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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빚지지 말고...

김승환 (강원노회,생명,목사) 2011-12-11 (일) 20:21 12년전 3260  

믿음으로, 빚 지지 말고...
(합 2:1-4, 롬 13:8)


할렐루야! 한 주간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방금 우리가 부른 찬송 309장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한 뒤, 지금 큰 비 소리가 들리니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라고 하는 대목과 관련된 찬송입니다. 2절에, “주 내게 약속한 큰 비 내려주시려 은혜의 저 구름 건너편에 떠올라 그 귀한 징조가 내게 밝히 보이니 나 힘을 다하여 주께 간구합니다” 하였는데, 그렇지요?

사실 그때까지 엘리야가 인간적으로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과 대결해서 승리하였지만, 850대 1입니다. 그 당시 영적 판도를 보여주는 비율인데, 시대 전체가 우상을 섬겼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또 어디 노골적으로 우상을 섬기나요? 겉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우상을 섬기는거지요. 광야에서 금송아지 섬기듯이 말입니다. 왜 우상을 섬겼을까요? 그쪽이 그럴듯해 보이거든요. 쉽고, 달콤하고, “부자 되세요”, “이렇게 하면 복 받습니다” 그러는데, 아닌 게 아니라 삐까번쩍하거든요. 그래 너도 나도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우상 쪽으로 붙었는데, 특히 권력층에서 그랬지요. 하여, 아합왕과 페니키아 출신 왕비 이세벨 주변에 이런 종교장사꾼들이 득실거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호와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은 정말로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요새 말로 비주류로 밀려난 거지요. 이럴 때, 이게 아니다, 이 길은 멸망의 길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이렇게 외치는 게 쉬웠겠습니까? 외로웠겠지요. 누가 제대로 사례비라도 챙겨드렸겠습니까? 별로 없었을 거예요. 저쪽에는 사람이 넘치고 돈이 넘치지만, 이쪽은 사람도 없고 돈도 없어요. 이게 뭡니까? 까마귀가 날라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시냇물을 마시며 살았다잖아요. 또 사르밧의 가난한 과부한테서 얻어 먹었다잖아요.

참으로 외롭고, 궁색맞지만, 그러나 이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랬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관점을 바꿔 엘리야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요?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아, 이 세상 사람들 다 날 몰라줘도 하나님은 나를 기억해주시는구나, 하나님은 바보가 아니라 불꽃같은 눈으로 이 세상을 감찰하시고 낮은 나를 바라보사 자비와 긍휼로, 전능하신 능력으로 함께해주시는구나, 그런 것이 느껴지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요?

그런 감사 감격 속에서 엘리야는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활동하는 중에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아세라 선지자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 승리를 거두었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비가 내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3년 반 동안 계속된 가뭄을 끝낼 비, 말하자면 기갈에 지친 백성들의 마음 속에 구체적인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이 도루묵으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진리가 밥먹여줘? 정의? 한가한 소리하네. 비가 와야지, 먹고 살 희망이 보여야지...그럴 것 아니겠어요?

그때 이미 엘리야는 큰 비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여 사환에게 말합니다.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아무것도 없는데요” “또 올라가 봐라”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러기를 일곱 번 했습니다. 일곱 번째 이르러서 사환이 말합니다.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의 기쁨은 또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주셔서 큰 비 소리를 듣게 하시긴 했지만, 엘리야도 사람이잖아요. 정말 비가 올까? 의심했기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엘리야는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면 그랬겠습니까? 그 간절함 저와 여러분이 어느 만큼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럴 때에 “바다에서 사람 손 바닥 만한 구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라는 보고가 주는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걸어가는 하나님의 종이지만, 증거가 보이기 시작할 때의 기쁨은 더욱 더 가슴 벅차고 감사한 것이지요.

찬송가 해설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사람의 마음은 다 비슷합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때로 힘들고, 말씀대로 산다고 하지만 때로 번민하고 의기소침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손바닥만한 희망의 증거라도 보고 싶어 목이 마릅니다.

