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목회자 강단시리즈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2-03-17 (토) 08:20 12년전 3115  

오직 성실함으로                                                잠언 3: 1- 10

Let Be Only Faithful                                      디모데전서 1: 12- 17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지혜의 왕 솔로몬은, 그에게 마지막 결정적인 소원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21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 임금이 된 솔로몬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한가지의 소원을 요청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실로 솔로몬의 지혜는 고명한 것으로, 그는 초기 유대문학과 후기 이스라엘의 지혜문학 전통에 가장 많이 연관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7년에 걸쳐 부왕 다윗이 준비하였던 건축자재로 성전건축을 완성시켰습니다. 그 후 13년에 걸쳐서 왕궁을 건축하였습니다. 20여 년 동안을 건축을 한 셈이니 위대한 건축가라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구하는 중에 부귀도, 영화도, 장수도, 그리고 군사의 힘도 아니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그는 지혜를 구할 줄 아는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전무후무한 지혜의 왕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는 일,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고, 지혜로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그는 전쟁 없이 지혜로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면서 40여 년의 왕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많아 세상을 떠나게 될 때가 임박했을 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성실(sincerity, faithful)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입에서 허탄한 말을 하지 않게 해 주세요. 죽기 전에 이 소원을 이루어 주세요. 이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을 잠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뢰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_?xml_: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3:5-6).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7절 이하에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언 3:7-10).

사실 솔로몬 제국은 교역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확보했고, 군사적으로 협조관계를 주변국들과 잘 유지했습니다. 솔로몬은 어떤 나라들과는 결혼을 통하여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외국인 아내들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에서 멀어지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사후에 나라가 분열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청년의 때의 솔로몬의 소원은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끝낼 때의 그의 소원은 성실이었습니다.

진실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 때, 진실이 가장 귀한 것임을 깨달을 때 비로서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진실하기 위해서 애써 본 사람이 아니면 진실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모릅니다. 진실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진실이 가장 귀하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이보다 큰 보화도 없고, 이보다 큰 영광도 없고, 진실보다 무서운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이웃에 대하여 진실하고, 자기자신에 대하여 진실한 사람보다 더 큰 영광과 지혜와 보화는 없다는 말입니다.

신약 본문에 충성이란 말이 나옵니다. 공동번역에는 성실함으로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라고 바울은 말씀했습니다. 이 충성이란 헬라 원문에는 (faithful, piston) 진실, 성실, 충성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중심에 있는 진실을 보십니다.

한국판 테레사 서서평 선교사를 기억하시나요! 재미동포 양국조씨가 <조선을 섬긴 행복-서서평의 사랑과 인생>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엘리제 쉐핑 이야기>를 펴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의 내한 100돌을 맞아 그를 기리는 두 권의 평전을 출간했습니다. 성녀 테레사 수녀(1910-97)는 동유럽의 세르비아에서 태어나 18살에 수녀회에 입회 한데 이어 1930년 인도의 빈민가로 파견돼 버려진 채 죽어가던 사람들을 돌봤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도의 권위지가 인도인 5만 명을 대상으로, 간디를 제외하고 역대 위대한 인도인이 누구냐고 물은 설문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도인으로 꼽혔습니다.

엘리제 셰핑(1880-1934), 한국 이름으로 서서평 선교사는 독일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사로 지내던 중 개신교에 투신해 테레사 수녀보다 18년 앞선 1912 3월 조선 선교사로 파견됐습니다. 그는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이일학교 (한일장신대 전신)와 여성운동의 산실인 부인 조력회와 조선 여성 절제회, 조선 간호부회 (대한 간호협회 전신), 여전도회 연합회 등을 창설해 이 땅의 여성운동과 간호계, 그리고 개신교에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업적들 만으로 그를 제대로 알긴 어렵습니다.

그는 전라도 일대의 나환우들과 걸인들을 돌보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한 집에서 살다가 이 땅에서 병들어 생을 마쳤고, 자신의 주검마저 송두리째 병원에 기증하고 떠났습니다. 광주시에서 최초로 시민 사회장으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엔 수많은 나환우와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뒤 따르면서 어머니라 부르며 애도했습니다.

서서평이 활동하던 광주, 전남은 1930년도에, 45만 가구 220만 인구 가운데 굶주리는 인구가 무려 88만 명, 걸인이 1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서서평은 1년 가운데 100일 정도 나귀를 타고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전도여행을 다니며 병자들을 돌보고 여성들을 교육시켰습니다. 서서평의 당시 일기엔 한달 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고 있거나 병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고 시대 상황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서서평은 당시 이름조차 없이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어멈 등으로 불리던 조선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고, 자존 감을 살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농촌으로 가서 매년 3-4만여 명의 여성들을 교육시켜 존중 받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일깨웠습니다.

