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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본문으로 본 평화통일주일 메시지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11-08-19 (금) 23:17 12년전 3369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왕상17:8-16,행6:1-7,막6:30-44)

   오늘은 8.15 광복절 제66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교회들이 민족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그 기원(祈願)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정부 들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남북 관계가 악화되면서, 천안함이나 연평도 포격사건을 비롯하여 준(準)전쟁에 해당하는 여러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진 이 마당이어서, 오늘의 평화통일 주일에 거는 기도는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남북의 문제 해결은 이제 민족의 생존과 미래의 문제에 직결된 일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최근의 미국의 행태들을 보십니까? 제가 오늘 발간한 주보의 목회서신(‘11-32호)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칼럼을 올렸는데, 꼭 읽으시기 부탁합니다. 우리나라 동해 바다를 일본해로 명기하도록 미국이 공식 손들어 주는 것을 보셨지요? 미국은 우리 한국과 일본이 독도 문제로 서로 갈등이 깊은 것을 뻔히 잘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되는 데의 주역 중의 하나인데, 이번에 일본의 손을 들어 준 것은 정말 심각한 배신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세계적 공식 해양지도에서 우리 독도가 일본해에 속한 하나의 부속 도서에 불과한 것으로 세계인들에게 인식을 하도록 허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치밀한 작전에 지금 미국이 놀아난 것이었고, 그 결과 앞으로 일본의 우리 독도에 대한 강점(强占)이 예견되기도 합니다.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 지금 그토록 국내외적으로 우리 독도에 집착하고 나오는 것을 보면, 왠지 심상치 않습니다. 만일에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면, 일단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까요? 일본은 이미 세계를 상대로 대전쟁을 치렀던 노하우도 축적된 나라입니다. 견디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일단 빼앗기고 나면, 명분(名分)에서 밀리기 시작한 우리가 과연 누구의 힘을 의지하여 일본과 대적하겠습니까? 그 때도 미국에 매달려 도와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중국이 우리 편을 들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우리만 더욱 고립될 것이고 비참해 질 것입니다. 미국은 당하고 펄펄 뛸 우리보고 자제하라고 하면서, 정치적 타협안을 내밀려고 할 것입니다. 강점한 일본은 어떤 경우라도 다시금 빼앗기려고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수단방법 안 가리고 사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각오 없이는 일을 저지르지 않을 터이니까요! 그러니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합니다.

   그렇다면 대책 방법이 무엇일까요? 있다면,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일본의 간계(奸計)를 무력화시키는 일입니다. 도저히 힘으로도 안 된다는 생각을 확실히 하게 만들면, 계산이 빠른 일본은 스스로 정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최고의 방법은 우리 남북이 어서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평화통일로 온전한 통일 한국을 만들어 세우는 일입니다. 통일 한국이 되면, 일본은 물론 미국과 중국 역시 우리를 지금처럼 얕잡아 보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일본은 한국은 무시하는 경향이 커도, 싸움에 강한 북한은 두려워하고 매우 긴장합니다. 독도에 대하여서도 우리 한국에 못지않게 북한이 일본의 침략 행위를 강력히 규탄하고 있는 모습은 그래서 다행스럽습니다. 국토에 대한 주인 의식을 북한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남북의 관계 회복과 평화통일의 길은 어떻게 뚫어 가면 될까요? 저는 그런 면에 정치나 외교 전문가가 아니지만, 그러나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이 제시하는 방법을 들어 그 대안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남북이 서로 만나 밥상을 나누는 일을 계속하면 됩니다. 무엇을 한다고요? 그래요. 서로 계속 만나 밥상 공동체를 만들어 가면, 모든 것이 풀리게 됩니다. 식탁을 계속 함께 나누면, 모든 것도 다 풀리고 마음의 거리도 얼마든지 좁혀집니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는 북한의 핵무기 해결되지 않으면, 관계 개선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는데---, 그것은 사실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북한이 애써 만든 핵무기를 충분한 보장도 없이 스스로 폐기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핵문제도 서로 만난 밥상을 계속 나누고 관계 개선을 해 나아가면, 그 위협은 자동적으로 해결될 일일 뿐입니다. 그때의 북한 핵은 한반도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강대국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는 안보용 무기가 될 것입니다. 특히 일본의 야심과 간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무기가 될 것입니다.

