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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기도에 대하여

김석태 (경기노회,필리핀 선교사,목사) 2012-12-03 (월) 23:23 11년전 12642  
 
2012. 12. 02. : 필리핀 선교사 김석태 목사
 
제목 : 방언의 기도에 대하여
 
 
본문 : 고전 12:4-11.
 
 
방언은 성령님의 아홉 가지 은사 중에 하나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은사란 말은 달란트란 의미로 해석도 하지만, 하나님의 선물 중에 하나란 해석도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에는 삼십 수 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으나,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고린도 전서를 통해 9 가지이다. 이는 성령의 은사 9 가지를 고린도 전서 12:4-11 절에 말씀을 열거 하고 있다.
 
고전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고전 12: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고전 12: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 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 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 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방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같은 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이다. 성령의 은사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 등 9 가지의 은사를 말씀하고 있는데, 이 모든 은사는 같은 한 성령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은사임을 선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는 유득이 부정적이고, 비판의 소지가 많은 것을 알수 있다.
 
이는 우리가 반성 할 일이 있다. 왜 우리는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부정적일 가 ? 이는 방언의 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라고 말할수 있겠다. 오늘도 우리 교회에 성도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가 많이 있다. 또한 교역자들 역시 마찬 가지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많은 성도들 가운데는 방언의 무용론과 비판이 많기에 방언을 받고도 사용치 않을 뿐 더러, 방언 받은 것을 부끄러워 하고, 방언 받은 것을 숨기는 성도가 많이 있다.
 
심지어는 성령의 은사인 방언의 은사를 잘 가르쳐 주고, 잘 활용토록 해 주어야 할, 우리 교역자들 가운데도 이러한 예를 부인 할 수가 없다. 방언의 은사를 소홀히 여기게 하는 경우이다. 방언의 은사는 부흥회나 어떤 성회를 갖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 보며, 호기심을 갖게 되는 데, 호기심을 만족시키게 하는 1회 용품과 같다 할 정도이다.
 
나도 한번 방언의 은사를 받아 보았으면,... 하고, 방언을 받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 부르짓고, 몸부림도 쳐 본적이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니 모태적부터 어머님을 통해 교회당을 출입하게 된 자였다. 그래서 어려서 교회당을 출입하게 되었는 데, 교회에서 행사처럼 1 년에 한번씩 부흥회를 하게 되면, 이런 유혹을 받게 되었다.
 
목적과 의미도 깨닫지 못한 체, 단지 호기심에서 방언 받기를 사모한적이 있었다. 그래서 방언을 받기 위하여 몸부림을 쳐 보았다. 목이 꽉 잠겨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소리쳐 보기도 하였다. 이는 장차 자라서 신학을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서도 그 호기심을 뿌리치지 못하였다. 부흥 성회에 참석하다 보면, 이 유혹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도 방언이 입에서 터져 나오지 않을 때, 그 허탈감과 실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다가 수일 아니면, 몇 년 후에 방언을 받게 되면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그런데 이 기쁨은 얼마 가지 아니한다. 그렇게 힘써 받은 방언의 은사는 실종하게 된다. 그래서 방언을 방치하여 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반성할 일은 진실로 방언은 우리가 무관심하며 방치 해 버릴 정도로 그렇게 값싼 은사일가 ? 하는 점이다.
 
내가 전도사 시절이었다. 지방 시골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내가 섬기고 있던 교회에서 부흥 성회를 열고 있을 때 이웃 선배 목사님이 함께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 분은 참으로 내가 존경하고, 우리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하셨고, 우리 교단 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 교계에 큰 영향을 주고 하늘 나라에 가신 분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 계신다. 그런데 목사님은 내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부흥 성회를 열고 있을 때, 오셔서 방언의 은사를 받기 사모하셨다. 어린 아이 같은 심정으로 구하였을 때 방언의 은사가 터졌다. 너무도 기뻐하고 감사하였다. 그러나 나를 조용히 불러 이렇게 말씀했다. [ 김전도사 ! 그 누구에게든지 절대로 나 방언 받었다고 말 하지마 ! ] 하며, 부탁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켜 왔다. 왜 그러셨을 가 ? 그렇게 사모하여 받은 은사를, 왜 꺼려 하였을 가 ? 방언의 은사를 받고 그렇게 기뻐하면서도, 왜 남이 알기를 두려워 하였을 가 ? 그 당시에 방언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 경향이 매우 컷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 받은 사실이 남에게 알려 지기를 꺼려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 가지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알고보면 방언의 은사를 방치하고 무용지물로 생각하는 성도가 많이 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방언의 무용론을 주장하기 까지 하는 분들이 많음을 쉽게 발견할수 있다.
 
