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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기복적인 무당굿 아니고 진리로 사는 것

윤병선 (대전노회,,장로) 2013-12-30 (월) 19:48 10년전 4504  
한국의 교인들은 지금 예배와 집회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 유일의 새벽 기도회를 선두로 하여 주일 대예배, 저녁 예배,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 찬양 예배, 그리고 구역 예배 등 한 주간 내내 집회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추가로 정기적인 부흥회, 신앙 강좌, 그리고 특별 집회가 수시로 열립니다. 그 덕분에 전 세계에서 예배가 가장 많은 교회가 한국교회입니다.
 
교회 생활이 예배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도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가장 큰 이유가 예배니까요. 그러나 가정생활, 직장 생활, 학교생활, 기타 나머지 사회 활동의 영역마저 모두 교회의 공예배들로 인하여 시간적 또는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고 과도하게 종속된다면 이는 심각한 신앙적 불균형을 초래합니다.
 
예배가 매우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교회 내에 각종 예배와 프로그램들이 범람하지만 정작 신도들의 삶은 어떠한가요. 음식이란 귀하고 좋은 것이지만 이를 너무 과식하거나 잘못 먹으면 급체 또는 식중독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예배를 바르게 시행하고 적용하지 못하면 신도들은 심각한 '예배 중독'에 빠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 많은 예배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라는 오명을 듣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현실이 우리의 예배 생활과 전혀 무관할까요.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예배
 
어떤 경우는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녀도 삶이 별로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여전히 가정에서 짜증내고, 직장에서 이기적이고, 모임에서 험담하고, 사업에서 부정을 행하고, 어려운 친척에게 무심하고, 그리고 가난한 이웃에게 박정합니다.
 
그래도 예수 믿고 다소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인색하고, 옹졸하고, 잘난 척하고, 다투고, 시기하고, 공의에 무감각하고, 기복적이고, 미신적이고, 그리고 주는 것보다 받기를 좋아합니다.
 
일 년 내내 각종 예배를 통하여 매주 설교를 듣고, 기도를 많이 하고, 그리고 찬양도 많이 하는데 이처럼 삶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통성기도 또한 요란하건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비와 경건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왜 공예배에 그토록 열심히 참여하십니까. 진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하기 위함입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삶과 동떨어진 경배를 주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번에도 또 무당굿처럼 '복을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시려는지요.
 
우리의 예배가 삶에 참된 변화를 주지 못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예배입니다. 자신은 요지부동으로 변화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이 해결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그저 욕심일 뿐입니다. 내 속사람과 탐욕은 그대로 둔 채 내 의도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른 예배는 바른 실천이 동반된 예배입니다. 그래서 힘이 들어도 내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깊은 자각이 필요합니다. 그런 진지한 각오와 결연한 마음이 없이 만날 신발이 닳도록 예배당 문턱을 밟아 봐야 무슨 변화가 있을까요. 성도들은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자신을 바꾸는 일에서부터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온갖 좋은 말을 늘어놓으며 세상을 바꾸겠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른 예배가 될 리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본이 안 된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사치, 공금 횡령, 뇌물 수수, 성직 매매, 패거리 작당, 교권 남용, 성추행, 세습, 그리고 교회 사유화 등 갖은 악행을 고치지 않으면서 무엇을 바꾸고 누구를 변화시키겠다는 것인지 정말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현실입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한국교회의 총체적 부패를 보며 '신학의 부재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을 하셨더군요. 그 말씀이 별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런 표현조차 큰 사치로 들립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고난도의 신학적 지식 결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기본적인 기초 상식의 결여에 기인합니다. 그런 상식의 회복이 없이 아무리 신학자들과 전문가들이 모여 세미나하고 토론하고 논문을 많이 써 봐야 말짱 헛수고이지요.
 
