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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 해석

김석태 (경기노회,필리핀 선교사,목사) 2011-08-30 (화) 10:42 10년전 26318  

2011. 08. 28. 06 : 30 필리핀 선교사 김석태 목사

제목 : 우리 성도가 져야 할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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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말씀하셨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로서 신앙 생활의 기본 자세임을 말씀하셨다. 그러기에 그 누구도 여기에 이유를 제기 해서는 않 되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한 제자만이 아니라. 12 제자를 앞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들었던 마태, 마가, 누가의 세 제자가 복음서에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런데 우리가 이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 하는 점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렇다고 우리 인간 자신이 마음대로 풀어야 할 말씀은 아니라고 본다. 주님의 마음과 뜻을 통하여 풀어야 할 과제다. 지금까지 우리는 [ 자기 십자가 ] 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가 ? 우리의 실체를 진솔하게 생각하여 보았으면 한다.

1.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여 왔는 가 ?

우리는 이 질문을 간과 하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전제 조건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십자가가 없이 빈 몸으로 주님을 따른다면, 주님과 상관 없는 자가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비록 제자 만이 아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사도의 직분을 계승하고 있다는 목사나 선교사에게 만, 국한 되는 말씀도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이다. 그러기에 마태는 [ 제자들에게 ] 라고 기록하였고, 마가는 [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 하였으며, 누가는 [ 무리에게 이르시되 ]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 할 점은, 마태는 오직 제자만을 언급하였고, 누가는 오직 무리만 언급 하였으며, 마가는 무리와 제자들 둘을 대상으로 언급하였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직분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주어지는 조건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자, 예수님을 따를 자는 누구든지 [ 자기 십자가 ]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져야 할 [ 자기 십자가 ] 는 어떤 십자가 일가 ? 여기에 우리 성도는 의견이 분분 함을 알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강단에서 증거 하는 우리 목회자 역시 그러 함을 부인 할 수 없다. 나 역시 목회자의 길을 40 여년간 걸어 왔지만, 빼 놓지 않는 다.

나도 이제야 이 문제를 마음속에 되 세기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33 년의 목회 생활을 해 왔으나, 건강의 쇠약함 때문에 33 년의 목회 생활을 접고, 약 3 년을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목사가 되었고, 경기 노회로부터 목사 안수와 더불어 필리핀 선교사로 파송 받아, 선교 사역을 하던 중에 교통 사고로 33 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경기 노회로부터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김대진 선교사의 사역지인 필리핀을 전 가족과 더불어 부끄럽지만, 선교 사역을 하여 오고 있다. 그러나 선교 사역 5 년에 갑자기 위암 3 기 진단을 받고, 위 제거 수술을 받아 온지 1년이 지나간 중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예배 시간에 평신도 자리에서 말씀을 듣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나는 목사로서 평신도의 자리에 앉아, 나의 지난, 목회 생활이 얼마나, 실수와 맹점이 많았던가를 실감할수 있었다. 그 중의 하나 예를 든다면, 오늘 이 말씀이기도 하다. [ 자기 십자가 ] 이 한 가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채, 목회 인생을 마감하는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참으로 어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와 같은 실수가, 우리 동역자와 성도들에게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려고 한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또한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께서 이 부문에 대하여 아주 강도 높은 말씀으로 경고 하신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참으로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목사나, 선교사나, 평신도도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말씀이다. 이는 [ 하고, 안하고 ]의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필수적이다.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않될 것이다. 반드시 [ 내가 져야 할 십자가 ]를 이해하고 알아야 할 것이며, 그리고 [ 자기 십자가 ]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 자기 십자가 ]를 어떻게 이해하여 왔던가 ?부터 생각하여 보았으면 한다.

우리는 십자가가 나에게 고통과, 눈물과, 근심의 상징으로 여겨 온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십자가가 떠 오르고, 십자가를 고백하게 된다. 고통과 근심과 눈물을 나에게 안겨주는 대상이 누구 일가 ? 남편과, 아내요, 부모와 자녀라고 생각한다. 왜 일가 ? 가장 가까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으로 인하여 제일 많이 가슴 아파하고 눈물을 많이 흘리기 때문이다.

