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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들

김창환 (서울남노회,강서교회,목사) 2017-02-16 (목) 15:46 7년전 4245  
2017.02.16. 13:28 http://cafe.daum.net/thekingjesus/I1Nl/428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칼럼 (428호) 초대교회로 만들어 가는 일에 앞장서자 (행 2:38-47)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9-31). 우리 강서교회가 지향할 방향은 초대교회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1. 날마다 전도에 힘쓰는 교회로 만들어 가자.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 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 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9-41). 2. 날마다 가르침을 받고 기도에 힘쓰는 교회로 만들어 가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3. 날마다 믿음의 표적이 나타는 교회로 만들어 가자.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3-45). 4.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로 만들어 가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5. 날마다 교제하여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교회로 만들어 가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 라”(행 4:34-35). 6.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로 만들어 가자.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소아시아 일곱교회 모습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편지로 보낸 소아시아의 7교회는

    현재 터키 남부 지역 일대에 위치해 있다.

    당시 7교회 이외에도 골로새, 갈라디아, 히에라볼리 교회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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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 교회 


    에베소교회(셀죽 사도요한 무덤교회) 에페소스 라고 하며 현재명은 셀주크이다. 물론 에베소 유적지는 따로 있다. 당시 에베소는 실질적인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라 할 만큼 교역과 교통, 정치와 종교의 중심도시였다. 로마의 독립 행정관이 다스렸고 순회재판소도 있었다. 에베소 유적지에는 수천명이 들어가는 야외 음악당과 셀슈스 도서관, 법원, 병원, 사우나 탕과 아고라 지역이 있었고 티베리우스, 트라얀, 하드리안, 도미시안 등 로마 황제 신전과 함께 아테나, 아데미 신전도 있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시 3년을 머물러 세운 교회로 현재의 에베소교회 유적지는 셀죽에 있는 사도 요한 무덤교회를 말하고 있다. 셀죽성 아래에 자리잡은 사도요한 무덤교회는 아래쪽에 아데미 신전터가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비잔틴시대에 세운 교회이다. 에베소는 스미르나(오늘날 Izmir)로부터 74km 거리에 위치한 도시로서, 바올로 시대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카이스트로스(Kaystros)강을 타고 흙이 씻겨내려와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못하고 바다와 에베소 사이에는 큰 거리가 생겼다. 에베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입성으로 해방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희라브이 장군 Lysimachos는 에베소에 경기장, 체육관, 원형극장을 세워 에베소를 크게 발전시켰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에베소는 소아시아 서부지역의 수로가 되었고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 번성기를 맞이하였다.(오늘날 발굴되는 에베소의 모습은 로마시대의 것이다.) 기원전 88년 시민들이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죽이자, 로마의 실라(Sylla) 장군은 에베소를 완전 초토화 시켰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기원전 27년-서기 14년 치세) 때부터 다시 재건된 이 도시는 아시아 속주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의 에베소는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의 노고로 발굴된 것이다. 4세기경에 에베소는 소아시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베소교회

     

     

     

     

     

     






    서머나 교회


    서머나교회(폴리캅 기념교회)

    스미르나 라고 하며 현재명은 이즈밀 이다. 터키 남부의 미항으로 큰 도시이다.

    현재의 교회는 아시아 7교회 중 유일하게 건물이 있는 곳으로 황제 숭배를 거부해

    순교한 서머나 감독 폴리캅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당시 서머나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고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잔학하게 탄압하였다.

    또한 로마 황제 숭배 거부로 서머나 교회는 많은 재정적 궁핍을 겪었다.

    그럼에도 서머나교회는 모든 핍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열렬한 신앙을 지켜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칭찬을 받았다.

    古代 스미르나는 (現 이즈미르) 기원전 3,000년경 전반에 이미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100년경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번영하기 시작하였으나

    실제로 이 도시의 번영과 영광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진격하던 중

    이곳에 성벽을 쌓고 새 도시를 건설했던 것이다.

