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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목사의 성막론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10-11-09 (화) 11:39 9년전 6396  

1. 왜 성막이 중요한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두 가지는 십계명과 성막 식양(설계도)이다.
그렇다면 십계명의 중요성만큼 성막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알았어야 할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할 때 십계명과 함께 성막 설계도를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드릴 준비가 더욱 잘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막은 하나님의 그림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은 대단히 쉬운 것이지만 그러나 그 뿌리에는 하나님의 참으로 놀라우신 준비와 진지함이 있었다는 것, 복음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얻은 귀한 것임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회사에서 극히 드물지만 신학적으로 간혹 혼란이 있었다면 그것은 십계명은 알되 성막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 일 것이다. 성막을 알았다면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치된 고백으로 합창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때문이다.

이 글을 상당히 길게 썼다가 줄였다. 그 이유는 아차, 지금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현명하신 분들 앞에 긴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마터면 순간의 착각으로 긴 논문을 써 올리려다 줄였음을 말씀드린다. 그러나 이 짧은 글에서도 이미 독자분들 께서는 고개 끄덕이며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하셨으리라 믿으며 많은 예를 떠 올리며 함께 공감하였다고 믿기에 다음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2. 구원의 목적
구원의 목적은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도 예배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낸 목적이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원대한 구원사적 목적이지만 또한 구원목적이 예배임을 보여주고 있다.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 내 백성을 보내라 , 광야에서)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worship)
그들이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 (festival)
그들이 내 앞에서 희생을 드리게 하라  (sacrifices) 이 모두가 예배를 뜻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백성의 목적은 예배이다. 예배는 인생의 최고의 가치 의미 기쁨 복 생명 하나님과 만남 등 이 귀중함을 말하려면 하루도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때문에 두 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계시겠다고 하셨다.
두 사람 이상 모이면 교회가 되고 혼자이면 성전이다.
두 사람 이상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계시니 가장 귀한 모임 이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명심 하여야 한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의 글 중에 토요일에 비가 와도 걱정 날씨가 좋아도 걱정의 고백 글을 읽은적 있다.  날씨 좋으면 또 야외로 나갈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역시. 
그래도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이 좋은 환경도 아닌 상당히 악조건에서, 토굴 같은 감옥에서 감사 찬양하며 예배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며  활기 있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한편 감옥에서의 기도 찬송 후의 열리고 풀리고 옥터 움직이는 기적은 날이면 날마다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러한 기적이 날이면 날마다 일어난다면 삶이 너무 예측 불허해 사람이 살기가 오히려 불편하다는 것 가끔 특별한 경우에 일어난다는 것 그러나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는 것을 함께 알려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기대하다가 실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드디어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개인적인 예배 산제사의 본론으로 달려가보자.

 3. 산제사 (생활예배, 성막형기도 참고) (롬12:1-2)
모든 성도는 성전이다.그러므로 산제사를 드려야 한다. 산제사란 구약에서 제사 제물은 다 죽여서 드리는데, 우리가 우리를 제물로 드리려면 우리의 육신을 죽여야 하는데, 우리의 육신이 죽으면 예배를 드릴 수 도 없고 , 아니 그 보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으셨으니 예수이름으로 살아있는 몸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삶 속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직장 가정 전철 안에서 비행기 안에서 병원 감옥 여행중 운동중 걸어가면서 달려가면서 어디에서 언제나 어떤 환경에서나 가능하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산제사 드리는 방법으로 구약의 제사장이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는 과정을 따라 생할 속에서 산제사를 드린 다는 것은 상상 만 해도 기쁜 일이다. 그 제사장이 봉사 섬기는 과정에는 보셨다시피 황홀 찬란한 내용이 가득한 감동 감격의 순간 과정들이다.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얼마나 스릴 넘치는 일인가? 이러한 예배를 날마다 어디에서나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창조주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분이다. 다른 준비물도 필요 없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바쁘실 것인데 나까지 만나주실까 하는데 그런 걱정은 안해도된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몸으로 드리라고 하였으므로 몸만 있으면 된다. 좀 몸이 안 좋은 상태라도 상관없다. 그때도 좋은 기회일 수 있다. 회복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산제사를 드릴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너무나 크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할 때 얻는다. 구약의 제사장이 성소를 예배 (봉사,섬김,관리) 않았으면 성소 지성소라도 마침내 먼지로 가득 찰 뿐 이었을 것이다. 예배드릴 때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예배당에서의 예배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구약의 제사장 같이 섬기며 나아가는 것은 한편으론 생각 만 해도 가슴 벅차고 스릴 넘치는 일이라는 것은 과장이 아니라 성소와 지성소의 내용을 사실적으로 표현 한 것이다.
 
