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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동사다

김승환 (강원노회,생명,목사) 2011-01-28 (금) 23:09 13년전 4054  

예수는 동사다

(요 1:29-34)

두 달 전쯤 이상한 메일을 받았습니다. Margaret Sawer라는 사람한테서 온 "God directed me to you"라는 제목의 편지였습니다. 낯선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지시로 편지를 썼다기에 메일을 열어보았습니다. 내용은 정말 뜻밖에도 자신의 유산을 기부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신은 어려서 일본인과 결혼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으로, 얼마 전에 유방암 선고를 받아 투병중이고, 곧 수술을 앞두고 있는 죽어가는 여자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남편이 죽으면서 물려준 꽤 큰 재산이 있다, 남편이 죽은 뒤 시댁식구들이 그 재산을 탐내서 이미 많은 부분을 줘버렸지만 아직도 자기에게는 적지 않은 재산이 있다, 그 돈을 돈밖에 모르는 사악한 시댁식구들에게는 주고 싶지 않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돈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놓고 오랫동안 기도하였다, 기도하는 중에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귀하에게 접촉하게 되었다, 이 돈을 주님의 선한 사업을 위하여 쓰고 싶다, 특별히 고아와 과부, 불행한 어머니들, 소외된 사람들의 자활을 돕는 프로젝트에 쓰고 싶다, 귀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나는 귀하가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내 간절한 뜻을 받아달라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감동이 되기도 하여 시편 23편을 인용하여 간단한 위로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또 편지가 왔습니다. 내 뜻을 받아주어 감사하다, 이 인도주의적 프로젝트가 지속적인 사업이 되도록 구체적으로 사업을 구상하여 언제 얼굴을 맞대고 만나서 얘기를 하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그 전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바란다.....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편지가 오갔지만, 모든 얘기를 다 할 수는 없고, 그런데 결론을 얘기하면 이게 사기였습니다. 자신은 다음 주면 수술에 들어가는데, 그 전에 유산을 양도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불가불 나를 만나야겠는데, 그 돈이 지금 말레이시아의 모 투자회사에 예탁되어 있다, 자신이 의뢰한 변호사와 만나서......여기에 약간의 돈이 들어가는데.....그 전부터 미심쩍은 부분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긴가민가하다가 이 부분에서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잘 아는 후배 변호사에게 문의를 하였더니, “선배님, 그거 사기입니다. 요즘 보이스 피싱이다 뭐다 별별 사기가 다 있잖아요. 그 비슷한 사기인데, 수법이 아주 전형적이네요” 하고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뿔싸,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식으로 접근할 수 있겠다 싶어 총회에 연락을 해보니, “목사님, 그거 요즘 흔한 사기예요. 저희도 벌써 그런 메일 많이 받았어요. 다음부터 그런 메일 오면 아예 열어보지도 마세요.”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하나님의 이름을 팔고, 성경을 그렇게 능숙하게 인용하면서 사기를 친다는 말인가? 성경구절의 선택과 언어구사가 아주 깊은 신앙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받게끔 하였는데, 상당한 정도의 신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하는 짓이었습니다. 마귀도 성경을 인용한다더니, 꼭 그러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사기에 잠시라도 마음을 빼앗겼던 내가 그렇게 한심한 사람인가 싶었습니다. 도대체 내 안의 어떤 연약함이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어떤 욕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기대어 남부럽지 않은 어엿한 모습으로 행세하고 싶은 마음, (요즘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듯이) 단숨에 문턱을 넘어서고 싶은 마음....그런 콤플렉스, 그런 조급한 마음이 분명히 있었어요. 나에 대한 일종의 과대망상증,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마땅히 들어주셔야 된다고 하나님께 강박하는 일종의 시건방짐이라고나 할까, 마땅히 품어야 할 것 이상으로 나 자신을 생각하는 미성숙함이 있었던 거지요. 그러니 잠시라도 마귀가 와서 수작을 걸었던 거구요. 그나마 분별력을 갖게 되어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또 얼마나 부끄럽던지요.

특별히 그 당시는 온누리교회의 김하중 장로가 쓴 <하나님의 대사>>를 교우들과 함께 읽은 지 얼마 안 되던 시점이었습니다. 거기에 별별 신비한 애기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특별한 부담을 주셔서 누구한테 헌금을 하였다는 얘기, 난데없이 어디서 전화가 와서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날 걸 얘기하고 준비하도록 했다는 얘기,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으로 어려운 위기를 극적으로 극복했다는 얘기 등등. 그러한 이야기들은 물론 거짓없는 사실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권적 능력으로 김하중 대사의 생애 속에 베푸셨던 기적이지 처음부터 그것을 바라고 구해서 일어난 기적은 아니지 않습니까?

