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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엘로헤 이스라엘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14-10-01 (수) 10:49 9년전 11322  
< 말씀묵상. 창33:20>
 
'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히브리어 '엘'은 전능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이다.
그러므로 '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 분은 또한 창조주이시다. 성경 시작에 이 전능하신 하나님 엘로힘이 창조하셨기 때문이다.그런데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엘엘로헤 이스라엘 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엘은 전능자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엘로헤는 엘의 복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것이 전혀 아니다.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서론 본론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에게서 가장 중요한 첫 출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엘로헤 라고 하였을까. 나는 여기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고 하신 전 후 계속 그의 삶에서 함께 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과거에도 결정적인 고비마다 도와주시고 역사하시는 그 분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엘엘로헤 이스라엘 이라고 불렀다.
그의 삶의 과정에서 자주 불렀을 전능하신 하나님
그러나 이 장면에서 다시 극적인 도우심을 경험하고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이다.
 
직전의 상황을 잘 안다면 왜 엘엘로헤라고 불렀는지 누구나 깊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주 불렀지만 이 직전의 죽음의 계곡에서 승리케 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십년 만에, 얍복강 가에서 밤세워 씨름하듯 기도하고, 형 에서와 목을 어긋 맞추며 울며 감격하였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그리고 바로 직전에 이렇게 해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한번만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하나님,,,..
 
수없이 부를 목놓아 부를 감격에 부를
무엇이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심정에
하나님 하나님 ,,,
전능하신 하나님,,,
 
엘엘로헤, 그의 모든 감사 놀라움 감격이 마음에 담긴 간증의 표현 그것 이었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입술로 한 두 번이 아니라 수번 수십 번 아니 그 이상 부르고 불렀을 이름이다.
나의 전능자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우리의 전능자 하나님을 여기에서는 더욱 더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전능자 하나님,,
이러한 이름은 제단을 쌓고 즉 예배를 드리고 거기서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시었고 이제 그의 영으로 오셔서 그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
 
 
                                                                                  < 성광교회 이동원목사 드림 >
 
 
=. meditation.
 
이 시점은 얍복강 가에서 최대의 위기를 앞에 두고 밤을 세워 씨름하듯 기도한 후 이십년간 원수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형제와 감격의 포옹을 하고 거주지를 정하고 정착을 하며 제단을 쌓고 부른 것이다.(33:20)
 
1. 광야를 지나는 길에서 ,
야곱은 형의 장자권 축복을 가로채고 (사실 그가 계획한 것은 아님) 그는 형의 분노를 일단 피하기 위해 삼촌 집을 향해 가는길에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침대 삼고 돌을 베개하며 자다가 전능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나타남으로 너무나 놀란 후 고백한 장면이다. 오래 전 이 구절을 읽고 한 단어 한 단어를 며칠을 음미하며 생각하였던 기억이 난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를 침대 삼고 돌을 베개하며 낯설고 황량한 광야를 지나가는 중에 길을 잃거나 추위와 더위 그리고 맹수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이 광야 삭막한 광야에서 밤에 홀로 잠을 자는데,
 
여호와께서 광야에서 꿈에 말씀으로 나타나셨다.
'과연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목회의 초기 어느 때에
이 구절을 며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한 단어 한 단어를 깊이 묵상해 보자. 오늘도 격려를 주신다.
(창28:16)
When Jacob awoke from his sleep, he thought, "Surely the LORD is in this place, and I was not aware of it.
Surely,,  the LORD,,  is ,,  in this place,,.  and I was not aware,, of it.
 
2.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
이십대 후반의 청춘 시절에 이 구절을 읽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근면 인내력 인간적인 지혜
야곱은 이 삼박자를 잘 갖춘 즉 근면 밤낮 추위 더위 무릎 쓰고 눈 불일 겨를이 없는 끈질긴 노력, 인내 칠년 칠년 육년 합해서 이십년 머슴살이,  걷는 위에 나는 사람 인간적인 지혜를 가진 야곱이다. 인간적 지혜는 삼촌보다 한 수 위로 보인다.
 
노력 인내 인간적 지혜를 잘 갖춘 사람으로서 오늘날에 살았어도 세상에서 대기업을 이룰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 하였다. 그런데 진정 야곱은 그것보다 타의 추종을 불허 할 그의 신앙관인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신앙이 가장 강했다. 다음에서 그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이 복주셨다는 확실한 야곱의 축복관을 볼 수 있다.
 
(창30:30 )
The little you had before I came has increased greatly, and the LORD has blessed you wherever I have been. But now, when may I do something for my own household?" /  This was my situation:
The heat consumed me in the daytime and the cold at night, and sleep fled from my eyes.( 31:40)
 
3.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나와 함께 계셨다.
삼촌의 거주지에서 그의 딸 라헬을 보고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며 입맞추고 소리내고 울었고,,
처음 만났을 때,, 삼촌 라반은 조카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그를 영접하며 안고 입맞추고 환영한,
낯선 땅에서 홀로인 자신을 반겼고 의지할 수 있었던 삼촌,, 그런데 그 삼촌의 안색이 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그는 아직 낙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를 다음에서 알 수 있다.
(창31:2, 5)
And Jacob noticed that Laban's attitude toward him was not what it had been. / 
He said to them, "I see that your father's attitude toward me is not what it was before,
but the God of my father has been with me.
 