1). 산제사 (생활예배)시작 할 때 할 묵상할 만한 시편  (예, 시100편, 시100:1-2절)
궁정이라는 뜻을 알면 어디서 하는 예배인지 그리고 이 전체의 내용을 더욱 확실하게 이해 할 수 있다.(시100:4)
                         ‘궁정’(하짜르): 원래 의미는 말뚝으로‘둘러싸다’; 따라서 빈들을‘구획하다’,
                                   court, enclosure, settled abode, settlement, village, town

2). 성막을 알고 신약을 읽을 때, (예) 

 다음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의 하나이다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구 중에 하나이면서도
잘 지키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실천은 약간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
“성령을 소멸치 말며”
(Do not quench the Spirit. Do not put out the Spirit' fire)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말이 무슨 말 이겠는가?
구약에 정통한 바울의 말은 무엇을 그리며 말하였겠는가?
바울은 성막의 성소 지성소를 잘 알았을 것이다. 바울이 성막의 성소의 금촛대, 분향단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하였다고 확신한다. 성막의 금 촛대를 알고 이해하고 이 말씀을  읽으면 심령에 강력하게 꽂일 것이다. 그리고 누구의 힘으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알고 결단하며 살지 않을 수 없다.
 
3). 기도는 향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많은 기도 내용들은 참으로 어려운 것들 부탁들이 많고 사람으로서는 그 누구도 별로 기뻐하지 않을 내용들인데 그것을 향이라고 하셨다. 사람 중에 그러한 내용을 받고 기뻐 뛰며 즐거워 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향이라고 하시며 즐거운 마음으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감사와 찬양을 자원해서 드린다면 어떠하시겠는가.(분향단)

(말씀 드렸지만 필자 성막형기도는 한국교회에 세계교회에 내어놓을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되어 올려 놓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설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막형기도와 다윗의 성막사랑을 올려 놓음으로 성막에 대한 나의 역사적 사명은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하며 두 글을 더 참고 하실 수 있습니다.)


                                                                       복된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 
                                                                                     성광교회 이동원 목사 드림


  = 선택과목
1. 성소의 떡상: 인생에서 뭐니 뭐니 해도 영육의 양식이 제일 중요하다. 성소의 떡상의 떡(밥)은 하나님이 명한 것이다. 그런데 그 떡은 드리라고 한 후  그 떡은 실제 하나님이 잡수시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에게 먹으라고 하였다. 어떤 성경 구절이 떠오르지 않는가? 전광석화와 같이  생각나는 구절들이 있다면?
영의 양식은 유일하게 영적 존재인 사람만이 먹을 수 있고, 또한 육신의 양식은 사람의 육신이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하기도 하다. 사람은 굶으면 죽는다.  영적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1. 구약을 알아야, 성막을 알아야,  
교계의 원로 목사님이 초등학교 때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독립군으로 알았다고. 예수님을 독립군 캪틴 (아마 대장 아니 두목을 언어순화차원 고침)로마 식민지/이스라엘을독립/유다의 배신으로 억울하게 실패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알고 시큰둥 하다 그 후 시간이 좀 지난후  교회 기도 모임에서 사53장을 읽고  아 이분이 이분 이었구나 깨닫고 온 밤을 지세우며 울며 기도했다는 , 그리고 그때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므로 구약을 알아야하고 성막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1. 지난 주 성막의 중요성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계시 같았다. 너무 신비하게 생각은 마시라. 시내 산에 십계명과 같이 받은 성막 그리고 그 중요성. 그러한 생각이 떠 올랐다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서 평온한 마음과 함께. 그리고 성막의 중요성을 온 세상에 다시 한번 알려야 하는 의미를 깨닫고 이것이 성령의 음성이 아닌가 했다는 의미이다. 성막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것이 전부이다. 성령은 생각나게 하신다. 그리고 영이시기에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영(마음)에 말씀하신다.  ( the Spirit himself testifies with our spirit , Rom8:16)

