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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위장된 적그리스도와 신앙자세

김석태 (경기노회,필리핀 선교사,목사) 2011-04-07 (목) 13:03 13년전 4602  

제목: 말세의 징조-위장된 적그리스도와 신앙자세

본문: 마태복음 24:15-28


외람되게 부족한 사람이 이글을 올리기에 송구스러움과, 두려운 생각도 듭니다. 요즘은 종말론에 대한 부정적 사고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종의 마음에 감동이 있어, 필을 들게 됩니다. 이것을 읽는 우리 성도들에게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들과 성도님들께서 잘못된 점을 발견하게 된다면 댓글이나, 이메일로 연락 해 주시면 수정 하도록 하겠습니다. ( kimst7003@hanmail.net )

1. 멸망의 가증한 것들이 거룩한 곳에 선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징조를 말씀 하시는 가운데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하신 말씀이 읽는 자는 깨달으라 하셨습니다. 오늘의 현실이 어떠합니까 ? 주님 말씀대로 이루어 진 모습입니다. 성인들이 보기 보다도, 세인들이 보기에 성직의 자리는 죄악의 온상처럼 보고, 악한 말과 비난을 쉬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런 말을 외면 할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지금은 사순절 절기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기 전에 빌리도는 최악인 살인자 바나바와, 예수님을 세워 놓고 무리들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 예수를 놓아 줄가 ? 빌라도를 놓아 줄가 ? ] 이때 빌라도의 심정은 예수님을 놓아 줄 생각이었는 지 모릅니다. 그런데 무리는 일제히 [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밖으라 ] 함성을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고 거룩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 함성의 소리를 듣는 듯 합니다. 왜 그럴가요 ? 의와, 거룩과, 진실 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성직자는 예수님의 제자에게 비유하고 상징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지지 않고, 온 갖 타락과 탈선의 모습이 성직자들에게서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선교지에도 목사와 선교사의 이름을 가지고 만악을 행하는 모습이 들어 나고 있습니다. 간음, 사기, 도적, 악인도 듣고 경악 할 온갖 죄가 성직자의 자리에서 돌출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직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고, 오히려 일반인 보다 신뢰감을 갖지 않는 상황에 이르러 가는 상황으로 돌변 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깨달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수 해야 할 일이지만,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에서 깨달을 일이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말세의 징조란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4 : 15 절의 말씀을 읽어 봅시다.

마 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요즘 이단들이 설치고 있읍니다. 또한 사이비 종교들이 판을 치고 있읍니다. 교회의 이름과 성직자의 이름으로 사기를 치는 사건이 여기 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읍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누구나 똑똑히 보며 살아가고 있읍니다. 이는 어느 민족만이 아니라 온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닌 지 ?

주님께서 나를 바라 보실 때, 바로 네가 그런 사람이라 말씀하시지 않을 지 ? 그런데 우리는 가롯 유다처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 지 ? 철저하게 점검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며, 정죄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판단하고 비판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가롯 유다가 [ 주여 ! 내 니이까 ? ] 질문을 예수님께 할때, 예수님께서는 떡을 가롯 유다의 입안에 집어 넣어 주시며, [ 그래, 바로 네가 나를 팔 사람이다. ] 그러나 가롯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팔고, 십자가에 처형케 하는 장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않되겠습니다.

2. 큰 환란이 일어난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의 징조 중에 하나가 큰 환난을 말씀하셨습니다. 역사 이래, 이 땅에 환난이 없던 시대가 없습니다. 바다에는 큰 파도 작은 파도가 쉬임없이 굽이치듯이, 세상에도 큰 환난과 작은 환난이 계속 굽이쳐 왔습니다. 그러나 말세에는 전에도 후에도 없던 환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4 : 21 절의 말씀을 읽어 봅시다.