한국교회 문제의 핵심에는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과 최소한의 양심마저 무시하고 불의한 교권을 휘두르고 있는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타락한 무리들이 가장 경건한 척 성직으로 위장하여 신도들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그리고 진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변질
 
이들에게 예배는 하나의 공연 무대에 불과합니다. 유창한 설교와 멋진 기도로 신도들의 마음을 훔치고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처럼 돋보이게 하려 애씁니다. 그래서 이방신의 거대한 사원처럼 시각적으로 크고 수려한 예배당이 필요하고, 엄숙한 의식이 필요하고, 고가의 전자 악기가 필요하고, 그리고 신도들의 감각을 자극할 '언어의 유희'가 필요합니다.
 
가장 성경적이어야 할 설교에는 권위주의적 위세와 달콤한 기만이 난무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하라고 했더니 엉뚱하게 '목사님 말씀'을 열심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 표절과 짜깁기가 만연하고 마무리 기도도 그냥은 못 합니다. 감미로운 음악을 깔고 사전에 고심하여 준비한 기도문을 변사처럼 애절한 목소리로 읽으며 미사여구를 늘어놓습니다. 혹시 한 글자라도 잘못 읽으면 망신이니 노심초사하며 조심조심 읽습니다. 그래도 간혹 오낭독을 하게 되고 그런 날은 정말 신성한 목사님의 스타일을 사정없이 구긴 고약한 날이 됩니다.
 
하여튼 이래도 감히 은혜를 안 받으면 그 교인은 정말 경우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의 종'께서 이렇게 수고하시는데 어찌 은혜를 안 받고 배기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순진한 신도들은 별 수 없이 그 은혜라는 것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거룩하신 담임목사님의 교회는 또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돈을 더 많이 걷고, 건물을 확장하고, 교인 수를 늘리고, 그리고 다시 대형화를 향해 힘차게 전진합니다. 이런 교회에서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작두에 맨발로 선 무당처럼 홀로 북 치고 장구 치며 수고하시는 주의 종께서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좀 하면 "그건 극히 일부의 이야기이다"며 반발하는 분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침소봉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왕이면 부정적인 것 말고 아름답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교회의 회복이나 갱신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평주의자로 몰아 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너그럽고 고상한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우리 마을의 공동 우물에 개똥이 한 조각 떠 있습니다. 그러면 뭐 그까짓 거 오직 한 조각뿐이니 괜찮다고 그냥 두시는지요. 그리고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이 정말 단지 한 조각 정도라고 보십니까. 또는 단지 일부의 문제이니 아예 전부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기다리며 구경을 하자는 것인지요.
 
성도들의 깊은 각성이 필요합니다. 은혜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신 것이 아니신데 유독 공예배를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아침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정장을 빛나게 차려 입고 미리 은혜를 받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교회에 갑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평상시 가정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힘든 모양입니다. 하여튼 그리고는 마음을 단정히 하고 예배의 벅찬 감동과 감격이 내리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가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되면 목회자나 분위기에 의존하는 신앙에 빠지기 쉽고, 또한 바른 지식보다는 감정에 좌우되는 불균형이 문제가 됩니다. 찬양만 열심히 해도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지만, 그것이 은혜의 중심이 되면 문제가 됩니다. 신자들은 생각을 좀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머리가 빈 뜨거운 가슴은 언제나 맹신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자신이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면서 세상적으로 성공하여 남들보다 잘살거나 다소 앞서 있으면 그것을 매우 중요한 신앙의 승리로 간주하는 '성공주의'나 '번영주의' 또한 예배를 기복적으로 변질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일부 교권주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순진한 욕구를 이용하여 이들의 삶을 교회에 가두고 가급적이면 '교회 중심 생활'을 하도록 우선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는 '성숙한 신자'는 되지 못하고, 그저 교회 일에만 몰두하는 '충성된 교인'이 되도록 유도합니다.
 