나는 이런 경험을 갖고 있다. 어려서 교회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되면, 방언 받기를 그렇게 사모하였던 기억이 난다. 성도들이 여기 저기서 방언이 터지며,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을 때, 나도 방언을 받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잊지 못한다. 있는 힘을 다하여 목소리를 내고 몸부림도 쳐보았으나, 나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그 답답한 마음은 표현 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마치던 해였다. 나는 겨울철에 장질부사란 질병에 걸려 고생하고, 사경을 헤메인 적이 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골 농촌 지역에서 장질부사에 걸리게 되면, 노약자는 사망하는 예가 허다하였다.
 
나 역시 가난한 생활에 병원에는 가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집에서 자연 치료만을 소망하며 투병 생활을 할 뿐이었다. 몸은 고열에 시달려야 했고 식사도 아마 거의 한 달을 먹지 못한 기억이 난다. 그래서 머리 카락은 다 빠져 새 새끼란 별명으로 친구들의 놀림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학을 졸업하게 되었을 때, 친구들은 나에게 새 어미란 이름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나에게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었다. 장질부사로 견델수 없는 고열의 고통이 계속되는 데, 우연히 나의 입에서 헛 소리 같이, 내가 알아 듣지 못하는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때 여러 날 아프고, 먹지 못해 힘도 없었다. 나는 병석에 누어 지내고 있었는 데, 알아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로 내 입가에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 말도 갖고 일본 말도 같았다.
 
그러자 어머님은 이 모습을 보시고 이제는 헛 소리를 한다하시며, 매우 슬퍼하셨다. 이제 내가 죽을 것으로 염려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우시며 이렇게 말씀 하시는 것이었다. [ 제발 죽지말고 살아만 다오. 네가 다시 일어나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네 소원을 들어 주마 ! 중학교에 반드시 다니도록 해 주마 ! ]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울고 집안 일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머님이 헛소리를 한다 하시며 슬퍼하시기에, 그 헛소리를 낼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헛소리라면, 정신 줄을 놓아서 나오는 소리로서 정신을 잃은 상태가 되어야 할 터인데, 나는 정신이 온전하였다. 나는 힘없이 그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흘러 나올 때, 왠지 마음이 평안하며 고통은 사라지고 체온은 정상적이었다. 왜냐하면 두통이 사라지고, 열기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님의 근심을 덜기 위해 속으로 만 하다가, 어머님이 밖에 나가시면, 그 소리로 흥얼 거리게 되었다. 이는 경험 해 본 자만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 헛 소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나는 어머님의 말씀이 헛 소리라 하셨기에, 헛 소리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것이 방언의 은사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기도하다가 교회당에서 받게 된 소리가 아니라, 투병 생활에 내 집, 내 안방에서 병석 중에 내 입에서 흘러 나온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을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목회를 시작한지 4~5 년이 되기까지 나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옥구 수산교회를 전도사로서 전담 목회를 하고 있을 때, 부흥 강사를 모시고 집회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많은 성도들 만이 아니라, 교회학교 어린이들 15 명 정도가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된 것이다. 이웃 교회의 목사님도 오셔서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 그런데 나만 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답답한 나머지 강사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하였다. 방언 은사를 받기 소원하니, 방언 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좀 특별히 기도를 해 달라고요.... 그리고 나는 통성 기도 시간에 있는 힘을 다하여 부르짖었다. 몸부림도 쳤다. 그러나 내 마음은 더욱 맨송 맨송 할 뿐 방언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받지도 않은 방언의 은사는 내게서 더더욱 멀리 사라져 가는 느낌 뿐이었다.
 
그러자 강사님은 통성 기도 시간에 나에게 다가 오셔서 손을 얹으면서 호통을 치셨다. 하나님은 방언의 은사를 일찍이 주셨는 데, 왜 방언을 하지 않고 있었느냐 ? 는 것이었다. 나는 더더욱 답답하였다. 나는 방언 은사를 받은 적이 없는 데, 언제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는 것일 가 ? 이젠 의심까지 일어나고, 반감이 생기는 것이었다.
 
강사님은 혀를 성령님께 맡기고 혀가 돌아 가는 데로 하라는 것이었다. 방언이 목에 까지 차서 입에 나오는 데, 왜 거부하느냐 ? 는 책망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손을 얹고, 몸 부림을 치며 기도해주시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집회가 끝났다. 그리고 사석에서 강사님은 나를 불러 말씀해 주시는 것이었다. 전도사님께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목에 까지 차있는 데, 내가 거부하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너무 답답하였다. 나는 방언 받기를 소원하였을 뿐 거부한 적이 없었다. 이제 나는 결심을 하였다. 기도시간에 혀가 돌아 가는 데로 성령님께 맡기자 ! 그리고 다음 시간에 기도를 하는 데, 옛날 내가 어린 시절 장질부사를 앓고 있을 때, 헛 소리 하던 그 헛 소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그 헛 소리를 차단 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습관성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강사님은 나에게 다가와 안수하시며, 방언을 주셨는 데, 순종하지 않고, 무슨 방언을 또 달라 하느냐 ? 혀 하나도 성령님께 맡기지 못하는 자가 무슨 은혜를 받겠다고 하느냐 ? 당신 혀 바닥부터 하나님께 맡길 줄 아는 자가 되라고 호통을 치셨다. 나는 참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낮 집회를 마치고 강사님을 찾아 상담을 하였다.
 