1. 성막이란 어떻게 보면 복잡하고 어렵고 생소한 것도 사실이다. 그 누구도 완전히 알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성막 식양을 십계명과 함께 주셨다는 것, 그런데 왜 성막 식양을 십계명과 함께 주셨을까? 그렇다면 성막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러면 지금은 누구? 어떻게?
이 의문점을 가져야 하고, 찾으면  가장 중요한 동일한 대답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1.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구약의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그가 명령한 구약식  제사를 당연히 드려야 하지 않는가? 지금 그러한 제사를 드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1. 언제부터 왜 누구에 의해서 바뀌게 되었는가?

1. 사람들을 (허물) 대신해 수많은 숫자의 동물(소,양,염소,산비둘기나 집비둘기)들이 피흘리며 성막 뜰에서 죽어갔다. 이것이 언제부터 왜 누구에 의해서 중지 되었는가? 세상 사람들은 이 의미를 알기 전에, 이 사실 자체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다고 생각하는가?

1. 목사란 말은 ‘양을 친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행20:) 교회시대의 목사는 목자( 양치기,to shepherd, pastor) 즉 양을 친다라는 말에서 왔다. 그런데 목회자를 성직자 복음전하는 자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나는 복음 전하는 자라는 명칭을 좋아한다. 복음을 전하는 자 기쁜 소식을 전하는자라는  이름, 생각하면  늘 감사해야 하고 감사하다.
1  복을,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
 밖에서 간혹 기복 신앙을 비판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성경을 잘 모른다. 가르쳐야 한다.
우상에게 복을 비는 것이 잘 못이지 하나님께 당연히 복을 빌어야 한다고. 간혹 안에서도 비판하는 것을 보는데 다른 성경을 보고 있나, 뭐 새성경이 출간되었나 우리가 혹시 잘못 생각하나 잠시 생각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 창조의 시작, 노아홍수 후 새 인류 시작 , 아브라함 구원사 시작 때 다 복으로 시작한다. 신명기 28장은 아예 축복장이라고 한다(14절 까지만 ) 시편 150편 중 첫 편은 복으로 시작한다. 신약은 또한 복음 복의 소리로 시작한다. 목회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고 귀한 일이다. 생명의 말씀 복된 말씀으로 복을 선포하는 것은 의무이고 귀하고 영광스러운 사명이다. 목회자는 주일 마다 믿음으로 힘있게 복음을 선포하고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본다.