    이 스미르나는 기원전 3 - 2세기 희랍시대에 항구도시로서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 살게 되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초대교회를 핍박하였고,

    계시록 2: 9-10 에 "유다인들의 훼방"에 관한 언급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서머나교회


    서머나교회 내부

     


    서머나(폴리캅교회) 강단


    폴리캅

     


    폴리캅


    폴리캅화형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였으며,

    그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던 폴리캅은

    115-116년까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156년에 서머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지방 총독인 스타티우스는 빌라델비아 등지에서 잡아 온

    11명의 기독교인들을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의 먹이로 희생시켰다.

    이때 폴리캅은 밀고로 체포된 상태에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스타티우스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의 신앙을 부정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폴리캅은 '8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

    하고 거절하였다.

    군중들은 그를 사자밥이 되게 하라고 외쳤으나,

    총독은 경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에 성이 난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를 장작더미에 올리라고 외쳐댔다.

    할 수 없이 화형에 처했는데 군중들은

    '이 사람은 우리 신의 파괴자다.

    기독교인들의 아버지다' 라고 외쳤다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독교인으로서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오늘날에도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그가 세웠던 교회 위에

    현대식으로 폴리캅 기념교회를 세우고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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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가모교회

                                 


    버가모교회(후 세라피스 신전)

     

    버가모 시내에 있는 세라피스 신전은 원래 이집트 신이기 때문에

    "이집트신전"

    이라 불리기도하며 신전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 "붉은 궁전(The Red Hall)"

    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요한 계시록의 버가모교회에 바쳐지기

    위해 바닥을 높여 교회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신전의 26m x 60m 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 건물의 상층부가 붕괴되어 있지만

    남아있는 벽의 높이가 19 m에 이르는 대형 신전이었다.

    신전의 동쪽 끝에 남아있는 2개의 도움양식은 로마시대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써 오늘날 한 쪽은 이슬람 서원으로, 다른 한 쪽은 박물관의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이 신전의 가장 중요 부분은 3면이 기둥으로 둘러 싸여 있는 데,

    이색적인 것은 이 기둥이 당시에 흔했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기둥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조각 중 하나는 남성의 모습 하나는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집트의

    신인 이시스와 세라피스 신으로 추측된다. 또 한가지 특징은 강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즉 이 신전 밑에는 대각선으로 셀리누스 강이 흐르고 있는데 직경 9m의

    토관 2개를 묻어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평평하게 했다. 

    이 건물은 기독교 공인 후 바닥을 높여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약 1~2m 높이의 벽만이 옛날의 교회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버가모교회

     


      제우스 신전터

     

    버가모왕국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아타로스1세와 유메네스 2세의 헤론 (신성한 지역)이다.

    헤론 앞의 것들은 가게들이었다. 그 앞을 지나면 제우스 신전터가 나오는 데

    지금은 불행히도 소나무 3그루만 있다.

    제우스 신전(로마명으로 쥬피터)은 주전 180년에

    유메네스 II세에 의해서 건축된 신전으로서 세계 7대 명물 중의 하나였다. 

    이 신전은 길이 27m, 높이 12m나 되는 웅대한 신전으로

    온통 고대 조각예술로 장식되었다.

    이 곳의 유물은 독일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기 때문에

    이 신전의 유물들은

    모두 동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헬라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 신은 신 가운데 최고의 신이고

    전 인류의 통치자이며 기후를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지고 제우스 신의 출생지가

    바로 버가모라고 알려지고 있다

                         

     


    버가모 왕국 아테네 신전터

    이 신전은 페르가몬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기원전 4세기 경에 지어졌다.

    이 신전은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북쪽과 동쪽면에 2층의 화랑을 갖게 되었다.

    신전으로 통하는 입구는 동쪽 화랑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 이 대문의 조각들을 사용해 베를린에 그대로 복원되어있다.

    이것을 근거로 해볼 때 화랑의 아래층 기둥은 도리아식이고 위층은

    이오니아식의 기둥으로 되어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둥의 석가래에 "유네메스 왕으로부터,

    그에게 승리를 내려준 아테나 여신에게"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전 마당의 중앙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마당에는 갈라티아인들로 부터 노략한 전리품들을 진열했다고 한다.


    버가모 디오니소스 신전

     

     제우스신전을 돌아서 오른 쪽으로 가면 극장이 나온다.

    이 극장은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극장의 제일 밑의 오른쪽 방면으로 디오니소스 신전을 볼 수 있다.

