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목회자강단시리즈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2-02-21 (화) 21:26 12년전 2711  

고난의 역사를 통해서만                                    마가복음 _?xml_: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8:29-35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고난에는 자신과 자기의 가정을 위한 고난, 즉 고생, 자기의 사회나 나라, 동족들을 위한 순국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생이나 순국적인 고난을 넘어 하나님의 인류구원을 위한 대속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애를,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바치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인간과 세계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화가 난 일단의 무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시위하는 이야기가 모르간의 저서 (Robert C. Morgan, Life High Cros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5)에 나옵니다. 사람들이 지상에 살던 일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데모였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 세상을 얼마나 아십니까? 아니 무엇을 아십니까? 심판을 하시려거든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내려 오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가난하게 사는지, 또 고통은 얼마나 당하며 사는지 알아보십시오. 소수종족으로 힘센 나라 주 백성인 백인들에게 얼마나 미움과 차별을 받으며 힘든 일은 다 맡아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항의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슴을 쪼개며 앓고 있는 일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고 계십니까?

그때 다른 한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이들은 좀 낫겠지,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쪽의 아우성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고난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이 정말 우리 하나님이십니까? 저희가 하나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 모른 체 하셨습니다. 아들과 딸들의 일로 탄식할 때에도 별로 들어 주시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심한 병으로 앓고, 사람들이 배신으로 괴로워 할 때, 심지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생할 때에도 별 도움을 주시지 않고, 간절히 기도해도 잘 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던 사람들이든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이든 그들의 화, 불평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때 만약 우리가, 아니 내가 그들 속에 끼어 있었다면 불평하는 자들을 꾸짖었을까? 아니면 우리 자신도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나 화를 터뜨리며 시위에 가담 했을까? 아마 우리 각자는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감사보다는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을 털어 놓을지 모릅니다. 사랑하고 믿는 사이에 섭섭함이 더 있기에, 그런 불만 불평 등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추앙 받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가 야곱 사도와 함께 나귀 수레를 타고 순례의 길을 나설 때의 이야기입니다. 시골 길로 들어서 개천을 건널 때, 나귀가 잘못 건너는 바람에 성녀는 개천 바닥으로 떨어져 꼴이 우습게 됐습니다. 물속에서 일어나던 그녀는 하늘을 쳐다보며 화가 나 투덜거렸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친구 대접이 겨우 이 꼴입니까? 때문에 당신께는 그렇게 친구가 적단 말이에요! 테레사 성녀는 그 후 일생 동안 후회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오랜 신앙생활을 한 믿음 있는 성도들 중에도 이런 정도의 경험은 다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느 나라의 왕이 학자들에게 인류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책을 써 오라 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가져온 책들은 다 두툼 했습니다. 왕은 너무 부피가 크다며 줄이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간추려 가져 왔습니다. 아직도 부피가 컸습니다. 왕의 간청에 그들은 삼차, 사차, 줄이더니 마침내 단 한 줄의 글을 써 왔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를 단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결국 고난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바로 왕 앞으로 데려가 소개할 때, 바로가 야곱에게 네 나이가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야곱의 대답이 인상 깊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생활이 130년이니이다. 조상의 나그네 길에 비하면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47:7-9). 130년도 짧았다면서 그 세월의 인생여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험악한 세월이었다는 것입니다. 남달리 욕심도 많고 하나님의 복을 탐하여, 아버지와 형제까지 속이며 복을 가로채고,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자기를 축복하지 않으면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며 새벽까지 버티기도 하던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벌써 130세가 되어 지팡이를 의지하고 아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살아온 한 생을 회고하며 짧고도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확실히 인생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까지도 고난이 아닐 수 없다는 듯 합니다. 지금까지 얼마를 살았든,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그 동안의 세월을 요약 한다면 야곱의 고난에 찬 한 생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런 고난에 찬 인생의 그나마 남은 여생도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아직 철이 덜 든 때엔 세상의 일들은 물론 우리자신의 운명도 우리가 조종할 수 있다고 자신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 우리의 생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조종되지 않으며, 신체 일부의 살덩어리 하나도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의의 차사고, 이유 모를 질병의 엄습, 한밤이나 백주 어느 순간의 세상일들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을 일깨웁니다. 우리로서는 그것들을 조종하고 다룰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그분이 계시되, 아주 멀리 높이만 아니라, 내 주변과 내 속까지 아주 가까이 계심을 알게 합니다. 이런 것은 다 고난을 통해 깨닫게 되며, 이웃이나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한 관심도 진지하게 가지도록 만듭니다.

