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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문동수 (경기노회,밀알교회,목사) 2013-02-23 (토) 09:59 11년전 2774  
은사
 
                     - 한맘교회 문동수 목사(경주)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개역개정)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내심은 유익을 위한(향한) 것이라.(사역)
 
오늘은 은사에 관해 그동안 생각했던 것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은사에 관해 관심이 많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은사, 공 잘 차는 은사, 공부 잘하는 은사, 등등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것이 과연 은사가 맞나하는 생각을 아주 오랫동안 했습니다. 재주는 재주니까 은사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것들이 성령과 관련지어서 은사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은 문제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더 있는데, 방언과 예언, 병 고치는 은사, 등등의 것들은 성령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입니다. 이 문제는 한국교회의 뜨거운 감자 같은 것이어서 누구도 쉽사리 말을 하기 어렵습니다.
 
성경 번역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늘 그렇듯이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라, 표현에 유의하지 않으면 잘 못 읽기 십상입니다. 오늘의 말씀도 그 중 하나입니다. “하려 하심이라는 번역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하나님에게 목적이 있을 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가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은 유익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유익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공동 이익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저는 이 번역은 좋은 번역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앞에 공동이라는 말을 붙였어도, 유익과 이익은 서로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이라는 말을 아무리 잘 보아준다고 하더라도 이 말 안에는 본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포함되어 있는 한 공동이라는 말은 무가치한 개념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 본인에게 유익이 되게 하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본연의 모습입니다. 그곳에 자신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유익이라는 말 안에는 자신 또는 본인은 항상 빠져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유익에서는 자신은 항상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입장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유익을 위해 십자가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상이 보는 관점에서는 유익을 위해 허무로 빠져 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익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항상 이 유익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과 같은 사역에 동참시키는 역동적인 힘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무언가를 잘 하는 능력이 성령이 주시는 것이 맞나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잘하는 능력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위해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상에서 잘하는 재주나 능력은 각자가 처해진 상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처해진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삶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은사는 사실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12장에서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바울의 어법을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 알다시피 각종 은사 때문에 문제가 많던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게 쓰는 바울의 논조를 먼저 읽어내야 합니다.
 
먼저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알기 원한다고 서두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은사는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종 은사를 말하는데, 은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몸이라는 유비를 통해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은사에 관해 아주 대못을 박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실 더 큰 은사, 더 작은 은사 이런 것은 애초에 없습니다. 은사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뿐인 은사인 사랑에 이르도록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공 잘 차는 것도 좋습니다. 공을 못 차도 좋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거나 못 그리거나, 노래를 잘 하거나 못하거나, 공부를 잘 하거나 못하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인 사랑으로 이끌기 위해 고도의 화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라는 말을 원어로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선물 또는 은혜입니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둘을 주시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날마다 부어 주십니다.
 
공 잘 차고, 음악을 잘 하고, 공부를 잘하고, 등등의 재주들이 사랑에 쓰이면 감사합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 고치는 재주들이 사랑에 쓰이면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반대로 공을 못 차는 것이, 음악을 못하고 공부를 못하는 것이 사랑하는데 쓰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사랑은 아닙니다. 사실, 내가 지닌 재주들이 사랑을 나타내는 데, 쓰이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항상 그 자리입니다. 영원합니다.
 
자 무엇이 성령이 주는 것이고, 무엇이 세상이 주는 것인지, 나머지는 각자가 열심히 고민하고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디 사랑인 성령의 은사를 향하여 직접 대면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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