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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 하나님의 드라마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10-12-01 (수) 11:43 13년전 5720  
 
교회사 속에서 가장 짧은 제목 일 것이다.  설교 제목은 가장 짧지만 내용은 감동적인 내용이다. 하나님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기네스 북에 오를 만 하다. 만약에 등재될 기회가 있다면 교단이름과 함께 등재되기를 원할 것이다. 교파 의식이나 교단의식이 있어서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현실적으로 교파와 교단은 존재하고 있기에 받아드릴 뿐이다. 단지 외면적으로 볼 때는 우리 교단이 좀 약하다고 생각해서이다. 불완전한 면도 시행 착오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겠으나 상대적으로 더 순수하고 장점도 많은데 그렇다. 사도 바울은 부득불 자랑한다면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하였다.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르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많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복음 안에서의 자유 함이라는 말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참 좋은 말이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도와주실 것을 기도한다.
 
1. 다.
   요셉의 생애 속에서의 가장 짧은 단어 다 에서 하나님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본다.
1). 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의 소유를 그 손에 위임하니 ,”  (창39:4)

가정에서의 살림살이 인간관계 자녀교육 지금도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지금은 핵 가족 시대이면서도 어렵다고 살림살이 어렵다고 사교육비 때문에 힘들다고 경제 문제 때문에 아이를 하나 이상 갖기도 힘들다고 한다. 정부도 이제는 아이를 많이 가지라고 한다. 언젠가는 정 반대였다. 셋 아니 둘 하나 한집 건너 하나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셉은 대 가족의 가정 총무로 임명이 되었으니 그 책임 막중하였다. 대 가족 모두가 잘 먹고 사는 문제 그들 모두의 인간관계 그 외 모든 일을 관리하고 다스려야 하였다. 이것은 결단코 결단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타국에서 팔려온 종으로서 이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여야 하였다.

2). 다
“ 전옥이 옥중 죄수를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39:22)

 요셉의 인생은 꼬이게 되어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서도 이다.
 다 관리하고 다 다스리리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인생들의 가장 큰 애환이 있는 곳, 정직과 거짓, 속임과 진실, 억울함과 탄식 절망과 자포자기와 희망 한숨 등이 크게 가득 차고 섞여 있는 이곳, 인생사의 축소판 이곳에서 모든 문제를 처리하여야 하였다. 그곳은 왕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까지 들어와 있어 궁중 예법 문화까지 배우면서 이 일을 하였다. 사실은 최고의 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다.
대 가족의 살림살이 경영에 이어 세상의 애환 가득한 다양한 인생사 궁중 문화 예법까지 배우게 된 것이다. 학위 없는 인생사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부모 형제 선배 동료 누구도 없는 상황에서 -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기에 신앙박사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감옥에서의 경험은 결정적으로 더욱 많은 것을 배우게 됨을 누구나 알 것이다. 이 강 훈련은 그리운 고향 부모 애증이 교차하는 그리운 형제 생각 그리고 자신의 신세 한탄의 겨를까지 빼았앗을 것이다.

3). 다 
“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창 41:40)

마침내, 국무총리가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이루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셉 자신도 모르게 훈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위해 요셉에게 필요한 훈련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애굽의 국무 총리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그 직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이렇게 훈련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한 꿈을 이루실 뿐 아니라 잘 감당하도록 훈련 시킨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그 나라를 다 잘 다스릴 수 있었다.


2.  그 꾼 꿈을 생각하고,
   그의 형제들은 그를 구덩이에 빠트리면서  말했다.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가 보자 (Then we'll see what comes of his dreams.") 

 요셉은 꿈을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다. 요셉에게 잘 못은 없었다. 두 번 꾼 꿈을 숨기지 않았을 뿐이다. 과장한 것도 아니다.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려움의 시작이었다. 과연 하나님의 꿈은 어떻게 되어 갔는가?  
"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창42:6)

"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 (42:9)

형들의  절하는 장면을 보고 아마 그 자리에서 주저 앉을 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날 밤 밤잠을 자지 못하였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얼마나 놀랐을까? 십삽 여년 전에 꾼 꿈이 그대로 현실이 되어 이루어진 
이 장면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놀랐을까? (37:7)
여기에서 바로 수천 년 전에 이 위대한 신학이 신앙고백이,
암담함과 고난의 수 많은 날과 밤을 보내고, 싹트고 탄생한 것이다.

3. 위대한 신학, 신앙고백 탄생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50:20)
 
이것은 극적인 수많은 고난의 과정 그리고 꿈같은 일이 바로 눈앞에 현실로 나타난 상황,
많은 눈물의 밤을 거쳐 나온 신앙고백이다.
그리고 그것은 먼 훗날 바울의 간증이 되기도 하였고 우리들의 간증이 될 것이다.