1, 아멘 : 성경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은 아멘으로 끝난다. 나는 이것을 성경 전체에 대한 아멘으로도 받아드린다. 아멘은 역사가 함께 하는 신앙고백이라고 하였다. 어떤 분은 아멘을 유도한다고 투정한다. 너그럽게 이해 주셨으면 한다. 많은 성도는 예배 중 목소리로 아멘으로 화답하기를 원한다. 갈급하다. 그런데 아멘 아멘 하면 주위에서 어떻게 볼까 서로 조심 조심이다. 그런데 간혹 용감한 권사님들 눈치 볼 것 없이 아멘 아멘 이다. 우리의 목사님들 가끔 그들이 아멘 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도 해야 한다. 
아멘을 마음 속으로만 하시는 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도 좋다. 어떤 목사님은 아멘 하면 설교하다가 잊어버리니 마음 속으로만 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나 나는 굳건한 믿음으로 말씀 앞에 아멘 아멘 하는 믿음의 식구들에게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특별한 경우 아니면 가능하면 교회에서 속으로도 좋지만 온 교회가 아멘이 넘치면 좋겠다. 또한 성경은 아멘 할때 얼마든지 예가 되고 역사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1. (왜냐하면)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마18:20)
원문에 있는 '왜냐하면'(때문에) 이 한국어 성경에는 빠졌다. 왜냐하면을 넣으면 앞의 말씀과 연결하여 읽을 때 필이 다르다. (헬,가르. for)  
1.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13:8)
  ' 영원토록'이라는 말을 깊이 묵상해 보자.
1. 그대는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 실천이라는 것을 동의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예배의 실천을 통해 최고의 계명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신10:12-13, 11:3, 왕상3:3-4 ,막12:28-30,  롬8:28)
또한 영원하신 분과 사랑의 교통이기 때문에 예배는 최고의 행복한 시간이다.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시100:1)
유대인들이 오직 자신들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알수도 접근 할 수도 없게 하는데 온 땅이 어떻게 여호와를 부를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가능했다. 직접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려주시고 보여주시고 교통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닫힌 문이 열렸다.
대문이 활짝 열렸다. 우리도 이제 알고 믿고 즐거이 부를 수 있다. 그래 즐거이 부른다.
 
 = 썼다가 지우는,
1. 어느날 책 광고를 보았다. 제목이 너무 신선하여 마음을 끌었다. 저자의 강의를 한번 들은적 있는데, 타 교단의 신학자 이며 총장도 역임한 분인데 , 편안한 언변이면서도 가끔씩 하시는 유모어가 참 돋보이는 분이었다. 당장 달려가 그 책을 구입하였다. 내용은 에베소서 강해 였다. 한참 읽는 중에  난데 없이 우리 교단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명칭까지 사용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마음이 아팠다.
당장 일필휘지로 글을 썼다. 아마 두장, 3페이지 인것 같다.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그리고 목회자들 목회도 성실하게 잘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덧 붙여, 여러 사실적인 내용을 써서 주소 없이 전화 번호만 써서 보냈다.
얼마 후 전화가 왔다. 내가 그 분이라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저명한 분이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로 매우 겸손하게 자기를 소개하였다. 감히, 그 대 선배님과  편안히 이야기 하였다. 사실은 자신도 어려서  우리 교단 교회를 다니셨다고, 그리고  우리 교단의 어느 목사님 같은 분은 참 큰 일 많이 하시지  않으냐고 칭찬하고 자신도 그러한 분은  존경한다고 하시면서, 그런데 글중 그러한 내용이 있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사모님이 텔레비젼 보다가 우리 교단 저명인사가 성경적, 신학적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아니 이럴수가 , 저게 무슨 말인가, 했다는 것이다.

신학교 총장님이 듣기에도 이해하기 너무 어려운 신학적인 말씀을 하신것 같다. 이야기를 쉽게 하시지, 총장님도 오해 할 정도니 일반은 오죽했겠는가 . 그런데 과연 그 말씀을 하신 분이 총장님도 받아들이지도 이해 못할 정도로 지적 실력자였는지는 모른다.
좀 말씀을 쉽게 하시지, 총장님 정도는 오해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 있게.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그 대 선배이신 전임 총장님과 친구 같이 다정하게 대화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인상적인 기억이었다. 그 두 분은 아니 세 분 모두 지금은 이 땅에서는 만나 뵐 수 없는 분들이다.