물론 이는 귀족 목사님들의 철밥통을 금칠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에 비해 한국교회에 기형적으로 예배나 집회가 많은 것이 이런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예배란 무엇입니까. 교인들이 모여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헌금하면 다 좋은 예배일까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예배 역시 원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를 좋아하셔서 제사를 원하시고, 돈이 부족해서 제물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예배보다 더욱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다운 삶'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귀하고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성도의 삶을 통한 사역보다 예배를 우선시하는 '예배 제일주의'나 '예배 만능주의'는 매우 위험한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예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공예배는 단지 예배의 극히 일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도의 삶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자주 모이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상에 나가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성도 자신이 예수님처럼 제물이 되어 세상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도들의 초기 교회에 현재처럼 번잡하게 많은 공예배와 집회가 있었을까요. 지금 서구 많은 나라들에서는 '작은 정부'를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정부가 너무 많은 일을 벌려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져서 권력을 남용하며 비효율화하고 민간에서 해야 할 것까지 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유형 교회 역시 그 활동을 적절히 절제하며 '작은 교회'를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의 삶이 단순히 교회 활동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니까요. 따라서 교회는 신도들이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밀알이 되어 제자다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교회 생활만 중시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주로 이단이나 사이비가 애용하는 수법입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단순히 '자주 모이라' 또는 '많이 모이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도들은 성속을 차별하던 중세적 '교회 중심주의'나 '예배 중심주의'의 함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이웃의 눈물을 먼저 돌보아야 할 소중한 헌금으로 바벨탑같이 높은 초대형 건물을 지어 맹신도들을 유혹하고 '거룩한 성전'이라 기만하며 희희낙락하는 자들은 예배의 참된 의미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삶으로 예배하는 성도라면 결코 그런 허욕, 허망, 그리고 허세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세계 어느 나라 교회보다 큰 예배당들을 많이 짓고 빈번하게 예배를 많이 하지만, 정작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삶으로 그 예배를 완성시키는 일에서는 왜 결정적으로 큰 실패를 하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예배의 무속화와 기복화
 
이제 우리는 예배에 대해 더욱 성숙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닙니다. 제물이나 돈을 바치고 죄 사함을 받고 복을 구하는 의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사처럼 너무 바침을 강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전 제사는 이미 어린양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어 다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허구한 날 모일 때마다 무당굿처럼 뭘 그리 또 다시 더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인지요. 하여튼 돈을 안 걷는 굿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반면에 사도들의 초기 예배에는 아예 '헌금 순서'라는 것 자체가 없었습니다. 현대 개신교의 예배에 헌금 순서를 슬그머니 삽입한 것은 도대체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성전이나 교회당에만 임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주일에만 함께하시고 평일에는 외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성도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니 마치 예배 중에만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처럼 너무 호들갑을 떨지 말자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 시 개신교 목사가 무당이나 사제같이 권위적인 긴 옷을 입고 제사의 '제주'처럼 행세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잘못된 일입니다. 이런 제사장적 처신은 암묵적으로 목사직을 다른 직분들보다 특권화하여 결국 목사가 신도들 위에 군림하게 만드는 매우 미신적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제사처럼 의식화하거나 너무 성스럽게 미화하지 말기 바랍니다. 예배는 굿이나 제사가 아닙니다. 교회당은 성전이 아니고, 교회 부지는 성지가 아니고, 강단은 제단이 아니고, 그리고 설교하는 목사는 결코 제사장의 직분이 아닙니다. 그런 무속적 행위들은 부패한 중세 교회에서 이미 오래전에 끝장냈어야 할 미신적인 작태입니다.
 
또한 예배를 인위적으로 무슨 은혜를 나눠 주는 종교적 이벤트나 공연으로 격하시켜도 곤란합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복되고 은혜로운 예배를 보여 주겠다고 갖은 '감각적 수단'을 동원하며 인위적으로 힘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진심으로 말리고 싶은 일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을 깔고, 아무리 장엄한 의식을 펼치고, 그리고 아무리 거룩한 목소리로 설교와 기도를 잘 해도 그 속에 신령과 진리가 없다면 이는 단지 무속적인 굿거리장단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만날 때 항상 정장을 하십니까. 아버지와 매주 무슨 공식적인 회담이라도 하시려는지요. 진바지를 입거나 운동화를 신고 만나면 아버지가 언제 박대하시던가요. 그리고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만날 때마다 돈을 요구하시던가요.
 