4. 나의 이야기 
 "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 생애 속에서  한 개인의 역사 가족의 역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를 볼 수 있다.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는
 요셉과 그 가족 이상의 우리들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이다.
 요셉의 한 개인의 이야기 그의 가족사로  한정 되었다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한 가족의 이야기 이스라엘 역사를 매일 읽고 보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한 가족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이자 하나님의 구원사이기 때문이다.

 요셉의 역사가 끊겼다면 그리스도가 오는 통로가 막혔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이면서 우리들의 역사이고 나의 역사이고 현재의 역사이다. 이 사건들이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역사하신 그 역사 때문에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다. 즉 요셉의 역사가 끊겼으면 그리스도의 통로가 끊기고 지금의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구약의 역사 속에, 요셉의 역사속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는 여기 나를 위한 스릴 있는 역사로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즉 홍해바다가 갈라지지 않았고 그대로 막혀 있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는 것이다. 내 입장에선 나 한 사람 구원케 하는 하나님의 역사 였던 것이다. 나 한 사람 구원 하시려고 하나님은 이토록 노력하신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구원사를 지금 나를 위한 역사로 언제나 현재로 읽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요셉에게 하신 역사는 나를 위한 역사인 것이다.
 다시, 요셉으로 끊긴다면  그리스도의 오시는 통로가 막히는 것이다.

5. 요셉의 눈물 
 요셉의 신학이 탄생하기까지에는 수많은 눈물의 밤이 지났다.
 요셉의 생애 속에는 우는 대목이 많다. 그는 남 모르게도 많이 울었을 것이다.
 인사도 못하고 떠나온 자기가, 죽은 것으로 알고 인생을 한탄할 부모 를 생각하며,
 애증이 교차하는 형들을 생각하며
울고 또 울었을 것이다.  특별히 우는 장면이 많다.

요셉은 울었다. 방성대곡하며 울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드라마에 너무 감격해서 울었다.또 형제애 때문에 울었다.  이 기쁨의 눈물 이전에 수 많은 밤을 남 몰래 울고 또 울었을 것이다. 고향 땅 그리운 부모 형제 보고 싶은 부모 형제, 밤마다 남 몰래 얼마나 울었을까? 가끔은 자기의 신세 때문에 울고, 감옥에서는 암담한 미래 때문에, 큰 기대가 실망으로 변했기에 남 몰래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거쳐 이러한 위대한 신학이 신앙고백이 탄생한 것이다.

많은 주의 종들이 울었다.
아브라함도 수 많은 밤을, 아마 울었을 것이다.
약속 성취가 더디어서. 웃음(이삭)을 얻을 때까지.
모세도 수 없이 울었음을 알 수있다.
엘리야도 울었다.
다윗도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울 기력이 없이 울기도 했다.
베드로도 통곡하며 울었다.
인간의 연약함에 울고 슬픈 상황에 울고 또 울었다.
 
많은 목회 사역자도 다 울었을 것이다. 기쁨에도 울었겠지만 원하는 일이 안되고 원치 않은 슬픔들  답답함 연약함 한계 때문에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은 우리의 영성을 깊게도 하는 필요한 것 이었음을 깨닫게도 한다. 아마 목회 사역자의 가슴 저 밑에 작은 눈물이 고여 있으므로 더욱 영력있는 말씀이 될 것이다. 필자는 내 가슴에 눈물이 고여 있을 때 가장 큰 설교자가 될수가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요셉의 방성대곡은 남몰래 우는 많은 밤 후에 찾아온 기쁨의 억제할 수 없는 감격의 눈물들이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 우리 모두에게 특히 힘들어 울며 목회사역하는 분들에게  그 동안에는 영력이 더욱 깊어지고, 마침내, 기쁨의 방성대곡 대성통곡의 찬란한 울음이 찾아 오기를 기도한다.
  또한 답답한 남북관계도
  우리 모두가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므로 (왕상3:10-13)
  마침내 기쁨의 방성대곡을 할 때가 오기를 기도한다.  
  
 마침내 우리 모두 평화의 열차를 타고 이북 중국 러시아, 그리고 유럽까지도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하며 신나게 달리고,
영적 자원 자연자원 함께 나누어 쓰는 꿈 같은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슬픔의 눈물이 기쁨의 방성대곡이 되는  꿈 같은 날들이 오기를 기도하며,
                                                               
                                                                                         
  성광교회 이동원 목사 드림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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