1. 초기에 구약을 읽고 묵상하며, 특히 역사서를 읽고 내가 내린 구약에 대한 결론중 하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 다윗과 같이/  정직히 행하여 / 저가 형통하였더라" 이었다. 모든 왕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다윗과 같이 정직했느나 그렇지 않았느냐로  평가하였다는 것이다.  만약 구약만 경전이었다면 이것을 나의 좌우명 같이 하고 살았을 것이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정도를 가는 것) 신앙. 그러면서도 여러번 한탄 하였을 것이다. 완벽치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런데 복음은 그보다 크고 그 은혜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이다.
1. 예배는 어떠해야 할 까? 엄숙 경건의 모습의 인식은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 초대교회는 그렇치는 않은것 같은데 ,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황제와 최고위급이 참석한 예배, 그때 부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 앞에서 얼마나 조심스러울까, 일정한 톤 엄숙 장엄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순전한 내 개인의 추측이다.

1. 초대형교회에 책을 선물한다면 무슨 책이 적당할까? 아마 삼포능자의 빙점이 아닐까 한다. 길다면 서문 만이라도, 어떻게 이 책이 쓰여졌는지 정도는 알수 있게, 알고 보니 저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여러가지를 생각하게한다. 계시록 일곱교회에 한 교회도 교인 숫자는 언급조차 않았다.
숫자에 따라 예수님이 계셨다 안계섰다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어쨌든 혹이라도 목회자와 교우가 타 교회와 경쟁적 사고 때문에 모두들 육신적 정신적 건강에 손해 없었으면 한다. 그러나 우리 교단은 대형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대형교회 역할도 있으니까 말이다.

1.
 초대형교회는 크게 받았으니 이제 목회자와 교우가 뒷문을 크게 열어 주고 나누는 사고를 갖는 것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어떨까.  이렇게 하는 것이 모두를 좀더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수 믿고 더 행복해야 되는데 세상기업적 사고로 불필요한 경쟁과 긴장이 많은 것 같다.
 
1. 어떤 정치평론적 말씀을 읽은적 있었다. 유구한 역사의 아마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경악했다. 너무 편향되어 있고  균형감각 없고 수준이 낮다. 우리가 보기에도 이러한데 혹 이것을 들은 안티들은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도 전도의 대상들인데. 교회를 잘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몇분의 활약때문에 특정 이념의 기독교로 잘못 판단 할 수도 있다.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이름은 보수 순수이면서 편향된 정치평론으로 많은 젊은이들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볼 수있다. 수많은 악풀이 달리는 것을 보았다.
왜 뒤늦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두에게 공감을 주지 못하는 편향된,  정치평론은 그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이름이 소위 보수이고  순수이면 이름에 걸맞게 하면 될 것이다. 비전문가가 균형감각 있는 정치평론 이것 쉬운 것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기독교에 손해를 많이 끼치는 것 같다. 왜 이제는 그분들까지 이렇게 이탈해 손해를 끼치는 지  알 수가 없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돌 맞은 기분이다. 자기 전문 분야에 충실 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1. 에릭 프롬: 나도 참 많은 책을 읽었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다행히 몇 년 전 부터는 성경과 약 이십여권 내외의 책을 반복해서 읽는 편이다. 그런데 많은 책을 읽는 중에 지금 기억에 남는 여러 내용 또는 문장 중 하나는 에릭 프롬의 ‘ 진리는 가장 오래 타는 촛불이다' 라는 말이다.  세계의 지성 석학의 대 토론회의 책 서문에서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실천은 이미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의 판단에서 잘 볼 수 있다. 과연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께로서 나왔느냐 아니냐 이러한 질문에 가말리엘의 대답은 참 현명하였다고 본다.(행5:38-39) 그런데 철학사를 참 쉽고 재미있게 쓴 탁월한 책 윌 뒤란트의 ‘철학이야기’ 에 바로 이 가말리엘이 소개된 것을 보면 이 가말리엘은 철학계에서도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또한 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학문적으로도 인정할 만한 계보이다.
다시 에릭 프롬으로 돌아가서, 그는 사회심리학자로 예언자적 사상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제부터이다. 짧은 글에 서론이 참 길었다.
 
