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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을 내자의 덫

이선규 (서울남노회,대림다문화센터,목사) 2011-09-01 (목) 17:33 12년전 3649  

 “이름을 내자”의 덫에 걸렸다.
  
  우리는 이름에 의해 물체(物體)의 전존재(傳存在)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어린 양’ ‘사자’(使者) 하면 그 이름이 곧 그 특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성호는 하나님의 위격과 특성 전부를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그리스도라는 이름역시 구세주의 모든 특성과 인격, 사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 때문에 자녀에게 이름을 함부로 지어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때로는 작명소를 찾아 이름을 지어 주기도 하는데 본인도 교우들의 자녀가 태어나면 그 이름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그 이름을 통하여 자녀의 위상을 높이고 이름값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름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야생 동물의 삶을 보여 주고 있는 동물의 세계프로 그램에서도 야생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어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착한 사람은 생명나무 열매를 맺지만 남을 괴롭히는 사람은 생명을 잃는다.
또한 착한 사람을 이야기 할 때는 반드시 빠뜨리지 않고 상대 적으로 악한 사람이 등장 한다.

 악한 사람은 그 오명을 남기며 생명을 잃고 그의 등불은 꺼지며 스스로의 악행으로 망하게 된다. (명심보감)
여기 한 구절을 옮기어 본다.

격양시(擊壤時)에  운 평생(云平生)에 부작(不作) 추미사(皺眉事) 면 세상에 응 무 절치인 (應武切齒)人)이라 대명(大名)이 기 유 전 완 석(豈有)鐫)頑石)가 로상 행인이구승비(路上行 인이口勝)碑)니라 “평생토록 눈썹 찌푸릴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 이를 갈 사람은 없다.  큰 이름을 어찌 무딘 돌에 새길 것인가? 길가는 사람의 입이 비석 보다 낫다.

남들이 눈썹 찌푸릴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이 그대에게 이를 갈 수 있겠는가.

그대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입을 통하여 그대가 좋은 일을 한 사람인 것을 전해지게 하라는 뜻으로 이해를 한다. 

욕심을 없게 하기는 쉬우나 이름 내려는 마음을 없애기는 어렵다.
중국 송나라 때 저작물로 알려진 ‘경행 록’중 한 구절이다.

선현들의 세상살이 지혜가 오롯이 담긴 이 명현 집은 명심보감 등에도 인용되면서 현재까지도 후 새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새삼 어려운 고문(古文) 을 찾아 여기에 기록 하는 것은 요즘 돌아가는 상황에 교훈을 주는듯 하여서 이다.

오세훈 서울 시장이 ‘무상 급식’ 주민 투표를 끝으로 시장 직에서 물러났다 서울 ‘한강 르네상스’등 그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정책의 향배가 어찌될지 안중에나 있었을까 싶다.

 오직 그의 이름 석 자에 명운을 걸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에 맞서 보편적 복지 논쟁을 일으켰던 곽 노현 서울시 교육감도 사퇴 위기에 직면 하고 있다. ‘선의’라고 해명 했지만 후보 단일화 대상이 됐던 인물에게 2억 원이나 증여한 것은 개운 치 않다.

아이들의 밥상을 지키겠다며 싸웠던 그의 신념과 주장이 한 순간에 무색케 하는 일이다. 
 유독 사람은 ‘이름을 내려는 마음’ 이 강한가 보다. 그 이름을 위해 자신을 다잡고 일생을  걸고 뛰었을 테다. 하지만 이름을 죽이는 것도 바로 이름 내려고 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500억 원이 넘는 세금을 들여 다시 보궐 선거를 치러야 할 서울 시민의 한 사람 으로서 이름만 드높이려는 자들을 구분 할 지혜를 선현의 지혜가 아쉽기만 하다
사도행전 9:36-43절에 보면 정말 이름처럼 살다간 한 여성도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도르가 이다.  그 이름의 뜻은 귀엽다 아름답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여인은 그 이름답게 당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지위 높은 사람 가진 자, 힘 있는 자, 에게 빌붙어 그 이 권을 얻어 보려는 자들 가운데 이 여인은 만은 작은 자를 찾아보았다고 성서는 기록 하고 있다.

예수 당시에 사람들이 그를 몰라 본 것은 저들의 눈이 작아서가 아니라 너무 컸기 때문이다. 위대하고 영웅적인 데가 있어야 하고 메시야라고 하는 예수가 저들의 눈에는 예수가 바로 보여 질 리 없다. 
 
그런데 도르가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잘 찾아내어 돌아보았다고 하니 그 이름값을 한 셈이다.   고아와, 과부, 병자와 빈민은 너무 그 존재가 미미해서 보통 사람의 눈에는 뜨이지도 않는 인생 부스러기들 이었지만 그의 눈은 이 작은 부스러기 들을 찾아 낸 것이었다.
 
 예수의 눈은 작은 것을 보시는 눈이다. 큰 것에만 눈이 팔리는 자는 아직 예수의 눈을 갖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본인을 위시해서 작은 것은 눈에 안 보이고 모두가 큰 것에만 눈이 쏠려 있다는데  있다.

 교계에서 내 노라 하는 분들도  요즘 돌아가는 현실을 보면 그 들 의 누이 어디 에 쏠려있나 궁금하기만 하다. 성직자라는 이름값이라도 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면 부끄러움 이 앞선다. 도르가와 같은 그 이름과 같이 작은 자를 돌아보는 한국 교회와 자신이 되기를 소원해 본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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