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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찬가5 - 목마른 사슴같이,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13-09-17 (화) 09:52 10년전 4832  
 
1. 갈급한 심령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이다.
낙타가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가 아니다.
타는 목마름을 해결해야 하고 생존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물 없이 사오일 아니 그 이상도 넉넉히 견딘다는 낙타가 아니다.
 
목마른 사슴은 지금 갈급하다.
사슴은 지금 목마름 속에서 시냇물을 찾기에 절박하다.
이 시인은 이러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기에 갈급하다고 하였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지 못하면 생존에까지 위험이 있다.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라 시냇물을 찾지 못하면 목마름과 갈증 그리고 죽음까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42:1)
 
2. 생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말씀하시고 들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생존하신다. 그 교통으로 우리는 영혼의 소성과 생명을 유지한다.그리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살아계신다.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에서 우리는 그 분의 영원하신 존재 생존을 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 없는 하나님이 주신 이름아닌 이름이다.부를 때마다 새롭게 그 의미를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믿는자는 내적 외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경험하게 하여야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할 상황이니 시인 자신의 영혼은 탄식하며 갈망한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42:2)
 
3.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계시다고 하는가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으라고 하는가
인생 누구나 이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 있겠는가
 
네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물음은 한 편으로 일리가 있다
보이지도 않은 하나님을 계시다고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리석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악수하고 포옹이라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내 영혼의 갈급함이 채워지므로 하나님의 계심을 알 수 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어떻게 증거하느냐
하나님이 개인에 자연에 역사에 나타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내적 외적 채우심과 도우심을 주시면 이제 분명히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시인은 내적으로 채워지고 외적으로 보여주시어 하나님 존재를 분명히 알게 해 주시기를 갈망한다.
 
이방인 불신자의 비웃음에 마음이 아프다. 신앙의 이 시인은 눈물로 가득하다.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하는 비웃음의 말에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42:3)
 
4. 나를 기억하라.
현재의 만족치 못함의 상태에서 성일을 기억하며 마음이 상하도다라고 하였다.
마음은 원이로되 형편 사정이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가진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세파에 시달리며 여러 도전되는 많은 내적 외적 문제들을 겪으며 영적 침체 신앙의 퇴보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성회 때의 그 뜨거웠던 신앙을 회상하며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속이 상하며 탄식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신앙이 뜨거웠던 그 때 그 시절을 그리며.. 그 때는 하나의 연극이었던가. 마음이 상한다고까지 하였다.
 
또한 과거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신앙 이탈자의 회고일 수 도 있을 것이다.
한 때는 나도 신앙에 열열하였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신앙이 지금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지금 이제 나는 옥토 아닌 박토가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거에 받은 은혜를  기억함으로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기억케 하며 하나님과 계속 사랑의 관계를 갖는 언약의 이행의 날이다,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현재화하면 모든 염려 걱정 근심으로 부터 자유이다.
이제는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모든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축제를 즐길 수 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42:4)
 
5. 하나님을 바라라
낙망하는 것 하나님을 기대하며 바라는 것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내가 선택하여야 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42:5)
                                             
                                                                                        
                                                                                        하나님을 바라며
                                                                                        성광교회 이동원 목사 드림
 
 
= 역사신학 외
하나님께서는 이세상의 인간 역사를 어느 정도 관여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역사를 운영 경영 관리 (providence, management, administration, operation,orchestrating) 하신다면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이겠는가,
 
모든 것을 관여 운행하시면 인간은 자유없는 로벗 기계가 된다. 인간 의지로 그 무엇도 할 필요가 없다. 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하시니까,
 
우리의 계획과 의지 힘으로 다하여야 한다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는 없는 것이 되는가,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모든 것을 다 하고 하나님께서는 보고만 계시며 돌보심과 도우심  개입이 없는 것인가, 이것 역시 맞지 않다.
 