    연극이

    원래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에 대한 축하의식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 신전은 극장 가까운데 세워지기 마련이다.

    또한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동물을

    희생시켜 행해지는 제사의식도 이 신전에서 거행되었다.

    이 신전은 카라칼라

    황제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배의 사고로 다쳐 아스클레피온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된 후 그 보답으로 지어진 것이다.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

    버가모왕국 트라얀 황제신전,

    당시 버가모는 소아시아 지역 수도였고 아크로폴리스(왕국)안에는

    여러개의 신전(제우스, 디오니소스 등)과 함께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이 있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로마명은 옥타비안)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주후 30-40년

    사이에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트라얀 황제의 신당은 주후 98년에서 117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세베투스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 서 주후 193-211년 사이에 건축이 되어졌습니다.

    하드리안 황제 때 완공한 이 신전은 지형상 깍아진 V자 형의 절벽사이에 걸쳐

    짓게 되었다. 따라서 지형을 평평히 고르기 위해 신전 앞부분에 축대를 쌓을 수

    밖에 없었다. 주위의 다른 건축물들이 회색이나 분홍의 대리석을 사용한 반면

    이 신전은 선명한 흰 대리석을 사용함으로써 산 밑의 평원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신전의 3면은 모두 기둥으로 둘러싼 화랑이 있었으며 신전의 안쪽 마당

    에는 제단이 세워져 있고 제단의 양쪽 끝에는 황제의 조각을 세워 놓았으나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버가모 아스클레피우스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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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 교회,

    티아티라고 하며 현재명은 아크히사르이다.

    당시 이 도시에는 트림나스라는 무녀(巫女)들이 많아 기독교인들을 유혹했고

    또한 시장 조합을 중심으로 우상 숭배와 음란한 제사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길고 넓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B.C 3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들 중 셀레우코스가 이 지역을 점령해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티아디라

    즉 "티아(Thya)의 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때 군대의 주둔만 가지고는 살아있는 도시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그들의 전통적인 상술과 지리적 특성으로

    이 도시를 상업도시로 번성케 했다. 그래서 이곳에 많은 상인조합(길드)이 있었다.

    사도 바울이 필립보에서 만났다고 하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리디아(Rydya)는

    이 도시 출신이다. 이 여자는 자주 장사였는데, 자주는 진홍색의 양모나 아마포로서

    달팽이로부터 뽑아낸 물감으로 염색하는데 너무 비싸기 때문에 황제만이

    입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도 요한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 (계 2:19)고 칭찬 한 후

    이세벨을 비유해서 교회의 신자들을 책망하고 있다.

    이 당시 티아티라에 만연한 "삼바데"라고 불리우는 여자 무당의 숭배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 교회 거리

     

     

     

     

     

     







    두아디라 염색 기술,

    두아디라는 옷감 기술이 뛰어난 곳으로 빌립보의

    루디아도 두아디아 출신으로 자주 옷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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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데교회  


    사데교회(아데미 신전 뒤편, 비잔틴시대)

    사데는 크로에소스의 몰락(BC 56)까지 고대 루디아 왕국의

    도성이었으나, 그 때부터 바사 총독의 주재지로 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도의회(道議會)의 소재지이며,

    후대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는 루디아도의 수도로 되었다

    사데라 하며 현재명은 살리히리이다.

     

    사데 교회는 1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사도 바울의 제자이며 집사였던 클레멘트가

    사데 교회의 첫 감독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데 교회는 이 도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 하였다가

    나중에는 쇠퇴하는 우여곡절을 경험한다.

    사도 요한이 사데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의 교회지도자는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사데 교회는 소아시아 7개 교회 중 유일하게 책망만 받은 교회였다.

    이 교회의 영적인 상황은 서머나 교회와 판이했다.

    서머나 교회는 처음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차츰 영적으로 살아난 교회였다.

    반면 사데 교회는 처음엔 뜨거웠지만 나중에는 죽어가는 교회가 돼

    주님으로부터 '살아 있으나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받았다.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 아데미 신전은 교회로 사용됐다.

