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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사고 ~

윤병선 (대전노회,,장로) 2014-08-01 (금) 07:07 9년전 4424  

 비판(批判,criticism,Kritic)은 비평(批評)과 같은 의미로 쓰여지는데 일반적으로 인간의 지식이나 행동에 관해 그것의 진리성,유효성 등을 식별하는 것을 말한다하지만 필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신이 사물이나 사태 혹은 존재 그 자체들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이성 활동정도로 규정해 본다. 이는 대상이나 주어진 현상을 인식할 경우 그 본질을 간과하고 피상적인 외형이나 비 본질적인 것을 본질로 여겨 오판케 되는 것들을 제거해 나가는 사고의 과정인 것이다.

 

  간혹 사람들은 이 말을 남을 '비난하거나 나쁘게 말하는 것'으로 여기는가 하면 " 그 사람은 매우 비판적이야"할 경우 긍정적이지 못하고 외골수거나 편협한 인간이란 의미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하지만 이것은 인간 정신의 이성작용 중 비판적 기능이 수행하는 (그 몫의) 가치를 간과한 소박성이다.

 

  비판적 사고는 감정적 사고가 아니고 이성적 사고이다 성숙한 이성은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하여는 물론자신의 사고 조차도 정말 참된 이치에 바르게 행해지고 있는가를 성찰한다. 반성적 사고가 비판적 사고인 것이다.

 

  인문학 분야의 대학원 커리큘럼에는 "비판적 사고 훈련"이라는 등의 강좌를 열어 한 학기 내 내 비판적 사고를 스터디 하는 경우가 있다. 필자가 위에서 말한 "비판은 사물이나 사태,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이성의 작용"이란 전제 하에 본질파악을 위한 사고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 보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학문은 비평(비판)을 도구로 하여 진행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주입식이나 일방적 정보 전달이 아닌한 ....

 

  신학이나 신앙하는 행위는 비판적(이성적) 사고와 대립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서양사에서 '이성과 신앙'이란 주제로 논란 했던 주제인데, 물론 신앙은 이성을 넘어선 차원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다문제는 이성 넘어의 계시를 신앙하는 그  '믿음'이란 행위나 그 신앙행위를 수행하는 주체가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인 것이다신앙하는 그 주체가 이성적 존재자이기 때문에 그 계시를 이성이 수용하는 과정이 따르게 마련인 것이다. 이 때 그 계시에 대한 수용, '믿음' 안에 이성이 자기 법칙대로 정리해 놓은 질서랄까 정리된 콘텐츠가 있게 마련인 것인데 이것이 결핍되면 샤만이나 이단 또는 심각한 주관주의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마땅히 신앙에도 비평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고 이 비평이란 이성적 작업을 하는 일이 '신학함'인 것이다.

 

  이 신학 작업에서 비평적 자기 훈련이 결핍됐을 때 오류를 범하게 된다. 우리 주변의 신앙 스타일이 전통적 무속의 영향과 긍정적 사고란 실용주의,감정적 열광기질 등으로 인해 비평적 사고가 설 공간이 마련돼 있지 않은 현실이다. 그 결과 신앙의 질이 소박하거나 가벼운 측면이 있다. 이 비평적 사고 훈련의 결핍 상태에서 작성된 설교를 듣고 성장한 교인들이 점치러 가고 천주교,불교로 이동하는 현상이 점증하고 있다.(신앙에 내포된 콘텐츠가 없기 때문에..)

 

  어떤 사회현상에 대한 성찰을 하려면 비판적 사고가 반드시 요구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비판적 사고를 통해 어떤 논리가 구성,주장되면 소박인사들이  "저 사람의 말이나 글은 항상 부정적이야" "은혜가 없어" " 남을 칭찬할 줄 몰라" " "한 쪽으로 치우친 것 같아" 정도의 말 밖에 모른다. 말하자면 값싼 '기분 좋음'정도를 은혜와 진리로 여겨온 기질의 발로인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건강한 개혁이나 발전,올바른 진보, 오류나 허위, 이단을 막는일 등은 모두 비판적 사고에서 시작 된다. 루터,칼빈 쥬빙글리 같은 개혁자들도 소박하고 은혜스런 인사들이 보면 은혜가 없고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인사들이며 편집적이며 강박적으로 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 대 사도 바울도) 바울,루터,칼빈 모두가 주어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서 개혁의지가 발아된 것이다.

 

  비판적 작업의 결과, 본질에 다가선 인식은 그 대상에 대한 전문성을 도출하게 된다.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것들이 지닌 비 본질성을 제거(극복)한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그 전문성도 소박 인사들이 보면 고집,편향, 한편으로 치우침 정도로 밖에 안 보이게 된다.

 

  예로 어떤 개인이 사회 현상을 인식하거나 이를 평가한 주장이나 글을 대할 경우 자기 내면의 콘텐츠들을 매개로 하여 평가하게 되는데 그 콘텐츠가 빈약하고 사색의 경험이 일천할수록 감정적 냉소를 하거나 심리적 거부, 파당적 이해 범주를 넘지 못하게 된다.  이는 그 개인의 지적 자산이 빈곤하고 사색의 내공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 신앙이나 신학적 환경에서 비평적 사고의 결핍이 초래하는 폐단이 허다한데, 목회자의 경우도 비평적 사색을 통한 스스로의 신학작업의  내공이 경박할수록 외부에 의존, (재충전 한다느니 하면서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다니지만..) 여전한 공허감을 휴대한 채 마음 고생이 그치지 않은, 사유의 방랑객으로  머무를 수 있다

 

  그들은 목회 성공을 위한 무슨 새 프로그램이 유행하면 빠짐없이 가야 하고 그것으로 1 목회해 보다가 고갈될 때 쯤이면 재충전이란 이름으로 새 프로그램을 찾아 나서야 하는 프레임에 갇혀 있을 가능성에 개방 된다(물론 그렇지 않은, 주체적 사고가 당당한 목회자분들이 더 많음도 말할 필요가 없다)


출처 -

기장타임즈

cafe.naver.com/fafa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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