그러면 어느정도까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이것은 인류사 이래 계속 있을 수 있는 질문이다,
행27장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가시는가 하는 것을 잘 알수 있다. 여기에 답을 주는 내용이다.
 
14일간 하나님의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지 않았다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은 광풍의 바다 상황이었다. 해와 별이 보지 않은 이 주간의 유라굴라 광풍은 인간의 필설로 표현 불가능하다. 살가능성은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바울에게 276명 아무도 해함이 없겠다고 하였다. 바울은 그것을 믿었다. 이 항해 중 파선되었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무너진다. 그렇다면 믿는자의 신앙의 근거가 무너진다. (바울에게 로마에 가가서  가이사 앞에 서리라고 하였다.)
 
(가이사 앞에서 왜 자기가 죄수의 몸이 되었는가 변명(defence) 하여야 한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위대한 간증(testimony)이다. 즉 변명 속에서 놀라운 복음의 핵심을 증거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하나님도 하나님의 약속도 무너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오묘하게 그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행9:1-22)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14일의 광풍이 잔잔해진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한강을 수영으로 잘 건넌 후 접시물에 빠져 죽을 지경인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지중해 아드리아 바다 직선 거리 팔백- 천킬로 미터의 거리, 죽음의 광풍이 잔잔해지고  이제 살았다고 생각 한 그 시점 문제는 그 후에 계속되었다. 오히려 여기서 죽을 뻔 하였다. 선원들은 은밀한 자기들만의 탈출 계획, 군인들은 도망할 가능성 있는 죄수들을 죽이려 하는 시도, 배의 앞머리는 모래톱에 박히고, 배 뒷 머리는 물결에 깨어져 가고 ,
그러한 상황에서 헤엄칠 줄 아는 자는 헤엄쳐 육지로 가고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상륙하여 과연 276명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 살았다.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불 가능한 일을 해 주셨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들의 계획과 궤계와 최선의 노력등이 함께 섞여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배울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역사신학의 핵심을 여기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배울 수 있다.
 
1.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 살 수 없는 곳 광야에서는 만나 주셔 살게 하셨다. 만나는 애굽에서도 가나안에서도 없었다.
애굽에서 없었고 사람 살 수 있는 곳 가나안에 도착하여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 만나는 그쳤다. 이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소설같은 초자연적인 일들은 그 후로도 앞으로도 계속된다. 법궤 빼앗긴 후 가는 곳마다 희한한 일에 일어난 것을 보면 사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시점에서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하신 것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
그 되어진 일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를 알았지만 다시한번 이 역사가 하나님에 의한 것인가 우연인가
젖나는 소들을 사용하여 시험하여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임을 생생히 보고 유구무언이었다. 이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에는 소설같은 초자연적인 일 기적이 많고 많다. 그래서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며 어떻게든 믿을 수 있게 개작해보려고 하는 인생 군상들이 많다. 못 말리는 인생들이다. 초자연적인 일을 구할 때는 언제이고 응답해 주시면 못믿겠다는 것이다. 일반 자연적인 일이라면 그것 모두 성경에 기록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의 일기에도 매일의 똑 같은 일상사의 일은 쓰지 않는다.
 
1. 하나님의 존재 살아계심
자연에서,, 자연은 팩트인가 소설인가. 자연에서 팩트로 보여주시고 초자연에서 기적으로 보여주셔 증명하여 주신다. 하나님이신 성령의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심을 내적으로 알 수 있다. 이것은 내적이기에 오직 자신 만이 알 수 있다. 또한 자연과 역사속에서 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마 6:25-33, 행14:7, 롬1:20)
 
뿐만아니라 우리는 여호와 그 이름 아닌 이름 속에서 알 수 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무엇이라고 말해야합니까 질문하였을 때 가르쳐주신 이름 아닌 이름 된 여호와를 부를 때마다,, 부인 할 수도 없다. 영원히 대대로 기억해야 할 그 칭호이다. 그 뜻은 ‘계시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름 아닌 이름 ' 계시다' 부르면서 안계시다 할 수 없다. 인간이 만든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이 칭호를 찾을 수 없는 영원하고 특별한 표호이다(memorial name). 예수님께서는 이 칭호를 사용하셨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예수 이름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그 모든 것을 나타내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칭호를 선언하셨고 증명하며 영광을 보여주셨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로서 대속의 죽으심을 죽으심으로 오신 목적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약속대로 믿는자에게 성령으로 오셔서 보증해 주셨다.
 