오늘 구약본문의 하박국 선지자도 그랬어요. 이분에게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아니었습니까? 물어도 물어도 들어도 들어도 시원치 않아 그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 2:1)

여호와께서 대답하십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2-4)

여러분,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하박국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가 어떤 표징, 어떤 증거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기쁨은 엘리야가 바다에서 손바닥만한 구름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 못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가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하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백성들이 누리게 되는 소망이요 기쁨인 줄 믿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 보이고 모두가 돌아앉은 것 같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계시고, 그분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며 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당신의 나라를 향하여 정상적으로 굴러가도록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당신의 종들을 깨우시고, 도전하시고 고뇌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온 맘 다해 당신의 이름으로 일어서서, 오직 그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으로, 도무지 그 신비를 이해하기 어려운 비전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면, 길지 않은 우리 교회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은혜를 누리면서 오늘에 이른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겉모습이 어떠하건, 교인수가 얼마고 예산이 얼마고 에배당 건물이 어떻고 교회의 공간적인 위치가 어떻건간에, 우리 역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안에서 고비고비를 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실수가 없지 않았으나 깨달으며 왔고, 문제가 끊이지 않았으나 문제 속에서 씨름하며 들려주시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쳐왔으며, 정말로 많은 시간 동안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믿고 믿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때론 그 증거를 보는 감격도 없지 않았습니다. 크지 않아도, 비록 손바닥만한 구름조각을 보면서, 아, “주 내게 약속한 큰 비 내려주시려 은혜의 저구름 건너편에 떠올라 그 귀한 징조가 내게 밝히 보이니 나 힘을 다하여 주께 간구합니다”, 찬송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을 여러분도 어느 정도는 아십니다. 집주인과 등기문제, 공간문제, 닭장 이전문제로 인하여 많은 갈등을 겪었는데, 처음에 계약할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였습니다.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알 수 없는 게, 처음에는 그렇게 좋은 분위기로 출발했는데 이해관계가 얽히니까 보통 험악해지는 게 아니더라구요. 나중에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되더라구요. 언성을 높이고, 가슴을 치고....여러분에게 다 애기를 안 했지만, 제일 힘든 게 닭장 문제였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입장에서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일방적으로 닭장을 옮겼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교회 코앞에다가 닭장을 옮기는데 사전에 아무런 상의를 하지 않은 것이 너무도 괘씸했습니다. 또 닭장 관리를 제대로 못해 밖으로 쏟아져나온 닭들이 길이며 교회 문 앞을 완전히 장악하고 도처에 똥을 갈기고, 막 이럴 때는 얼마나 격하게 분노가 일어나는지, 안 되겠다, 순리로 안 되니 법적으로 대응하자, 그래서 그 모든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자료를 확보해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럴수록 마음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주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 의지해서 그분과 같이 기도도 한 적이 있거든요. 세상 사람들 하는 방법대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건 절대로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령. 순리로 해결이 안 되어 우리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세상방법을 동원해서 이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끝까지 견디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지 않습니까? 곧 주님 자신이기도 합니다. 법대로 하면 주님이 우리를 얼마든지 심판하고 죽일 수 있었지만, 오히려 주님이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당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죽으셨지 않습니까? 그래, 교회가 참는 게 맞다, 그래, 종인 내가 좀 바보가 되는 게 맞다, 결국은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했지요. 그리고는 끓어오르는 분노만큼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참 이상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분이 밉지 않아졌습니다. 오히려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습니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 골짜기가 이런 복된 터전이 되도록 기도하면서 개척의 길을 걸어온 그분이 참으로 귀하고 고마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기도하는데, 차츰 닭장관리도 잘 하는 것 같았고, 닭들이 문앞에 똥싸놓는 일도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또 그런 중에 어린이집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추수감사주일예배를 드렸는데, 떡과 과일을 갖다 드렸습니다. 원장인 아내가 쟁반에 담아 들고 가고, 저도 동행을 했지요. 가서 정중하게, 정말로 마음속으로 고마워하면서, 갖다드렸지요. 순간, 그분도 감동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틀림없이 그분도 그 동안 많이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랬을 것 같은데, 그분이 그러시더라구요. “죄송합니다!” 그 동안 한 번도 그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거든요. “고마워요. 잘 먹을께요”.....그렇게 화해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나서 어느 주일 새벽이었습니다. 제단에 향내 그윽한 난이 봉헌되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이 되던지요. 아,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이렇게 은혜를 받는구나! 하나님께 바친 꽃이지만, 오히려 제 영혼이 온통 그 향기로 은은하게 젖어들었습니다. 지금도 제 안에 어디에선가 향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감동적인 간증거리에 이 일도 포함되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나중에 교회역사를 쓸 때 이 일을 기록해야 할 것 같아요.