 

이름도 꽤 알려진 어느 내과의사의 이야기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이따금 소화가 잘되지 않고 배 한쪽이 아프다는 말을 부인에게 하기도 했습니다. 과로나 신경을 너무 썼기 때문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종합진단을 미루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통증이 심하고 구토가 나 다른 친구 의사에게 진단을 부탁했습니다. 사진도 찍고 이상히 여긴 친구의사가 좀더 자세히 검진한 후 간암이라는 것입니다. 비로소 병으로 누워 있는 동안 그는 그 동안의 신앙과 인생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고, 환자를 보았지만 직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어려운 교우들에 대한 생각, 기도나 예배 드리는 자세도 진지해지고, 교회 일이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이웃들에 대해서, 교회 지도자나 신도들의 경조사를 위해서도 기도하며, 자기가 가끔이나마 도울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시간과 물질과 몸을 내는 데까지 기쁨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목사님에게 고백했습니다. 그 동안 너무 무심했고 헛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몸은 불편하지만 오히려 지금은 마음이 기쁘고, 교우나 이웃, 친구들을 만나도 더 반갑고, 진심으로 대하고 싶습니다 고 한 것입니다. 고맙게도 지금은 많은 치유의 진전이 있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열심히 기도하고 기쁜 나날을 살고 있습니다.

확실히 고난은 인생을 진실하게 하고, --신을 맑게 하며, 이웃에 눈뜨게 하고, 하나님 교회에 대해서도 새롭게 봉헌 봉사하게 함을 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고난을 통해서 영적 능력을 얻고 자신의 생애를 승리로 이끌었던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전시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고난이 있고 누구나 그런 고난을 예외 없이 당하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 예수님에게도 고난이 그치지 않았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이런 고난에서 제외 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중요한 것은 고난을 힘들고 두려운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바로 터득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리나 신앙의 깊은 체험은 다 이런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참으로 고난 없이는 의미 있는 역사나 하나님의 뜻, 그 무엇도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가, 마태, 누가 복음에 의하면, 예루살렘을 향해가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로마관원들의 손에 죽을 것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죽은 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듭 세 번이나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반복하며 주지시켰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발적이거나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미리 아시고 선택한 고난이요, 모든 것을 아시며, 굳게 결심하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고난의 죽음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의 일부로서 일어난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은 당위적이요,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 길만이 생명의 길이요, 허물 많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경륜이나 예수의 고난을 이해 못한 베드로는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이를 만류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던 베드로요, 예수님은 그를 향해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노라. 죽음의 권세가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 할 것이다 하던 제자입니다. 이런 그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면서 책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은 이 고난을 통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까, 어떻습니까? 고난이 싫어 회피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우리 아닙니까? 하나님의 고난을 통한 인류구원의 섭리 같은 것엔 아랑곳 없이, 그저 복이나 받겠다는 오늘의 한국교회요, 그리스도인들 아닌가요! 세속적 성공과 성장 신화에 사로잡혀 그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며 나오지 못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어떤가요? 베드로를 사탄이라 책망하던 예수님은 오늘의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은 질타와 심판을 하시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은 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 살며,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고 참 생명으로 인도하기에 우리는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 허물 많은 인간에게 끊임없는 사랑으로 온갖 선물을 다 주십니다. 그러나 이 선물은 고난을 통하여 주고, 우리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고난을 통해서 더 깊어 집니다. 랍비 시메온 벤 야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세 가지 선물을 주셨다며, 율법의 토라와 이스라엘의 땅과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나라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선물을 고난 없이는 받을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깨닫고, 믿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성자 버나드(Bernard)가 가슴을 치며 탄식했다는 말은 아직도 우리마음을 두드리는 듯 합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려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나는 어찌하여 쾌락만을 즐기고 있는가? 어찌 쾌락만이겠습니까! 나를 위해 주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고 있음에도, 나는 무심하고, 외면하고, 딴전 피우고, 무감각 등 아직도 자기밖에 모르고 있지 않은가요!

참으로 고난 없이는 의미 있는 역사나 하나님의 뜻, 그 무엇도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고난의 쓴 잔을 면해보려 했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기쁘게 받겠다며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베드로나 바울 등의 사도들이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민족의 지도자 모세, 대선지 이사야, 예레미야, 엘리야 등 그들은 다 스스로 고난을 자청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며 고난의 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들을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로 기억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안에 있는 여러분! 꼭 깨닫고 기억할 것은, 오늘도 변함없이 여전히 이 고난의 역사를 통해서만, 개인이나 가정, 사회나 나라가 바로 세워지고 인류구원의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어둠과 죄악으로 찬 이 세계가 아직도 이만한 질서가 유지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뜻을 이루어 보겠다는 교회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아직도 이땅에 존재하는 것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으며, 우리 모두 고난의 역사의 대열에 굳건히 서시기를 바랍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