이제 믿는자 는 안에 거하시는 성령과 교통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영적으로 주의깊고(carefully) 감각있는(sensitive) 자세가 될 때 더 잘 알 수 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세번이나 불렀으나 그때마다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적 무감각과 둔센스를 통감하여야 한다. 성경은 반복하여 삼가 들으라고 하셨다.(listen carefully!)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살아계심을 안 그 이후 계속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귀를 귀울여 진지하고 주의 깊게 듣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1. 성회, 성일을 지키다. 기억하며 축제할 일이다.
성회는 예배이다. 축제의 절기이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언약의 징표 언약을 관계를 지키는 것이다.
성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출애굽, 교회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기억하며 신앙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날이다.
그러나 시인은 지금 어떤 이유에서인지 성일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하며 탄식하고 있다.오늘도 누구나 이 상황에서 다시 성일을 지켜 언약관계를 회복하고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 안에서 기쁨을 얻어야 할 것이다.
 
1. 성일을 지키다.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 창8:19-9:1, 35:1-11, 요4:10-14, 요7;37-39)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은 후 노아는 무엇을 가장 먼저하였고 어떠한 약속을 하셨는가 인류 창조 후 주신 말씀과 비교하여 보자. 야곱의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자신이 예배를 드리라고 친히 명하셨다. 해결의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감당치 못하고 풀 수 없는 문제 앞에도 먼저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먼저 할 것 먼저하는 것이다. 일단 예배를 드리는 것 이것이 시작이다. (창1:26-28, 창8:20-9:1, 32:1-15, 마6:33) 
성막의 성소에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려야  누릴 수 있다. 비록 영광스러운 내부 일지라도 제사장이 그 직분을 감당할 때만 성막안의 밝고 귀한 아름다움과 찬란함을 그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섬김 관리 봉사 예배가 없을 때 아무것도 누릴 없다. 어두움과 먼지 뿐이다. 오늘의 모든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제사 예배의 일을 잘 감당하여야 한다. 교회시대에는 목사만이 제사장 인것이 아니다. 교회시대의 목사는 양을 치고 돌보고 먹이는 목사이다.(pastor)
 
* (시42:5)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실험적 글들의 모음인 카아네기의 책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 위대한 과학자 파스퇴르는 ” 도서관과 연구실에서 느끼는 평화“에 관해 말 한 적이 있다. 왜 그러한 곳에서 평화를 느끼는 것일까? 도서관과 연구실이 있는 사람들은 과제에 열중한 나머지 자신들의 일상사를 걱정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조사연구원들이 신경쇠약에 걸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단순한 일이 걱정을 몰아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심리학이 밝혀낸 가장 기본적인 법칙중의 하나가 그 이유이다. 그 법칙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두뇌는 비록 제 아무리 뛰어난 두뇌일지라도, 주어진 시간에 한 가지 이상의 일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믿기 어려운가? 좋다, 그렇다면 실험을 해 보자. 지금 당장 등을 곧게 펴고서 눈을 감고 자유의 여신상의 모습과 내일 오전의 일정을 동시에 생각해 보라. (계속해서 시도해 보라)
 
두 가지 생각에 “교대로” 초점을 맞출 수 있지만 결코 동시에 두 가지를 떠 올 릴 수는 없을 것이다. 감정의 영역에서도 똑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무언가 열정적으로 몰두할 만한 일과 걱정거리에 동시에 빠져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 종류의 감정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몰아낸다.“ ( 카아네기 글 중에서)
위의 글은 한 철인의 임상실험 연구 결과를 쓴 글의 부분이었다. (철인- 인생 철학자 , 철강의 왕, 젊었을 때 목회자 되는 생각도 하였다고 하는 카아네기의 글이다.)
 