4. 얍복강 가에서,
에서가 사백명의 군대를 데리고 온다는 것이다. 금의환향하는 순간일 수도 있는 이 기대는 한 순간에 무너졌다.
어쩌면 자기의 가족 소유들 그리고 자기의 목숨까지 여기서 끝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는 어떻게 하였는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무엇을 하였는가.
야곱 아내 자녀 사람들 소유까지 다 보내고 찬바람 강바람 맞아가며 홀로 캄캄한 밤에 씨름 하듯 기도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가장 극한 상황 그곳이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순간이었다.
(창32:28)
Then the man said, "Your name will no longer be Jacob, but Israel, because you have struggled with God and with men and have overcome."
 
5. 제단을 쌓으며 부르다.
(창33:20)
There he set up an altar and called it El Elohe Israel.
어찌 이 과정 후 제단을 쌓고 즉 예배를 드리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전능자 하나님 지금까지의 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우리 하나님 우리의 전능자 하나님,,,.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에서가 집에서 길리운 군사 사백명을 데리고 온다고 하니
이제 죽는 줄 알았다. 진퇴양란이다. 그러나,
얍복강에서 그 기도의 과정을 거쳐 형제가 다시 목을 어긋 맞추고 울고 서로를 위하는 이 장면 후 정착하여
 
거기에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 이라 부른 것이다.
그의 그 이후의 삶의 길에도 항상 순탄한 과정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삶의 고비 고비 마다 엘엘로헤 이스라엘을 불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련은 그 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주 엘엘로헤를 불러야 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
나의 삶에서 고비 고비 마다 나를 승리케 하신 나의 하나님
비록 패배가 있다하여도 신앙의 승리자로 만드신 나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는 계속해서 부르고 불렀음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엘 뿐 아니라 엘로헤라고도 하였기 때문이다. 엘엘로헤 이스라엘 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The Lord be with you.)
 
 
 
 
<추가>
* 창30:30을 보니 개정에 내용이 약간 바뀌어 버렸다. 읽다가  ,,하고 ,,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내용의 핵심은 나의 공력 노력 다했는데 여호와께서 복주셨다는 것인데,,
 바꾸었다,,. 아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야 오 ,, 오,, 어찌할 꼬,, 뒤늦게 이것을 발견하고,,>
 
* 또 한번 크게 당황하다.
창30:30절은 젊은 청춘 때 인상적이었고 수십년 동안 기억하는 말씀 중에 하나이다.
야곱의 신앙과 축복관을 기억하며,
낮에 더위 밤에 추위 그리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노력을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의 공력 노력의 결과라고 만 하지 않고 여기에 ,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 외삼촌에게 / 복을 주셨다/ 는 것이다,
이것이 야곱의 신앙관 축복관이다. 오랜 시간 마음에 둔 말씀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개정판에서 이 구절에서 이 내용를 찾았는데 그 내용이 없어졌다. 내가 구절을 혹 잘 못 쓴 것인가, 이상하다. 크게 당황하였다. 어찌된 것인가, 개역을 보았다.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개정에 좀 다른 단어로 내용을 수정하여 버렸다.  아,,~  무슨 말을 하리오.  그러면 수십 년 동안 개역의 잘 못된 번역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인가, 원문을 찾아보기도 원치 않는다. 개역번역 한 분들도 다 원문을 보고 기본적으로 알고 번역하였을 것이다,
 
일단 개역판을 개정판 보다 더 낫다고 보고 있지만
한국 교계가 특히 책임 있는 지도자 분들이 비교하며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교계의 모든 연합기관 단체도 다른 무엇보다 이 일을 먼저 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 살리는 이 생명의 말씀은 공적으로 보고 새찬송가 합본임으로 모두가 보고 있다.
 
만약 개정이 여러가지로 부족하다면 이것은 큰 문제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현재의 수준의 반영일 것이다. 지금 합본을 사용하지 않거나 개인 사적인 번역이거나 공식적인 사용이 아니라면 필자는 여기에 언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정을 공식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한국 교계 지도자와 책임자 모두가 대단히 진지하게 생각해야할 일이라고 본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현재 뿐 아니라  미래와 후세를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 먼저 할 일 이라고 본다. 큰 책임감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교계를 되돌아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계가 말씀을 더 가까이 하고 한국을 살리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성경은 모든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책 아닌가, 이 시대에 교계 단체 지도자들이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개역과 개정을 같이 고찰해 보는 것은 가장 우선 순위이고 먼저이고 중요한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일단 먼저 진지하게 잘 비교해 보야야 한다. 잘 비교하여 읽어 보면 다 공통으로 느끼는 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왜 잘 된 번역을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하였는지 나는 여러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이상 이었다. 교계지도자들과 담당자 그리고 우리 모두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일보다 이것이 먼저 이어야 할 것이다.
 
오늘도 주님이 마르다에게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교계와 연합단체 지도자들은 이 일에 가장 큰 관심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것이 먼저이어야 한다고 본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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