가족이 바로 눈물 줄기요, 근심 덩어리이며, 가슴 잃이요, 십자가의 요소이다. 누가 무엇이 그토록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던가 ? 그러기에 주님은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는 그 누구도 부인 못할 일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자식이 원수라고 하며, 아내 남편을 향하여 원수라는 독설을 퍼 붇는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 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는 바로 자기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이라 여기며 살아간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의 현 주소라 여길 수 있다. 물론 이것 만은 아니다. 가난, 실패, 환난과 곤고함, 역경과 좌절 등, 수많은 증거들을 제시 할 수 있겠다. 진실로 나에게 눈물을 자아 내게 하고, 통곡의 눈물을 흘리게 하며, 내 마음과 인생을 실족케 하는 불행과 눈물의 씨앗들은 [ 자기가 지고 가는 십자가 ]라고 손 쉽게 정의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주님께서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라고 말씀 하셨을 가 ? 이미 자기 십자가가 다 지워져 있는 데.... 이것을 강조하여 말씀 하실 필요가 없지 않은 가 ? 더구나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 이 말씀이 필요 없지 않은 가 ?

예수님의 말씀을 비추어 볼 때, 분명 이는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할 [ 자기 십자가 ] 는 도대체 어느 십자가 일가 ? 이 문제를 확실하게 터득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의미부터 생각하여 보았으면 한다.

2.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인가 ?

오늘은 십자가가 영광의 상징이요, 자랑의 상징이며,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한 십자가가 고상하고 우아함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금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닌다. 그러나 사실은 십자가는 그렇게 영광이고, 자랑 할만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극악 무도한 죄수를 사형에 처하는 형틀이었기 때문이다.

살인자, 강도,등 인륜을 배반한 인생을 처형하는 형틀이었기에, 십자가는 수치와 모멸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뒤안길을 살펴 보면, 십자가는 보기도 소름끼치는 물건이요, 십자가가 내게 찾아 올가 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형틀이다. 만일 가족이나 자기 문벌 중에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있다면, 고개를 떨구고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흉한 도구 이다.

그런데 이런 모형을 금으로 만들어 부끄럼 없이 목에 걸고 다닌다. 참으로 아이러니칼 한 모습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가 ? 그런데 예수님은 이 당시 이 험한 [ 자기 십자가 ]를 지라 하신다. 진실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면, 어떠한 십자가 일 가 ? 죽음의 십자가 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죄인이요,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는 [ 처형의 십자가 ] [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 가 분명하다. 예수님이 죄가 전혀 없으셨으나, 남의 죄 즉, 우리 인간의 죄를 담당하셨을 때는, 우리 주님도 십자가에 잔혹하게 죽으셔야만 하셨다. 그렇다면, 나 자신의 사형에 해당한 죄를 갖고 있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찾는 다면, 어떠한 십자가 일가 ? 금덩어리 십자가 일가 ? 아니다. 참혹한 죽음의 십자가 일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지라하신 자기 십자가는 어떠한 십자가 일가 ?

3.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어느 십자가 일가 ?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가 달라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십자가가 치욕과 모욕, 그리고 저주의 상징이 아니라, 이미 영광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그 고상한 남녀의 목에 십자가가 걸려 있다. 또한 십자가는 생명을 죽이는 사형의 틀이었지만, 이제는 생명을 살려 내는 상징의 표시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 내는 병원의 표시가 십자가요, 난민들을 도와 주는 선행 기구의 표시가 십자가이다.

이는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다 그렇게 알고 사용한다. 전쟁터에도 십자가 달고 들어 가면, 적군 아군 상관 없이 다 허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적십자에게는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 내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십자가의 의미가 이렇게 달라 질수 있었을가 ?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고통과, 형벌과, 치욕의 십자가를 지시고, 온 인류를 살려 내는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죄와 사망에서 살려 내신 일을 십자가에서 완수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십자가는 상관 없는 것 아닌가 ? 죄와 사망의 문제를 십자가로 해결 하셨다면, 구태여 십자가를 져야 할 필요성이 무엇인가 ? 왜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셨을 가 ?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이 지라고 말씀하신 [ 자기 십자가 ] 에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않될 것이다.

나도 지난 33 년의 목회와 선교사 5 년의 세월을 보내며, 잘못된 인식의 십자가를 강요 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야 깨달았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분명 새롭게 주어졌다. 이는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가 오늘날 영광의 십자가, 최상의 십자가가 된 것 처럼,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도 분명 새로 주셨다. 그 십자가는 바로 [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십자가 ]이다.

