방 호족이 일어나 스스로 장군이니, 성주니 하는 와중에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고려 왕조는 이들 호족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키우는데 힘을 쏟았다. 안찰사가 주로 ‘억누르고 관찰’한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다. 억압의 시간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호족은 지방 관리인 향리(鄕吏)가 됐다.

고려시대에는 향리가 중앙 관리로 진출하는 길이 열려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 길이 막혔다. 향리직은 ‘권세 있는 자리’가 아니라 ‘세습하는 역(役)’이 됐으며, 보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여러 대에 걸쳐 같은 고을에 살면서 쌓아놓은 지식은 그들이 나름대로 행세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중앙에서 파견된 임기제 수령들은 한편으로는 향리를 단속했지만, 그들에 기대지 않고는 행정을 처리할 수 없었다.

신라의 학자 설총이 창안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이두(吏讀)’는 향리들이 공문서를 작성할 때 쓰던 표기법이다. 한문을 우리말의 문장 구성법에 따라 고치고 한자의 음이나 혼을 따서 토를 붙인 것인데 그래서 이서(吏書), 이토(吏吐), 이투(吏套), 이문(吏文)등으로도 불린다.

향리들이 이두 표기법을 고수한 것은, 한문만 배운 수령도 잘 모르고 일반백성은 더더욱 모르는 자기들만의 암호체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호등용량(是乎等用良)’을 ‘이온들쓰아로 읽고 ‘이므로’로 풀거나, ‘위재을량(爲在乙良)’을 ‘하두을란’이라 읽고 ‘하거든’ 으로 푸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으나 무엇이든 새로 배우려면 귀찮은 법이다. 향리들은 이 특수한 표기법으로 자기들을 통하지 않고는 수령과 빽성이 연결될 수 없도록 했다.

더구나 조선시대 지방에서는 양반들이 또 다른 유력자로 등장했다. 전직 고위 관료, 미래의 고위 관료, 그들의 친척과 친지들이 곳곳에 둥지를 틀고 수령을 견제했다. 그런 속에서 수령과 지방 양반, 향리들 사이에는 때로 협력하고 때로 견제하는 ‘긴장관계’가 유지됐다.

그러나 조선 말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이 긴장 관계가 흐트러졌다. 전임 수령과 후임 수령이 모두 같은 당파이다 보니 전임자의 잘못을 들추고 바로잡는 일이 사라졌다. 향리의 처지에서는 어떤 수령과 짝짜꿍이 돼 한몫 챙겼다가 후임 수령에게 들켜 ‘경을 칠’ 걱정을 안해도 됐다. 지방 유력자도 달라졌다. 시골 유생이 과거에 합격 해 관칙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벼슬길이 막힌 시골 양반 대신에 명 많은 토호들이 유력자 자리를 차지했다.

어차피 벼슬길을 포기한 사람들이라 수령을 매수하고 향리를 구슬려 세금 적게 내고 송사(訟事)에서 이기는 데에만 열중했다 그들은 새 수령이 오면 거창하게 환영연 치러 주고, 임기 마친 수령을 위해 전임자 것보다 더 큰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줘 변변치 않은 ‘토착 권력’이나마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은 전임자가 정말 잘해서가 아니라 수령이 바뀔 때마다 돈 들 일이 생겼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조선 말기의 이른바 ‘삼정문란’은 현대식 표현으로는 공직 기강의 전반적 해이다. 기강 해이는 곧 긴장의 이완이다. 서로 견제해야 할 사람들이 ‘한통속’이 되면 긴장은 저절로 풀어지며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 몫이 된다. 조선 말기 시골 백성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민란’밖에 없었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공직자를 선출하고 감시할 권리를 다 가지고 있다. 투표하는 것은 잠시나마 ‘임금’이 되는 일이고 감시하는 것은 ‘관찰사’가 되는 일이다. 그저 분개만 한다고 공직비리니 토착비리니 교육 비리니 하는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누가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국민의 눈치를 보겠는가.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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