요즈음 예언자적 이라는 말이 조금은 넓게, 이제 딴 동네에서도 쓰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구약에서의 예언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예언이 핵심이다. 그리고 신약은 그 예언의 성취이다. 물론 구약 예언자가 그 당시 사회의 어떤 면을 규탄 한 것도 있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예언이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예언은 성취되어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르고 선포하고 전하는 것이다.
또한 예언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진리이다. 세상의 어떤 이슈에 예언자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참 조심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새만금에 어느 입장을 이야기하면서 예언자적이라고 표현한다면 안 될 것이다. 어느 입장이든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으로 옳아야 하고 절대적으로 옳다. 오늘의 시대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는 것 자체보다 예언자적이라는 말 자체를 안 썼으면 한다. 차라리 사실적으로 쓰면 된다. 예를 들면 환경보전에 대한 기독인의 입장이라든지. 사실적으로 쓰고 사실적으로 말하면 되지 예언자적이라는 말은 옳치 않다고 본다. 이러한 말이 좀 그럴듯해 보여 이제 다른 동네 에서도 가끔 쓰는 것을 본다. 구약의 예언은 한마디로 그리스도 예언인데, 어찌하여 그 말이 이렇게 쓰게 되었는지. 세상에 말하는 내용 자체가 아니라 왜 그것을 예언자적이라고 하는지 나는 그 단어 사용이 맞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신학적 신앙적 입장은 구약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예언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졌기에 그 예언은 이제 복음이 되었고 이제 만방에 복음 선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이 나의 분명한 입장이다. 
 
1. 루터의 신학적 입장: 요즈음 보수 진보라는 말이 있다. 세칭 진보 보수에 기준에서 본다면 루터는 보수인가 진보인가. 나는 보수라고 본다. 그가 강조한 세 가지 중 하나는 말씀으로만 이다. 철저하게 말씀에 굳게 서다보니 결과적으로 개혁의 도구로 쓰임 받았다고 본다.
나는 진보의 입장에 서 있으려면 있는 것을 잘 지키려는 보수보다 훨씬 더 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어떤 기준에 서 있고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모르고 말하는 진보는 설득력이 없다. 단지 좀 더 열린 마음이 진보라면 그저 수긍을 할 것이다. 자신이 종교개혁을 하려는 의도 보다, 말씀에 충실하다보니 종교개혁자로 쓰임 받은 루터는 적어도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1. 선택 과목에 넣어야 할 것이지만 여기로 밀려 났다. 언젠가 무엇이 없다라는 책이 잘 팔려 비슷한 제목이 책들이 있었다. 물론 그 후 그 책 산것을 후회 그 이상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기독교에도 비슷한 제목의 책이 나왔다 아마 그 후 일것이다. 내용은 대단히 다양한듯 학문적인 듯해서 그 핵심을 파악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결론은 그 분이 성경를 잘 알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 많은 부록의 참고 서적을 보면 그 책들을 읽었다면, 아마 시간 없어, 성경은 많이 깊이 읽지는 않으신 것 같다. 더구나 성막에 대해서는 아마 잘 모르실 것 같다. 그러한 책이 책 제목이 나오기 까지는, 더 이상 언급 않겠다. 이러한 내용이 혼돈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성막을 모르고 세상 학문을 찾아  뛰다보면 이렇게 되는 것은 가능하다. 나는 저자의 인격에 대하여 말 한 것이 전혀 아니다. 인격적으로는 매우 고매한 분 일 수 있다. 학문적인 면에서 언급할 뿐이다. 필자가 왜 이러한 글을 쓰는 것인가 아는 분은 아시리라. 덧 붙이자면 목회는 취미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이해 못하시면 넘어가면 된다. 그래서 선택과목에 넣지 않았다.
1.버트란트 러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으로 안다. 그는 행복의 조건(정복), 나는 왜 무신론자인가? 등의 책을 썼다. 내가 후에 다시 그의 책을 읽어 보았는데 그는 기독교를 성경을 잘 몰랐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박학다식하므로 일단 그 이름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경향이 있는데, 한 때는 백인이면 더욱,  그 내용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가 쓴 글 중, 세계에 8대종교가 있고 그 내용이 다 다른데 다 옳다고 하니 그 중에 하나만 옳치 어떻게 다 옳을 수 있느냐 그러므로 나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가 기독교를 잘 몰라서 이렇게 표현하였지만,  그는 학문적 팔망미인 박학다식 덕분에 기독교을 성경을 깊게는 몰랐다고 본다, 그러나 그는 학문적 위선 없이 정직하였다. 