예수님은 사망의 대상이 되는, 죄의 십자가를 지라 하신 것이 아니다. 그 십자가는 주님이 지어 주셨다. 주님은 저주와 사망의 십자가 대신,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십자가로 바꾸어 놓으신 것이다. 이 십자가가 바로 우리 인생이 필히 져야 할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물론 우리에게는 분명 죽을 맛나게 하는 죄와, 고통과, 근심과, 눈물의 십자가가 지워져있다. 사람들은 이 십자가 까닭에 불행에 승복하며 자살로 자기 인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돌이켜 보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설교를 하며, 살길을 제시하여 준다고 [ 자기 십자가 ]를 지라 강요하였다. 남편의 십자가, 아들의 십자가, 부모의 십자가, 원수의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지라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성도는, 세상 생활고에서 시달리고, 지쳐 교회를 찾아 온 몸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짐을 덜어 주기보다, 나는 더 큰 짐과 고통을 지워주는 격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어 기진맥진 한 모습으로 교회당을 찾아 왔건만, 목사인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며, 그 모든 무거운 짐을 지라고 육박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살 길이라 한다. 얼마나 어리석고 무식한 나의 모습이었는 지 모른다. 이런 생활이 40여년의 생활이었다. 그리고 성역 40 년이라 말할수 있을 가 ? 참으로 부끄럽기 한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져야 할 [ 자기 십자가 ]를 정확하게 이해 하였으면 한다. 물론 우리에게는 죽음의 십자가가 지워져 있다. 참으로 죽음을 탐 할 정도로, 큰 십자가를 지고 몸부림치고 있다. 주님은 이 십자가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니라고 하신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주님이 갈보리산 언덕에 온 인류를 위하여 지고 죽었던 십자가를, 바꾸어 세워 놓으신 십자가 일지니,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십자가이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지면 질수록, 주님께서 말씀하심과 같이 쉼을 얻게 될 것이다. 참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한번 지금 즉시 시험 해 보시라 ! 어떤 십자가가 나를 결박하여, 죽음의 고통 속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저를 살려야 하겠다는 심정으로 [ 사랑, 용서, 구원의 십자가 ]를 마음으로 져 보라 !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이 십자가가 우리 인생에게 복음이 된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초대교회 시대에 여기에 대한, 첫 열매로 보여 준 것이, 스테반 집사의 순교 모습이다. 초대교회 시대는 무서운 박해 시대였다. 스테반 집사는 참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알고 보면, 스테반 집사는 선을 베풀고,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선행을 하였으나, 감사하기보다, 선을 악으로 갚으며, 돌을 들어 쳐 죽이는 것이었다. 그들의 던지는 돌이 몸에 와 닿을 때 마다, 몸은 부스러지고 유혈이 낭자 하였다.

팔에 맞으면 팔의 뼈가 부스러지면서, 살이 찟겨져 유혈이 낭자한다. 가슴에 맞았을 때 갈비 뼈들이 부러지면서 간과 심장을 터트렸다. 머리에 맞음으로 골통이 깨져 골수가 흘러 나온다. 이 십자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가 ? 그 누가 이런 십자가를 인내하며 질수 있을가 ? 스테반 집사도 인간으로서는, 인내라는 단어로 견딜수도 없었을 것이고, 이 고통의 십자가를 결코 질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테반 집사는 그 고통 중에서도, 넉넉히, 가볍게 질수 있었다. 이는 그의 모습에서 알수가 있다. 스테반 집사의 마지막 순교의 장면이 사도행전 7 장에 소개되고 있다. 스테반 집사는 공회 의원들과 대제사장 앞에서 설교를 하였다. 이때 스테반의 모습은 성령이 충만한 모습이라고 사도행전 7 장 55 절에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스테반 집사는 울분에 처한자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돌에 맞아 숨을 거두며 하는 말이 [ 주 예수여 !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하였다.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어찌 그 억울함과, 고통 중에서 이렇게 할 수가 있었을가 ? 이 모진 고통의 십자가 짐을 졌으나, 스테반 집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 자기의 십자가 ]로 발견하였으니,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십자가로 바꾸어 졌기 때문이다. 주님은 바로 이 십자가를 지라하신다. 이때 만이 고통의 십자가를 영광의 십자가로 바꾸어 놓는 기적을 만들고, 체험하게 될 것이다.

고통의 십자가, 형벌의 십자가, 죄와 사망의 십자가는 이미 우리 주님께서 져 주시고, 완전히 해결하여 주셨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십자가를 내 십자가라 하며 져야 한다면,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무익 할 따름이다.