공예배를 무속화하거나 기복화하는 것은 교회를 병들게 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목회자를 사제화하여 '목사 중심 예배'를 유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나 설교가 스스로 은혜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무당처럼 지성을 드려 은혜를 받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자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이미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공교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닙니다. 가난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며 주님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산에서, 빈 들에서, 또는 어두운 예배당 구석이나 골방 그 어디서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목이나 손바닥이 좀 뜨거워졌다고 은혜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감정으로 얻어진 뜨거움은 결국 감정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입니다. 그런 정도는 맹신도들도 즐기는 은혜입니다.
 
진리로 사는 것이 예배
 
예배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군더더기를 잔득 발라서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모일 때마다 매번 돈을 걷고 음악으로 장식한 기도와 느끼한 화술로 쇼를 공연하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은 은혜라는 가명으로 예배 속에 위장된 교권주의자들의 치졸한 꼼수일 뿐입니다.
 
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를 사모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가장 큰 은혜는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한번 바르게 살아보겠노라고 불의와 헛된 욕심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십자가의 도'를 따르려는 단호한 결단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는 삶은 변화시키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제사화하고 기복화한 예배를 관습적으로 반복하고 평생 교회당만 오락가락하며 세월을 허비하는 '예배 중독자'들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요.
 
공예배는 가족 모임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아버지와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자녀들이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족합니다. 처음엔 주로 가정에서 모였던 초대교회 사도들의 무공해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겉치장에 분주하거나 의식과 건물의 허세가 없는 소박하고 진솔한 예배가 좋은 예배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도에게는 삶이 예배입니다. 삶이 제사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당에서 우리의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 지금 자신이 서있는 그 장소가 언제나 경건한 삶으로 수행하는 생생한 예배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마 12:7)."
 
 

박일남(경기북노회,의정부 송암교회,장로) 2013-12-31 (화) 11:46 10년전
윤장로님 시사하는 바가 너무 많은 말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분발하시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소
백기환(광주노회,화순만나교회,장로) 2013-12-31 (화) 14:12 10년전
마음을 울리는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주소
윤병선(대전노회,,장로) 2013-12-31 (화) 15:05 10년전
여러가지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기에 퍼 왔는데 박일남장로님과 백기환장로님께서 공(동)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장로님들께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육간 강건함과 형통의 복이 새해에 더욱 충만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소
이세윤(전북동노회,전주금암교회,) 2014-01-01 (수) 10:24 10년전
윤병선 장로님, 박일남 장로님과 백기환 장로님!
갑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고 더욱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 모습도 올리신 글대로 조금씩 변화되리라 믿습니다.
나는 뉴질랜드 여행 중 주일예배를 읍 단위인 교회에서 예배드린 경험이 떠 올랐습니다.
강단 중앙에 성찬상이 놓이고 한쪽에 악기 연주자가 자리할 뿐 목사님은 단 아래 앞 줄에
노타이 콤비차림으로 앉아 계시고 말씀 선포도 앞에서 하시며 성찬을 나누고 찬양은 가족창
이며 예배 후에는 예배당 입구에 마련된 다과를 나누며 목사님과 노인인 교인들이 담소하는 
모습이 생생히 기억됩니다. 공동 식사는 없고 오후는 한국교회가 예배를 드리는데 참여해 보니
우리가 드리는 것과 같았으니 서양 교회와 분위기는 많이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소
윤병선(대전노회,,장로) 2014-01-01 (수) 21:50 10년전
이세윤 장로님!
새해 더욱 더 영육간 강건하시고 형통함의 복을 충만하게 받으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하며 축복합니다.
주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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