마 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요즘 이곳 저곳에서 대형 사고들은 물론, 무서운 전쟁들이 일어나고 있읍니다. 앞으로 예고하는 일은, 전무후무한 환란이 있을 것을 예고하고 있읍니다. 핵 전쟁, 위성들의 충돌 문제, 공해와 자연의 급속한 변화로서 기근, 지진 해일, 문제 등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사실에 대하여 말씀 해 주셨을 가요 ? 위협하기 위해서 일가요 ? 공포와 불안 심리를 주기 위해서 일가요 ? 아니면 이것으로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셨을가요 ? 아닙니다.

이를 대비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이 큰 환난에서 살길을 찾으라 ! 구원받을 길을 찾으라 ! 는 예수님의 강한 멧세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큰 환난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앞으로 다가올 전무 후무한 큰 환난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땅이 흔들리고, 파괴될 무서운 재앙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떠합니까 ? 주님 말씀을 따라 대비하는 자세보다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지진과 해일로 20 여만명이 죽어 간 것을 눈 앞에 보고서도 우리들의 마음은 평안하고 안전하다는 의식이 자리잡을 뿐입니다. 그러나 피할수 없는 큰 환난의 날은 우리에게 점점 다고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피할수 없다는 일입니다. 데살노니가 전서 5 : 1 ~ 3 절의 말씀을 읽어 봅시다.

살전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살전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살전 5: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왜 ?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까 ? 그 해답은 데살로니가 전서 5 : 6 - 11절의 말씀입니다.

살전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살전 5: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살전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전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살전 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우리는 위의 말씀과 같이 구원의 길을 대비하는 신앙 자세를 갖추어 살아야 합니다.

3.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다.

말세의 징조중의 하나는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을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믿을수 없는 일이 이 역사의 현장에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로 이해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떠합니까 ? 내가 예수라 하는 일입니다. 우리 한국에서 만도 [ 내가 예수라 ]는 사람이 수십명에 이르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포스타를 대문짝 만하게 붙여 놓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얼빠진 사람이라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수없이 시녀처럼 따르고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 할수 없는 일이 우리 나라 만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종말의 징조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마태 복음 24 : 23 ~ 24 절의 말씀을 읽어 봅시다.

마 24: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다. 골방에 있다. 산에 있다 할 것이다. ] 우리나라 1990년대에 이 서건으로 얼마나 사회에 충격을 주었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이는 다만 종말의 징조 일 뿐이지 종말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종말의 날은 오직 하나님 만이 아실 일입니다. 그러기에 종말의 징조에 현혹되는 자는 어리석을 뿐입니다. 왜 입니까 ?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여 주셨는 데 이런 일에 동요되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고 미련함을 선포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다만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때를 아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란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결코 않된다는 일입니다. 더더욱 바르게,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일입니다. 왜입니까 ? 이것이 구원받고, 영원히 살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4. 적그리스도가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일이다.

적 그리스도는 무력하고 무능한 자가 아닙니다. 큰 기적과 표적을 행하며 보여 주는 자들입니다. 적 그리스도가 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 같지 않은 말에 현혹 되는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회유 할 만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나 오늘이나, 꼼짝 못하는 큰 표적과 기사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큰 표적과 시사를 행하는 자 앞에서 머리를 숙입니다.

큰 표적만 행하고 큰 기사만 보여 주면, 그 사람의 본질을 의심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조건 그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계략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큰 표적은 그만 두고, 작은 표적, 작은 기사에도, 수족을 못 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표적과 기사를 구하는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마 24: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큰 표적과 기사는 사탄의 무기입니다. 사탄은 할수만 있다면, 큰 표적과 기사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는 작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자는 이런 일에 미혹 되어서는 않되는 일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어떤 큰 표적이나, 기사에 좌우 될수 없는 법입니다. 이런 것에 좌우되는 신앙이라면,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있는 대상은 아니며, 하나님을 믿는 신아도 될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말세를 살아 갈 우리 성도들이, 어떠한 환경이 치밀고 온다 할지라도, 이런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이 예언의 말씀을 들려 주신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는 큰 표적을 가지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체하며 미혹을 하고, 거짓 선지자들은 큰 기사를 가지고 자신이 참 선지자라 하며 성도들을 미혹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것에 흔들릴 필요가 전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이 일에 대하여 확실하게 미리 말씀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호리는 말에 따라 여기에 나타나고, 저기에 나타나 주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슴하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묻혔다가 부활하셔서 40 일을 계시다가 승천하실 때. 두 천사를 통하여 이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한번 확인 해 볼가요 ?