1. '다' - 올인의 의미와 중요성
'다'하라.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고 귀중한 일에 네 모든 것을  올인하라. 낙망 될 때 문제 있을 때 희망을 선택하라.
하나님 사랑을 선택하여 올인하라. 찬송하면서 감사하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드리면서,, 예배하면서.. 하나님 사랑에 올인의 표현이 실천이 되게 하라.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가장 위대한 가장 큰 첫 계명이 있다면 이것을 선택하고 올인하라. 하나님 사랑에 올인하라.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만 또한 우리을 위한 것이다.
주님의 가장 큰 계명은 주님을 위한 것이지만 또한 우리를 위한 우리가 사는 길이다.
 
갈급한 심령 갈망하는 마음은 가장 귀한 대상에 올인 할 수 있는 기회이며
하나님께 올인한다면 내 영혼의 낙망 불안 사라지고 진정한 인생 승리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대여, 어찌하여 낙망하는가,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하나님을 사랑 실천 표현에 네 영혼을 올인하라.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찬송하라. 사랑하라. 네 영혼을 '다'하여!  
"The most important one," answred Jesus, "is th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막12:29-30)
 
<한영, 시42:1-5>
As the deer pants for streams of water, so my soul pants for you, O God./
 My soul thirsts for God, for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meet with God?/
My tears have been my food day and night, while men say to me all day long, "Where is your God?"/
These things I remember as I pour out my soul: how I used to go with the multitude, leading the procession to the house of God, with shouts of joy and thanksgiving among the festive throng./
Why are you downcast, O my soul?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
 
42:6 my God. My soul is downcast within me; therefore I will remember you from the land of the Jordan,
      the heights of Hermon--from Mount Mizar./
42:7 Deep calls to deep in the roar of your waterfalls; all your waves and breakers have swept over me.
42:8 By day the LORD directs his love, at night his song is with me--a prayer to the God of my life.
 
42:11 Why are you downcast, O my soul?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my God.
 
* 인용글
The great scientist, Pasteur , spoke of " the peace that is found in libraries and laboratories." Why is peace found there? Because the men in libraries and laboratiories are usually too absorbed in their tasks to worry about themselves. Research men rarely have nervous breakdowns. They haven't time for such luxuries.
Why does such a simple thing as keeping busy help to drive out anxiety? Because of a law - one of the most fundamental laws ever revealed by psychology. And that law is: that it is utterly impossible for any human mind, no matter how brilliant, to think of more than one thing at any given time. you don't quite believe it? Very well, then, let's try an experiment.Suppose you lean back right now , close your eyes, and try, at the same instant, to think of the Statue of Liberty and of what you plan to do tomorrow morning .( Go ahead, try it .)
You found out, didn't you, that you could focus on either thought in turn, but never on both simultaneously? Well, the same thing is true in the field of emotions. We cannot be pepped up and enthusiastic about doing something exciting and feel dragged don by worry at the very same time. One kind of emotion drives out the other. And it was that simple discovery that enabled Army psychiatrists to perform such miracles during the Scond World War.
When men came out of battle so shaken by the experience that they were called " psychoneurotic," Army doctors prescribed " keep 'em busy " as a cure.
Every waking minute of these nerve- shocked men was filled with activity- usually outdoor activity, such as fishing, hunting, playing ball, golf, taking pictures, making gardens, and dancing. They were given no time for brooding over their terrible experiences.
( Dale CarneGie, How to stop worrying and start living , 카아네기, 원문 중에서)
                                                                                                         < may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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