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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실패

문동수 (경기노회,밀알교회,목사) 2011-02-27 (일) 21:36 8년전 3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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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동수 목사의 숨쉬는 마을)

3월 1일(화)                    룻기 1장 19-21절

그 두 사람은 길을 떠나서,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니, 온 마을이 떠들썩하였다. 아낙네들이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 하고 말하였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들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나는 가득 찬 채로 이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각하기 -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두 아들을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만 남편과 두 아들이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며느리 한 명과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고향사람들은 나오미를 반깁니다. 잘 왔다고 격려를 합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말을 합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즐거움, 기쁨,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한다면 “예쁜이”정도가 될 것입니다. 마라의 뜻은 ‘쓰다, 괴롭다’는 뜻이 있습니다. 나를 예쁜이라고 부르지 말고 괴로운 사람이라고 불러달라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인생역정을 살펴보면, 정말 그런 하소연을 할 법도 합니다.

성서에는 이름을 바꾼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벤오니에서 벤냐민으로,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나오미가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말을 하는데도, 사람들은 그를 마라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룻기 전체에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를 나오미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나오미 같은 사람들을 보고는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남편과 자식을 잡아먹은 년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룻기의 저자는 그를 그런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는 시각으로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성공이라는 푯대를 향하여 저마다 생명을 걸고 역주를 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인생의 실패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눈입니다.

영적인 눈은 이와 좀 다릅니다. 영적인 눈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성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의 실패를 성공이라고 합니다. 이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잘나서 성공한 줄을 압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영적으로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오히려 세상에서의 실패가 성공입니다. 적어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시의 기도

                          - 사망한 노숙자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시

둥지를 잃은 집시에게는

찾아오는 밤이 두렵다.

타인이 보는 석양의 아름다움도

집시에게는 두려움의 그림자일 뿐......


한때는 천방지축으로 일에 미쳐

하루해가 아쉬웠는데

모든 것 잃어버리고

사랑이란 이름의 띠로 매였던

피붙이들은 이산의 파편이 되어

가슴 저미는 회한을 안긴다.


굶어죽어도 얻어먹는 한술 밥은

결코 사양하겠노라 이를 깨물던

그 오기도 일곱 끼니의 굶주림 앞에

무너지고


무료급식소 대열에 서서,,,,

행여 아는 이 조우할까 조바심하며

날짜 지난 신문지로 얼굴 숨기며

아려오는 가슴 안고 숟가락 들고

목이 메는 아픔으로 한 끼니를 만난다.


그 많던 술친구도

그렇게도 갈 곳이 많았던 만남들도

인생을 강등당한 나에게

이제는 아무도 없다.


밤이 두려운 것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다.

50평생의 끝자락에서

잠자리를 걱정하며

석촌공원 긴 의자에 맥없이 앉으니

만감의 상념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난마의 세월들......


깡소주를 벗삼아 물 마시듯 벌컥대고

수치심 잃어버린 육신을

아무데나 눕힌다.

빨랫줄 서너 발 철물점에 사서

청계산 소나무에 걸고

비겁의 생을 마감하자니

눈물을 찍어내는 지어미와

두 아이가 "안 돼, 아빠! 안 돼"한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교만도 없고 자랑도 없고

그저 주어진 생을 걸어가야지.

내달리다 넘어지지 말고

편하다고 주저앉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날의 아름다움을 위해


걸어가야지......

걸어가야지......


명상하기
-

진실된 의미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이타적 행위는 자기 자신의 측면에서 보면, 곧 나를 사랑하고 나를 귀히 여기고 나를 위하여 나를 이롭게 하는 한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 건축은 오로지 이타적 행위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 (송 창근)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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