행 1:6 저희가 모였을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행 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 라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 옷 입은 두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주님의 재림은 하늘 위에 구름을 타고 오시는 데, 천만인이 모두가 볼수 있게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한 곳의 말씀을 더 봅시다.

살전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 하리라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은 어느 한 곳만 볼수 있게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산자만이 아니라, 죽은 자도 무덤 속에서 살아 나게 하셔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 주님은 호령하시며,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게 됩니다. 어느 한쪽 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산자나 죽은 자, 온 세상 천만인이 볼수 있도록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죽었던 자나, 살아 있는 자나, 성도는 공중으로 끌어 올림을 받아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3 : 27 절의 말씀을 봅시다.

막 13:27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우리가 이곳 저곳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당신 계신 공중으로 우리를 끌어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여도 찾아 갈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선 자리에서 주님을 믿는, 자기 믿음을 끝까지 굳게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지붕위에 있던지, 멧돌질을 하고 있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일복이나, 노동복을 입고 있던지, 거지의 옷을 입고 있던지, 상관없습니다. 갈아 입을 필요가 없습니다. 홀연히 변화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 인생의 본질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사람인가 아닌가 ? 가 문제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합니다.

마 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마 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마 24: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 24: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 17: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왜 그럴가요 ? 모래 밭에 자석을 가져다 대면, 가까이 가는 순간 쇠 가루는 살기가 나서 올라 붙는 현상이 생깁니다. 그러나 모래 알은 아무리 자석을 들여 대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쇠 가루는 자석을 닿기도 전에 끌어 올라 달라 붙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실 때 이 현상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능력에 의해, 쇠가루자석에 끌어 올라 붙듯이, 공중에 끌어 올림을 받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마 24: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5. 불건전한 기도원이 많아 진다.

우리 기독교와 타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처음 시작 되는 모습입니다. 타 종교는 사람 사는 곳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 시작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석가가 그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사람사는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 사는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고, 제자들에게도 사람 사는 세상가자하셨으며, 승천 하시면서도, 사람 사는 세상 속으로 들어 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기독교의 교회 출범은 마가의 집 다락방에서 시작이 된 것은 역사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말세에는 사람들을 광야로 끌어 모으는 현상이 벌어지제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산에 올라 기도 하셨습니다. 변화 산상에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라가 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그 곳이 사역과 삶의 현장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은 바로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순간이었습니다.

이와같이 건전한 기도원이 세워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 건전한 기도원이나, 불 건전한 신앙의 처소를 말 합니다. 사람들이 그 곳에 와야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승천할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성경 말씀과 주님의 말씀에 정 반대로 위배되는 말씀입니다. 아래의 말씀을 읽어 봅시다.

마 24: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마 24: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말세의 때에는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고 하며, 산에 있다고 한답니다. 그러나 믿지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에 미혹되어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앞으로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6. 가정 제단이 많아 진다.

마태복음 24 : 25 절의 말씀을 보면, 보라 ! 내가 미리 말하였노라 ! 말씀하시며, [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 하십니다. 이제는 고방에 기도원을 만드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요즘은 산속의 불교도, 마을 속으로 내려와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골목마다 가정에 사원이 세워졌다는 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이교도나, 우리 기독교계에서도 골방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성경 말씀을 봅시다.