그는 한 나환우가 역시 나환우였던 아내가 죽자, 병든 자신이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버리려던 아이를 데려다 양아들로 삼은 것을 비롯해 버려진 아이 14명을 양아들, 양딸로 삼았습니다. 소박 맞거나 오 갈데 없는 미망인 38명도 데려와 한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1926년 이 땅의 한 매체는 서서평 인터뷰 기사에서 그를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고 이름다움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단련된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썼습니다. 서서평이 별세하자 선교사 동료들은 그를 한국의 메리 슬레서라고 추모했습니다. 메리 슬레서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가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다 숨져 아프리카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된 인물입니다.

1930년대 미국 장로회는 전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서서평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으로 선정했습니다.

서서평의 부음을 듣고 그의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 밑에 걸려 있던 좌우명을 보았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우리가 반드시 그를 회상해야 할 교훈적인 것은, 미국에서 온 초기 선교사들이 학교와 고아원을 세워 좋은 일을 많이 했지요.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미국식 삶을 고수했고, 조선인과 같이 된장국 먹고 고무신 신고 함께 자며 사는 서서평 같은 인물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와 하나가 되고 스킨십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외국으로 파송 된 2만 여명의 한인 선교사 가운데 상당수가 제3 세계에 가서도 자녀교육 등을 위해 주요도시에 머물며 살고있고, 정작 필요한 곳에 들어가 현지인들과 함께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평전의 저자는 필엮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공감을 갖게 합니다. 서서평 선교사의 현지민 위주로의 성공지향의 삶보다는 섬김의 거룩한 삶은 선교사의 귀한 하나의 귀감이  된다 하겠습니다.

다시 신약의 본문을 말씀하신 바울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수십년간 율법을

배워왔고, 율법을 믿어 왔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하는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진실하고 충성을 다해 살았습니다. 전에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지식과 가문, 자기의 믿음과 율법에의 확신, 그의 과거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3). 바울은 깨끗이 자기를 부정했고, 채면이고 뭐고 하나도 뒤돌아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깨닫는 대로 꼭 실천하여 행동으로 옮기는데도 진실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방금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채포하기에 분망했던 그가 변화 받고 다메섹에 들어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도하는 진실함의 용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 고 고백합니다. 부끄럽지만 그는 과거를 숨기지 않고 과거를 인정하는 성실이 있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솔직함과 진실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는 이중적 자아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았고, 그는 복음을 전할 때에 때로는 억지로 마지 못해 전했다는 솔직함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미래에 대하여도 성실했습니다. 앞에 순교가 있든지 어떤 비참한 핍박이 있든지 그대로 받아 들이는 성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라고 하나님께와 모든 성도들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주변과 나라는 어떠합니까?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그리스도 중심의 바른 삶의 가치관을 꼭 정립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부정직함과 비리를 반드시 청산하고, 오직 성실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고질적 병폐인 한탕주의, 돈과 명예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몰 양심적인 탐욕 등을 멀리 떨처 버려야 합니다. 정직과 성실이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의 정신적 기틀이 되고, 그래서 양심이 회복되고 도덕이 회복되고 신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남북관계의 개선을 중요시 하는 남북이 서로 인내와 진실, 성실하게 임해 가야 합니다. 남과 북은 상생의 원리에 신실해야 합니다. 북한의 국가주의는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보게 합니다만, 남한의 개인주의는 이기적이며 탐욕적인데 이를 과감히 청산해야 합니다. 남북을 이어줄 매개체로 코이노니아(교제, 사귐)으로 고난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민족 동질성 회복에 주력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보다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하여 삶의 모든 면에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게 되든 어떠한 생각과 생의 자세를 가지고 사는가가 중요함을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자신의 유익이나 복리가 아니라 오직 남을 위한 관심과 삶이 예수님의 기본적인 생의 정신입니다. 이 남을 위함에는 불행하고 어려운 이웃과 세상이 다 포함됩니다. 일찍이 본회퍼 목사가 성숙한 이 시대에 모든 전제를 빼고, 예수님을 현대인에게 무엇이라 가르칠 것인가 물으면서 오직 남을 위한 존재라 했듯이,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남과 세상을 위한 존재로 성실히 진실히 살 수만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 신자만이 아니라 주님의 몸 된 땅 위의 신앙공동체인 교회도 스스로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불행과 고난의 세계를 위한 존재이기에, 오직 고난의 세계를 위해 예수님의 생과 같이 자기를 희생하며 세상의 십자가를 친히 지고 살며 봉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우리의 시대는 이러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순절 절기에 생각합니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고난을 견디고 남으로써 생명은 일단의 진화를 합니다. 핍박을 받음으로 대적을 포용하는 관대가 생기고, 궁핍과 형벌을 참음으로 자유와 고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닥쳐올 때 사람은 사탄의 적수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친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이 주는 손해와 아픔은 한 때이나, 그것이 주는 보람과 뜻은 영원한 것입니다. 개인에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입니다. 고난은 인생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입니다. 사순절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