   마침 지금은 저 북한을 감동(感動)시킬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그들은 지금 엄청나게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굶주림에 허덕이기 때문입니다. 굶주림으로 수많은 동포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그러기에 지금이야말로 우리 측에서 식량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머잖아 그들의 모든 것들을 거저 사들여 올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 배부르게 한 그 힘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패륜적인 배신행위도 그 과정에서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결국은 기대 이상을 보상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부가 최근까지 북한에 식량지원의 행위를 일체 불허하고 반대한 일들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개신교에서 중국을 통하여 북한에 식량지원한 일을 두고, 정부가 방해하고 거부한 일은 매우 옹졸한 행위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경우를 보세요. 오늘 복음서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내용입니다. 소위 예수님이 당신의 말씀을 듣고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제자들이 가져 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표적 사건을 보고, 이성적 한계를 넘어 일어난 사건에 가능성에 의문을 표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우리가 관심해야 할 부분은 다른 데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당신 앞에 나온 모든 이들을 먹이시는 분이시다는 점입니다. 사실 주님은 이미 그들을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하늘의 영의 양식인 복음(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굶주린 영의 배를 넉넉히 채웠었기 때문에, 예수를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은 감동과 기쁨, 각성과 회개, 눈물과 결단 등으로 굶주렸던 내면의 속사람을 배불리었습니다. 영적 만나를 풍성히 취했습니다. 그 기쁨과 감격 때문에, 그들은 해가 질 때까지도 예수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먼 길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까지도 망각하고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믿음이 눈이 부족했던 제자들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때가 되어도 돌아가지 아니한 무리들의 식사 문제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에게 제의하였습니다. 이들의 끼니 해결을 위해, 그곳에 몰려 든 모든 사람들을 주변의 각 고을에 보내서 먹는 문제를 자체 해결하도록 하자고 건의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37절). 왜 그런 엄청난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주님의 요구에 화들짝 놀란 제자들이 200데나리온 어치가 될 먹거리를 그 시간 어디에 가서 사 먹일 것이냐며 예수께 반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그들에게 떡 몇 개가 있는 지 알아보라 지시하시고 오병이어가 있음이 보고되자, 그것을 받아 축사(祝辭)하신 후 정리되어 앉아 있는 모든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배불리 먹도록 나누어 주시고도, 무려 12광주리나 남은 풍족한 식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기에 모인 모두를 하나로 묶어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기도와 빵의 분배로 진행된 식탁을 앞으로 세계 교회가 전개할 성만찬 제정의 암시로 봅니다. 교회의 미래적 성만찬 축제를 제시한 신비의 급식(給食)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광야의 급식은 나중에 교회 공동체가 모이면 배불리 먹는 식사와도 연결되는 밑받침이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돌봄을 받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는 먹이시는 분이셨습니다. 영의 양식인 말씀으로 우리의 주린 심령을 먹이시는 분이시고, 육신의 궁핍과 핍절에도 동시에 해결책을 주셔서 먹이시는 분이셨습니다. 주님에게 구원은 그런 점에서 영적(靈的)인 것만은 아니었고, 인간들의 먹거리 문제를 통한 육체의 생명까지도 해결 해주시는 선한 목자이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약 왕상18장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먹이시는 구원(救援)의 역사가 어느 사람들에게 내리는 지에 대하여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음을 봅니다.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오병이어)를 갖고 최후의 식사를 한 후, 죽으려던 사르밧의 한 모자(母子)가 결국 그 흉년(凶年)이 가시기까지 먹거리 문제를 해결 받고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 그 여인은 하나님께서 살리고자 한 이유를 확실하게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향한 이 여인의 믿음은 당시의 그 어떠한 이스라엘 사람들 믿음보다도 훨씬 나았습니다. 본토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과 온 백성들이 지상의 축복이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니라 바알 신에 의한 것이라고 헛되이 믿고 있는 중인데, 놀랍게도 이 이방 여인은 그와는 전혀 다르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자기들을 살리는 신이시다고 믿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종과 국경을 넘어서, 그런 믿음의 소유자를 찾아서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그녀에게 직접 보내셨습니다.

- 그녀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내용을 확실히 받아들인 사람이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육체적인 먹을 것에 얽매이지 아니할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그런 모습은 선지자 엘리야가 그 마지막 식탁에 오른 떡을 ‘먼저 나에게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그러면 네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선지자의 요구(13-14)를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따른 데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녀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선(先) 하나님의 말씀, 후(後) 육신의 양식의 순을 고수하는 믿음의 주인공임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진리를 실천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런 믿음의 사람을 그냥 배고파 죽게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책임져 주시지요!