마 24: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마 24: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골방의 주인들은 그리스도의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 골방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 대략은 금품입니다. 속임수입니다. 참으로 경계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7. 전투기의 출현이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 물론 독수리들은 먹을 것을 찾아 시체가 있는 곳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유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았다고요,.... 현재 있지도 않은 일을 말씀하게 될 때 어떻게 사람들이 이해 할수 있을가요 ? 그래서 비유로 말씀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이며, 독수리는 무엇을 상징할가요 ? 죽음이 있는 곳은 전쟁터를 말합니다. 왜 입니까 ? 전쟁터는 시체가 쌓이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24 : 7 절의 말씀을 보면, 민족과 민족이, 나라가 나라를 상대하여 전쟁이 일어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세의 징조 중에 하나는 전쟁이 심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는 전쟁을 하여도 창과 칼이 주 무기였습니다. 말이 최고의 전투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독수리 같은 전투기의 출동입니다. 칼과 창이 아니라, 총과 포탄을 뚜어 넘어, 미사일과 핵무기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현실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성경 말씀을 봅시다.

마 24: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 ] 죽음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 위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전쟁터를 의미합니다. 독수리는 무엇을 상징할가요 ? 비행기 즉, 전투기입니다. 전쟁터에는 독수리 즉 비행기들이 모여 듭니다. 얼마 전에 연평도 사건이 있을 때 미국의 전투기가 왔습니다. 리비아의 내전으로 전투기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맨 처음 비행기는 미국에서 전쟁을 위해 만들어졌고, 그 비행기의 상징적 이름을 독수리로 붙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2,000 여년 전에 예수님이 말씀 하신 일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8. 말세 때에 참된 신앙 자세

1)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지 마라.

마태복음 24:25-26 [보라, 내가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런데 16절의 말씀을 보면,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 하지 말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대는 선택 받은 민족이 사는 지역입니다.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자기들만 구원 받으며, 자기들만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상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죄악을 행하며 진리를 부인하면서도 스스로가 거룩하다고 생각하며, 남을 정죄하기를 좋아 합니다.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 합니다. 바로 유대인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인들은 유태교인들로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주후 70 년에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하여 멸망 당한지, 1878 년동안 자취를 감추고 있다가 1948 년에 독립하고 이스라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터 속에서 살아 온 민족임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은신처와 보호성은 산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산이 피신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세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가요 ? 유대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을 말합니다. 오늘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를 의미합니다.

산은 자신들의 보호성이요, 방패로 삼는 것입니다. 극도의 위기에서 자기를 맡 길수 있고, 그 속에 파뭍혀 생명을 의존하는 곳을 말합니다. 전쟁이 일어나 사경에 처한 급박한 상황을 만났을 때 기존에 의지하고 구원자처럼 생각하였던 그 것에 의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 우리의 피난처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도망치는 자가 되지말고,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 품속에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산성은 피할 곳이 없게 됩니다. 세상의 어떤 군왕도 자신의 몸을 가리울 곳이 없게 됩니다. 요한게시록 6 : 12 ~ 17 절의 말씀을 읽어 봅시다.

계 6: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계 6: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가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계 6:14 하늘은 종이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계 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계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계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말세에는 이 땅 그 어느 곳도 피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내전이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군완들이 피할 곳을 산의 동굴로 은신처를 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말세에는 하늘도 땅도 사라지니 피할 곳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말씀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본 지진 9.0 (2011.03.11)으로 인하여, 지축과 일본 지반이 옮겨갔다는 보도를 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징조를 사실로 입증 시켜주는 일이라 봅니다. 이제 주님의 하신 말씀은 현실로 들어 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믿지 않으시렵니까 ? 지금은 주저 할 때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 해야 할 때입니다.

2) 지붕 위에 있는 자들은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

이스라엘은 건축법이 3층으로 짖게 되는 데, 1층은 짐승들이 거처 하는 곳이요, 2층은 가족이 거처하는 곳이며, 3층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처소였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가 첫 출범한 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었으니, 기도의 처소였습니다. 가난하여 3층을 건축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옥상 즉, 지붕이 기도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붕은 기도의 처소를 상징합니다. [ 지붕 위에 있는 자들은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 ] 하신 말씀은 기도의 처소를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처소를 떠나게 되면, 세속화되기 마련입니다. 롯의 처 처럼 물욕에 얽매여 소금 기둥이 되어 멸망을 자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을 합니다. 호흡이 없는 인생은 시체같은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호흡이 끊어져 가는 인생에게는 산소 호흡기를 끼어 주어 생명을 연장케 하여 줍니다. 우리는 영혼이 살기 위해서 기도줄을 놓아서는 않됩니다.