이것 말고 또 많은 간증거리들이 있습니다만, 이 모든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더욱 더 믿음으로 살아야겠다, 더욱 더 말씀대로 살아야겠다, 그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살아가니 이렇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이렇게 기쁘고 이렇게 아름다운 일들이 펼쳐지는데, 이제 더더욱 저 푸른 은혜의 바다로 마음껏 노를 저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걱정할 이유가 없고, 욕심낼 이유가 없고, 서두를 이유가 없고, 억지스럽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렇게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데, 또 무슨 빚질 일이 있겠습니까? 정 어려우면 빚을 져야 할 상황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권고하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생활원칙에 관한 말씀입니다. 복음의 토대 위에서 이런 자신감으로 살자, 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랑하시고,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도우시고, 이렇게 역사를 주관하시는데 무엇 때문에 억지스럽게 빚을 지느냐 이겁니다.

일반적으로 왜 빚을 집니까? 조급하기 때문입니다. 바닥부터 하면 너무 늦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기반을 잡아 경쟁에서 앞서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녀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이 주지 않으실지는 모르나, 내게 꼭 필요한 만큼은 언제나 늘 채워주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무 어렵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없지 않겠지만, 그때도 비관하지 말고 차분하게 맞이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 우리는 그분의 자녀 아닙니까? 이 기본적인 사실을 여러분 굳게 믿으면 다 이겨낼 수 있어요. 빨리 뭘 이루려는 생각을 버리고, 하루하루를 즐기고 배우려는 마음으로 맞이한다면, 정말로 우리는 빚지지 않고 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돌아보니, 감사하게도 그 동안의 역사 속에서 우리 교회도 누구에게 빚을 지지 않았습니다. 교인도 많지 않고, 별별 일이 다 있었어도 어쨌든 누구에게 돈 빌려달라고 궁한 소리 않고 오늘까지 왔습니다. 여기저기서, 여러 분들이 헌금을 보내주기는 하셨어도, 우리가 도와달라고 손을 벌린 적은 없습니다.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물론, 작 년에 땅 사는 문제로 좀 시험에 들기는 했습니다. 합병되기 이전 저쪽 교회의 전세보증금 5,000만원으로 어서 속히 땅을 사든지 건물을 임대하든지 하라는 압박을 받으면서, 좀 무리를 해서라도 땅을 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우들의 균형감각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만, 이제 지난 일을 돌이켜보고, 요즘 성경을 새롭게 읽어나가면서 더더욱 그런 확신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무엇 때문에 빚을 지면서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한 걸음씩 가면 되는 것입니다. 바닥부터 차근차근 다져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이런대로, 저러면 저런대로, 과정을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아니겠는지요?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굳게 설 수 있거니와, 은혜의 저 구름 건너편에 떠올라 그 귀한 징조가 내게 밝히 보이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억지스럽게 쥐어짜가면서 산다는 말입니까? 하루하루, 은혜가 족한 줄 알고 감사하면서 살 일입니다. 아무에게 아무 빚도 지지 말고, 단정하게 주 예수 그리스로 옷 입고 다만 사랑하며 살 일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억지스럽게 빚을 내서 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만, 교우 여러분도 각자의 생활 속에서 이렇게 내실을 이루어가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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