- 자기 필요한 바를 버리고, 예언자의 뜻을 따름으로서 그 여인은 엘리야를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능하게 한 위인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선지자의 요구를 거부하였다면, 그곳에서는 아무런 하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행6장의 기록 내용은 하늘과 땅의 양식들을 공급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 본문은 우리에게는 이 본문이 초대 교회 집사 선택의 자료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교회의 본질과 위기가 무엇인지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가 해결해야 했던 본질적인 사역들은 역시 모인 사람들을 먹이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먹였습니까?

   첫째 봉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를 동반한 말씀 봉사입니다. 기도 없이는 말씀 봉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호흡하고 그의 뜻과 의지를 받드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그러기에, 말씀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생명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묵상이 필요하며 연구가 필요합니다. 다듬고 정리할 내용들이 필요합니다. 말씀 봉사자들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칫하면 인격이 아닌 기능적인 인간이 되기가 쉽습니다. 자칫하면, 인간의 냄새만 가득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들이 죽어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일은 누가 맡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이었던 사도들의 몫이었습니다. 예수를 직접 경험한 이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의 교회는 이들의 말씀 봉사가 원활하도록 최대한 협력하고 도와야할 의무와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봉사는 바로 모여든 교우들에게 식사(食事)나 급식(給食)을 제공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몰려든 사람들에게 말씀과 함께 먹을 것을 제공하여 주셨듯이, 교회들도 이 급식 봉사가 매우 큰 사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급식 일도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이 맡았습니다. 사도들이 친히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을 먹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에 서서히 내부적인 부작용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두 가지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는 본의 아니게 급식에 누락된 사람들이 발생하게 되면서, 불평불만이 제기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 교포 계열의 과부들이 급식에서 빠지는 일이 생기자, 본토 출신인 히브리파 유대인들과의 차별 때문으로 보는 등의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면서, 교회는 급식 문제로 계파 갈등이 발생하였습니다. 실로 교회의 큰 위기였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더 큰 위기도 생겼습니다. 사도들이 그 급식 일에 매달리다보니, 말씀 봉사의 품질도 서서히 불량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시간도 부족하고 일에 매달리면서, 보다 양질의 말씀이 공급되지 못하고 메마른 내용들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큰 위기였습니다.

   그래서 빠른 수습책이 제시되었습니다. 그 수습책은 바로 역할 분담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오직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력하도록 하고, 평신도들 중에 능력 있는 이들을 세워서 그들이 급식과 구제 등의 봉사를 담당하도록 하는 등의 역할 분담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래서 급식을 맡아 봉사할 7집사들이 탄생하였습니다. 선출된 이들 모두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칭찬 듣는 헬라파 사람들(교포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으나, 봉사할 집사들은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이 각각 역할 분담하면서, 비로소 교회가 안정되고, 새롭게 부흥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개척 처음부터 말씀봉사와 급식봉사를 겸하여 지켜오고 있습니다. 저는 기도와 말씀봉사를 맡아오고 있고, 급식 봉사는 여러 장로-권사-집사들이 맡아서 봉사해 오고 있습니다. 그 어느 한쪽이라도 막히면, 교회는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모두 원활하면 형통(亨通)과 발전(發展)이 옵니다.

   이런 원리는 교회만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도 급식이 좋으면 평안할 것입니다. 요즈음의 편의주의 때문에, 가족들의 공동식사가 무너진 것은 매우 위험한 일들입니다. 공동식탁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습니다. 굶는 사람들이 없어야 합니다. 적어도 먹는 문제로 차별 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지금 서울시의 어린이 무상 급식문제가 화두입니다. 성서적인 선택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부모의 소득 격차를 문제로 하여, 어린이들 세계에 까지 급식의 차별을 두는 일은 분명히 반 성서적입니다. 주님은 당신 앞에 모여 온 모든 무리들을 어른 아이, 빈부 격차 등의 차별 없이 먹이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일꾼들을 앞세워 그들을 먹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남북의 급식 문제들이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 줄 요체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먹이는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잘 먹이는 공동체 되도록 기도합시다. 내부적인 것을 넘어, 세상과 민족을 먹이는 보육과 평화 공동체를 견인하는 공동체로 발전하도록 기도합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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