호흡은 언제나 합니다. 잠을 자면서, 일을 하면서, 음식을 먹거나, 언제든지 쉬지 않고 합니다. 의식적으로 호흡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평상시에 언제나 하게 됩니다. 기도도 바로 이와 같이 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특별히 기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으니, 주님 가르쳐 주신 주기도 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기도 할 것을 당부하여 주셨습니다. 성도여 ! 기도 생활을 잃지 맙시다.

3) 밭에 있는 자들은 겉 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

밭은 인생의 일터요 생활 본산지입니다. 말세에는 성도가 지켜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일터와 겉 옷입니다.

(1) 일터 입니다.

주부는 일터가 자기 가정이 이요, 남자는 일터가 직장이며, 학생은 일터가 학교입니다. 과원지기는 일터가 과수원이고, 청소부는 자신이 청소하는 지역입니다. 말세가 다가왔다고 자기의 하는 일을 소홀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나는 내일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순간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해 슬기있는 다섯 처녀처럼, 자기의 할 일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 겉 옷 입니다.

겉 옷은 성도의 옳은 행실을 비유합니다. 성도에게 옳은 행실은 사전에 미리 준비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열 처녀 비유 중에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같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천사장의 나팔 소리를 듣고, 기름을 찾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같이, 주님 재림하신다는 소리를 듣고, 성도의 옳은 행실의 옷을 찾으러, 뒤로 돌이켜야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다. 차라리 거지의 옷을 입고서라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 프랑스의 윌리엄 승왕의 말로:

윌리엄 승왕은 악하기로 이름난 자입니다. 윌리엄은 영국을 침략하여 빼앗게 되자, 영국인을 학정했습니다. 토지를 다 몰수하는가 하면, 반항하는 촌락은 불을 질러 무인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방 90 마일을 사냥터로 만들어, 주민을 내몰고, 그 근처에서 노루 한 마리라도 잡는 자는 눈을 빼고, 수족을 자르고, 악형을 가했습니다. 그러던 중, 윌리엄 승왕에게 운명의 날이 찾아오고야 말았습니다. 윌리엄 승왕은 이 날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시간이 문전에 다가온 줄 알고서, 지난 날의 죄업을 없애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소용 없는 일이었습니다. 임종의 순간에 많은 신부들을 불러 놓고, 사죄의 기도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빈민들을 구제하고, 불 태웠던 만트성에 회당을 재건하게 하고, 재산을 각기 수도원에 기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가두었던 죄수들을 모두 석방하여 주었습니다. 긴긴 세월 악을 행하고, 죽는 순간에 한꺼번에 회개하고, 선을 행하려 하였으나,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들 삼 형제가 있었으나, 윌리엄 승왕이 숨을 거두자, 아버지 장사도 지내지 않고, 보물 창고로 달려 갔고, 그를 땅에 묻으려 하였을 때에, 아무도 장지를 내어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간신히 땅을 사고, 배상을 약속하고 묻었으나, 나중에 폭도들이 그 시체를 꺼내어 없애 버렸습니다. 천하를 쥐고, 흔들던 권세가 한바탕의 꿈이었고, 죽었을 때에 시체마저 갈 곳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인생에 옳은 행실은, 죽을 때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서 숨쉬는 순간마다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옳은 행실은 세마포가 되어 겉 옷으로 입혀져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죽을 때 제 아무리 값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혀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옷은 불에 태워지거나, 땅 속에서 썩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옳게 산 사람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거룩한 옷이요, 영원한 옷으로서 하나님 앞에 입고 서게 될 옷인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석상입니다. 이때 입어야 할 옷은 세마포인데, 성도의 옳은 행실의 옷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19 : 8 절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계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4) 환란의 때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마 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 24: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여기에서 종말의 때에는 아이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일가요 ? 이는 비 정상을 떠난 자들을 의미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번성을 가장 큰 축복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를 가장 흉측한 범죄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이 일로 노아 홍수의 심판도, 소돔 고모라도 멸망을 가져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집가고 장가 가는 일이 왜 죄악인가요 ? 결혼은 참으로 신성한 일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행복이요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유흥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문화가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었으니, 간음과 혼음이 전부였습니다. 이를 위해 도적하고, 살인하며, 온갖 죄악의 횡포가 가득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도가 지나 남자끼리, 여자끼리, 어머니와 아버지와도 간음 행위를 서슴치 않는 세상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문화는 어떠한가요 ? 그와 버금가는 세상 문화라기보다, 그 이상을 초월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 여겨 집니다. 이런 비 정상적인 상황에서 아이를 베고,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 되지 않도록 위하여 기도하라 ] 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한다 해도 겨울에 당하게 된다면,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 우리가 겨울보다는 봄, 가을, 여름이 그래도 훨씬 낫지 않을가요 ? 그러기에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 되지 않게 위하여 기도하라 는 당부의 말씀 같습니다.