내가 지고 있는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 위에, 남편, 아내, 자녀, 부모,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를.... 그리고 세상으로 부터 밀려 오는 그 무거운 해변의 모래수 같은 십자가들을 내가 담당하며 질수 있을 가 ?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분명 우리가 그런 일들을 능히 감당 할수 있는 길이 있으니, 우리 주님께서 갈보리 언덕에 새롭게 바꾸어 놓으신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받아 들여 지게 될 때 감당치 못할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지고 있는 십자가가 있다. 죽고 싶을 정도로 무거운 십자가이다. 그런데 그 위에 다른 사람의 십자가, 세상의 십자가를 겹쳐 지라한다면, 어떻게 감당 할 것인가 ? 그러나 내가 남편과 아내의 미움, 원망, 증오로 죽게 된 지경에 이르러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세워 주신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십자가를 지게 된다면, 아주 가볍고, 기쁜 마음으로 지게 될수있다.

그렇게 나에게 아픔과 고통과 실망을 주는 남편을 보면서, 주님앞에 나를 세우고 보는 것이다. 나는 남편 보다 더 추하고 악한 모습이다. 악으로 꽉차있다. 주님 앞에서 전혀 가치를 찾을수 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나를 위해서 주님이 형벌을 감수하셨다. 나를 위해서 그 고귀한 피를 흘려 주셨고,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셨다.

그렇다면 나는 남편을 사랑하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은 가 ? 이 큰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나도 저를 사랑해야지 ! 내가 주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았으니, 나도 저를 용서 할수 밖에 없지 ! 주님이 지옥의 땔감 같은 검불에 지나지 않는 이 인생을, 사망에서 옮겨 구원하여 주셨으니, 나의 남편도 구원을 받게 해야 하지 !

이렇게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십자가를 보면서 져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이 [ 사랑과, 용서와, 구원 ]의십자가를 질 때 만이, 우리는 모든 일을 감당할수가 있고, 어떤 어려운 문제도 기쁨으로 감수 할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감당할수 없는 큰 사랑을 받은 체험과 깨달음이 없이는 남을 사랑 할수 없고, 내가 엄청난 실수와, 허물과, 죄악에서 용서함을 받은 경험과 깨달음이 없이는 남의 허물을 용서 할 수가 없으며,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사경에서 구원 받은 확신과 깨달음이 없이는 남을 죽음의 자리에서 구원해 낼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경험하고 체험하며, 깨달은 사실이 있을 때,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사랑하며 용서하며 구원에 최선을 다 하려는 사람이 될수 있다. 사랑하려고 노력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 진다. 내가 용서를 하려고 몸부림 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용서가 성취되는 것이며, 구원을 하고 축복을 베풀려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앙갚음 대신 축복의 기도가 마음 속 깊은 데서 솟구쳐 나오는 것을 체험 할 것이다. 그러기에 [ 자기 십자가 ]를 지고 제자로 따르려는 무리를 향하여 주님은 말씀 하셨다.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 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누가 감히 이일을 감당 할 수가 있을 가 ? 불가능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말씀을 허공을 치는 말씀으로 주셨을 가 ? 아니라고 본다. 분명한 것은 나도 할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노라면,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새롭게 새워 놓으신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십자가를 바라 보노라면, 우리는 할수 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보잘것 없는 여자의 말에도 오금을 조리며, 예수님 면전에서 부인하고 욕하고 저주하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갈보리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삼아 졌을 때, 어떠한 핍박과 환난을 감수 함은 물론 십자가의 억울한 처형에서, 오히려 자신을 거꾸로 달아 죽여 달라고 자원하게 되었다. 왜 였을가 ? 주님이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 주셨는데, 어찌 내가 주님처럼 죽을 수가 있을 가 ? 나를 거꾸로 못박아 주시오. 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성정이 같은 인생으로서, 범인과 동일하게 분노와 원망과 원수 갚음, 그리고 죽도록 미워하며 증오를 품을 감정을 갖게 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억지나 부득이 함으로가 아니라, 기쁨과 영광으로, 자연히 마음의 얼음덩이 같은 자신의 마음을 녹아 내리고 훈훈한 봄날을 맞이한 감정이 꽃처럼 피어 나게 됨을 경험 할 것이다. 고통과 형벌과 저주의 십자가는 우리가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대신 져 주신 일이다. 우리는 주님이 세워 놓으신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이다.

[ 자기 십자가 ]를 져라 ! 우리가 져야 할 [ 자기 십자가 ]는 [ 주님의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십자가 ] 이다.

2011. 08. 30.

김석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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