광야시험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 말고 무슨 특별한 지름길을 찾아 술수를 부리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마귀는 그렇게 하라고 부추겼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뿌리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길을 갈 때 주의 말씀을 따라서 묵묵히 걸어갈지언정 처음부터 무슨 특별한 기적을 기대하는 습관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이게 하나님의 뜻인지 나의 욕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순간이 오는데, 그래서 늘 말씀에 비추어서 기도하고 분별해야 해야 합니다. 물론 기적이 있지만,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 반드시 감당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일단은 좀 우직하게, 성실하게 그 일을 하는 게 옳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와 같이 언제 어디에 있든지 자신이 서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례 요한, 얼마나 성실했습니까? 결코 자기 분수를 넘지 않았습니다. 자기 한계를 알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을까요? 아들이라고 해서 특권을 주장하지도 행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가장 밑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가장 고달픈 음지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남이 더럽다고 안 하는 일, 더럽고 냄새나는 일, 소위 죄인들이 하는 일, 아니 그 죄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다. 한 마디로 세상 한 복판에서, 그 무게를 고스란히 지고, 그 어떤 특권과 반칙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그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온 몸으로 싸워나가는 삶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만약에 육신이 안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하늘에, 사람은 땅에. 당신만의 천국이었을 겁니다. 그 어떤 기적을 일으켰다 한들, 그것이 좋을 게 무엇입니까? 내가 뭐라도 하는 게 있어야 합니다. 내가 깨우치는 게 있어야 하고, 나 스스로 뭔가 성장하는 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 한번도 기적을 위한 기적은 베푸시지 않았습니다. 하여, 그분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고락을 함께 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던 것은 바로 그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위치를 변경하는 것이요, 나에게서 너에게로 건너가는 것이요, 입장을 바꿔 생각하고 나의 소중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권리와 의무 그 모든 걸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고 했거니와, 이 말씀도 너무 교리적으로 접근하지 마십시다. 동사가 아니면 사랑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죄~” 그러면서 거리를 두면 그것 또한 사랑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함께 나누는 게 있어야 사랑입니다. 함께 짐을 져야 사랑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십니까? 자식이 하는 일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죄~” 하면서 낙인찍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석하고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높이를 낮추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백짓장이라도 맞드시기 바랍니다. 함부로 말하면 도리어 소외감만 깊어지고 상처만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시라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도 동사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지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동사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은 눈으로 그리지 않아요 사랑은 입술로 말하지 않아요 참사랑은 가난함도 부요함도 없어요 나의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거예요” 그렇게 이웃을 찾아 움직이는 사랑을 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성령을 아낌없이 부어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함께하심에 감사하십시다. 그 은혜로 영육간에 많은 축복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도 내곁에 있는 사람의 짐을 기쁨으로 나누어지십시다.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사랑이 바닥까지 흘러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들 잘 안 내려가려고 합니다. 자식이라면 기쁨으로 내려가야 옳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바닥으로 향해 계십니다. 거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이 웃으면 하나님도 웃고,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이 울면 하나님도 우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고 그와 함께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엉뚱한 데서 하나님을 찾는 것, 동사 없이 명사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 그것은 있으나마나 한 죽은 신앙이요 우상숭배나 다름없습니다. 초대교회때 가현설(Docetism)과 그렇게 치열하게 싸운 게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 동안 세상 죄를 짊어지신 주님을 본받기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상 죄를 분석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을 즐겨했던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세상도, 사람도 분석과 판단과 비판을 통해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교우들에게 미안합니다. 살기 위해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 만들어보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 본의는 아니었다고 해도 사랑이 많이 부족했던 게 사실입니다. 명사적 사랑보다 동사적 사랑을 할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짐해봅니다.

교우 여러분께도 부탁합니다. 좀 더 책임적인 자세로 교회 일에 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매사에 함께 짐을 자세로 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예배의 주체입니다. 봉사는 제직들만 하는 게 아닙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좀 더 많이 움직입시다. 우리 교회가 더럽고 추한 ‘사르크스’(육신)을 입고 지역의 현장 속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도록, 우리 모두 올 한 해, 더 많이 동사가 되십시다. 우직하게. 단순하게. 착하게. 하나님의 어린 양처럼. 어린 양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처럼 말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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