둘째로 안식일이 되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매주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예배드리는 안식일은 온 세계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순간의 날입니다. 이스라엘 서양의 안식일은 동양에서 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안식일은 동서양의 거룩한 날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위하여 기도하라 ] 하신 것으로 이해 됩니다.

그래도 주일과 안식일을 맞이한 사람들은 예배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날은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갈라 서는 날입니다. 자기 행실과 믿음이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예배당에서 예배 할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자기 죄악을 기쁨으로 누리는 자리에서 죄 짓는 일을 일삼고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일(주일과 안식일)이 아니고, 평일에 오신다면, 우리 믿는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약한 자들은 죄악의 낙을 누리는 장소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혹에 죄를 짓다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가요 ? 하나님과 주님의 심정은, 될수 있는 대로,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시기를 소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 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하나님 편에서는 성도의 생명 하나가 이렇게 소중하기에 하나님께서는 환난의 날을 감하시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재림의 날을 그 누구도 알수 없는 일입니다.

마 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 24: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하십니다. 이 얼마나 섬세하신 하나님이신지요 ? 이 하나님을 믿지 않음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9. 재림의 시기:

재림의 시기를 정확하게 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 날을 알려고 하는 그 자체가 비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그 날은 너희의 알바 아니요, 하늘의 천사와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징조로 보아 재림의 때를 짐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추수의 날은 알수 없지만, 추수의 계절이 다가 온 것은 누구나 알수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1) 겨울이라는 사실이다.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셨읍니다. 겨울은 춥습니다. 지면과 모든 것이 얼어 붙는 계절입니다. 인생의 겨울은 사랑이 식은 것을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마음도, 생기도, 희망도 얼어 붙게 됩니다. 모든 것이 얼어 붙습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 한바와 같이 자연적 계절도 생각 해 봅니다.

2)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더 많은 일이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우리 나라는 주일입니다. 유럽은 토요일 즉 안식일입니다. 유태계 안식일은 주일과 성일이 겹친 날입니다. 만일 유럽 지역에 주일날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월요일에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유태계 인에게 안식일은 온 세계의 성일입니다. 왜 예수님이 안식일에 오실까?

(1) 세계에 공통적인 성일이기에

(2) 변명할 여지가 없도록

(3) 한 사람이라도 버려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

평일에 오신다면, 우리 성도들도 정신없이 세속에 뭍혀 놀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온 세계 교회가 하나되어 예배하는 순간에 오신다면, 그래도 많은 성도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오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안는 자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될 것입니다. 세속에 빠져 놀아 나다가 주님을 맞이하게 될 때 무슨 변명을 할수 있을가요 ?

1994. 05. 29. 일에 목회 할 때 설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것을 재 정리하였습니다.

귀하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2011. 04. 07.

김석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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