나는 방언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혀를 맡기고 혀가 돌아가는 대로 소리를 내라니요 ? 나는 강사님께 상담을 했다. 내가 옛날 투병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했던 헛 소리가 나올 뿐입니다 하며, 헛 소리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헛 소리를 내 드렸다. 그러자 이게 성령님께서 일찍이 나에게 주신 방언이라 하며 교회당에 가서 그 방언을 계속 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혼자 성전에 엎드려 그 헛소리를 내기 시작 하였더니, 이때 회개 역사가 일어나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케 되었다.
 
이때가 바로 이종민 목사가 미국에 가기 전에, 내가 시무하고 있던 옥구 수산 교회에 사모님과 함께 방문하였던 때였다. 나의 이 모습을 본 이종민 목사는 나의 아내에게 달려가 말하기를 [ 사모님 ! 지금 김전도사 날리 났어 ! 교회에 가봐 ! ]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들 기뻐해 주었다.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이때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였는 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방언의 은사를 일찍이 주셨으나, 깨닫지 못하였다. 그 방언 기도를 하게 하시며 나의 질병을 치료하여 주셨으나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약 20 여년을 방치해 두었던 것이다. 헛 소리로 간주해 왔던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미련한 인생인지 ? 그런데 기억 할 일이 있다.
 
나는 이렇게 목마른 사슴이 시넷물을 찾듯 방언 은사를 20 여년이 넘게 갈망하여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되었는 데, 얼마 안가서 방언 은사를 필요 없는 고물처럼 또 다시 방치 해 버린 것이다.방언 은사를 받고 깨달은 그 순간 만, 반짝 기뻐하였을 뿐 방언의 은사를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방언의 기도를 하다 보니, 내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 긴 시간 앉아서 방언 기도는 하게 되었지만, 내가 무슨 기도를 하였는 지 ? 지금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 지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리고 주변 목사님들의 모습을 볼 때, 방언을 무시하는 경향이 많은 것이었다. 그래서 방언을 숨기며 방언을 금하는 것이었다. 성경 말씀을 보니 방언의 무위성에 대하여 부정적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방언이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가 되었다.
 
고전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전 14: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고전 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 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 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자들을 위함이니
고전 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성경은 방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강하게 비쳐졌다. 그래서 나는 1 개월도 못가서 방언을 접기로 하였다. 이로부터 수년이 흘렀다. 목사가 되고서도 역시 방언을 하지 않았다. 이제 방언을 완전히 잊은 듯 하였다. 그런데 또 다시 부흥 사경회시에 성령의 은사론에 대하여 공부를 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 데. 방언의 은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 가를 재 인식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방언이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인가를 뒤 늦게 깨닫게 되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로서 그 무엇과 바꿀수 없는 은사임을 마음에 자각하게 되었다. 하나님 주신 선물을 내가 어찌 소홀히 여길수 있을 가 ? 정말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것이 사실이 아니 가 ? 하는 각성이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니,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부정적 견해가 아니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의 말씀이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의 말을 누구보다 더 많이 하고 있음을 표현 하면서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리고 방언을 금하지 말라 고 명령하고 있다.
 
고전 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 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그리고 방언의 유익과 방언을 잘 사용하는 방법 등 다양한 유익함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고린도 전서 14 장의 말씀을 깊이 묵상 해 보았으면 한다. 방언은 성령의 9 가지 은사 중의 하나이다. 은사는 선물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그렇게 우리가 무시할 정도로 필요 없는 것일가 ?
 
그것도 성령께서 주시는 9 가지 선물 중에 하나인데, 우리가 무시할 정도로 값싼 선물일가 ? 반문 해 볼 일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 먹고 주시는 은사이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무시하거나 없인 여김을 받을 그 정도의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미련하여 깨닫지 못할 뿐이다.
 
어린 아이는 돈과 보석의 가치를 모르기에 다이아 몬드 10 캬렛 짜리를 모래나 돌처럼 여기고 값싼 장난감과 쉽게 바꾸게 된다. 어린 아이는 1 조원의 수표일지라도, 휴지처럼 생각하고 찟을 뿐이다. 바로 우리가 이와 같은 모습일 뿐이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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