오히려 기독교 안에서 알쏭 달쏭 아리송 한 말을 하면서 기독교를 좋다고 하는 것인지 비판하는 것인지 알수 없는 말을 하면서 홀로 학문적 위선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다. 적어도 러셀은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클리어하게 말하였다. 힘껏 수고하는 동역자들에게 혹 손해 끼치지 않나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의 진의가 잘 못 전달 되었으면 기자회견이라도 다시 열어 본 뜻을 정확히 이해하게 해서  오히려 탄복하게 하면 신앙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글을 쓴 이유는 아래에서 알 것이다.

1. 썼다가 지우는:  이글을 써야 섰다가 지우는 글을 맺을 수 있겠다. 
 한분 국민적 교수가 있었다. 나는 인간적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분 사람에겐 호감이다. 
나의 따금한 필은 그의 잘못된 학문적인 면이다. 그가 텔레비젼에 나와서 가끔 기독교를 아니 성경 내용에 비판한다. 나는 듣고 있으면서 아니 저건 아닌데, 성경을 잘 모르고 있구나 . 그래도 듣는 사람은 그의 유명세와 박학다식에 대체적으로 수긍한다. 이것 저것 좌충 우돌하다가 어떤 실력있는 노자 전공 아줌마를 크게 웃게 하였다고 한다. 웃음을 준 것은 좋은 것으로 본다.

그런데 어느날 또 성경을 언급한다. 바울의 다메석이야기다. 자신도 그곳 지나갔는데 아 그곳에 태양 빛이 대단한 곳인데, 더구나 정오에, 자기도  앗 할 수 있다는 등등의 이야기. 청중들은 공감하듯 웃는 소리나고. 아니 그곳이 지리적으로 그러한 곳이면 그 나라에서 관광지로 개발 하였을 것. 제주도에 지리적으로 차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길에 관광객 내려 관심갖듯, 그곳도 대 관광지 되었을 것. 맞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양반들도 기독교 비호감 갖게 하는데 일조 한듯, 어쨌든 최근에 기독교가 동네 북이 된 느낌인데, 안에서 같이 북치는 사람은 종종 있지만, 이렇게 필자 같이 용기와 노력을 보이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다. 이 분과 한번 공개 토론 하고 싶은데 기회를 갖지 못했다. 어떤 종교신문 기자에게 이야기 하니까 말을 잘못 알아 듣고  그 토론 기회 있으면 자기를 취재 하게 참여 시켜 달라고 하였다.
내가 망설이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안에서도 그를 기독교적으로 높이 평가한 분도 있다는 것이다. 그 분은 팔방미인에 박학다식이라지만, 사람은 다 한계가 있기에 우리의 전문 분야에서는 우리의 나의 하수임에 분명한데,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는 것인지 , 너무나  마음이 그래서,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은유적으로 대신하고 유구무언으로 마친다. 
나는 이 국민적 강사 분에 인간적으로는 호감을 갖고 있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하신다. 우리보다 연배도 높다. 단지 우리의 전문분야에서 틀린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그는 전하고 우리는 반론 기회가 없어서 여기라도 써 놓았다. 이 분에게도 주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빈다.

               우리는 세상과,  세상 지식(인) 장단이 아니라 주님과 장단 맞추며 살아야 한다.
                       ( Since we live by the Spirit, let us keep in step with the Spirit.  Gal 5:25)
글을 맺으며, 
여기까지 장거리 여행 오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약간 자유스럽게 쓴  썼다가 지우는 글들은 넓게 보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으로 생각하시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성막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님, 좋은 것 만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인생길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함께하심  위로  인도 도우심이 충만하시기를  두손 모아 기도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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