    그러다 비잔틴 시대에는 성도의 숫자가 작아져

    신전 남동쪽 구석에 소규모 교회당을 지어

    예배를 드렸다. 점차 약화된 교회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사데 지역은 황금이 많은 지역으로 재물의 유혹이 있었고

    최초의 주화인 금화를 만들어진 곳이다.

    따라서 사데의 성도들은 물질문화에 빠져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못했다.

    또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초기 기독교 당시 신도 수는 매우 많았으나 영적으로는 미약하였다.

    때문에 "너는 살아 있다고 말하나 실은 죽어가고 있다!"란 책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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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디게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라오디게아는 현재명도 라오디케아 이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양모가 풍부하고 안약 등 의약품이 유명했으므로 재물의 유혹과 생활의 편안함으로 미지근한 교회로 책망을 받았다. 특히 라오디케아 지역은 물이 좋지 않아 6.5KM 떨어진 히에라볼리로 부터 관을 통해 온천수를 공급받았고 또한 골로새로부터는 냉수를 공급받았으나 오는 도중 물이 식어 미지근하게 되었다. 그런데 히에라볼리의 온천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는 물이 되는데, 계시록에서 이것을 신앙의 빈곤함에 비유하여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또한 이 물은 광물질이 섞여있어 마시기에 부적당함으로 입에서 토하여 내치게 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1710년과 1899년 대 지진 때 이곳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현재 복원되지 않은 채 폐허 속에 로마식 야외운동장과 원형극장 터, 그리고 폐허 속에 십자가가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는 돌무더기가 남아있어 교회 터로 추정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53-58년경) 에베소에서 27개월 가까이 머물 때 그의 제자 골로새 출신 에바부로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450여리 떨어진 곳에 골로새 교회(골 1:6-7)와, 히에라볼리와 리오디게아 교회도 세운 것 같다(골 4:12-16). 사도 요한은 이 교회를 호되게 꾸짖었다(계 3:14-22). 이곳의 교우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영적으로는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비잔틴 제국은 13세기까지 이 고을을 방어하다가 셀주크 투루크 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1710년과 1899년에 지진으로 심하게 파괴된 이곳을 1961-1963년 케나다 퀘백시의 라빌 대학교 고고학 팀이 발굴 작업으로 로마식 야외 운동장과 두 개의 큰 야외 원형극장 터가 발견 되었다. 아직도 유적 대부분이 땅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교회

    필라델피아는 현재명으로 알라세히르이다. 주님께 칭찬만 받았던 교회로 초대교회 당시 교회는 크지 않았으나 디오니소스 신전과 황제 숭배의 핍박을 이겨낸 교회였다. 현재의 유적은 동 로마 제국 비잔틴 시대(AD600년경)에 세운 것으로 성 요한의 교회로 세워졌다. B.C 159-138 베르가모의 왕 앗달로스(Attalus)2세가 동부 진출의 전초기지로 이 지역의 도시를 설립하였고, 자신의 칭호를 따서 필라델피아로 명명했다. 이곳은 사르디스, 베르가모 그리고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산업이었다.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이 도시가 대파되었다. 로마황제' 디베리우수' 는 이 도시를 건설하는데 크게 도와주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이에 감사하며 로마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웠다. 그 크기는 약 100m×50m 이고. 신전 둘레는 56개의 석주가 들어있다. 이 신전은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로마황제 숭배의 도시에 초대교회가 세워졌고 비잔틴시대에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신전의 후면에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지진이 자주 일어났던 필라델피아는 1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도시대에 살고 있었다. 폴리갑이 순교할 때 필라델피아의 신자 10명이 순교하였고 자주 일어나는 지진으로 이곳 신자들은 불안했으며 이 불안은 이들의 신앙을 뜨겁게 했다. 14세기경 주변이 모두 다 오스만 트르크군에게 점령당했으나 필라델피아만은 그리스도교 도시로 자체방어를 하더니 1379년 비잔틴 황제 요한 5세와 오스만 트르크 슘탄 뮤라트1세 간에 정치적 거레로 오스만 제국에 편입 되었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산업이며 농산물로는 포도를 재배하였다. 현재에도 이 마을 주변 수십 Km까지 방대한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필라델피아 교회에서는 소아시아 내의 300여개의 교회에 성찬식에 쓸 포도주를 무료로 공급하였기 때문에 형제사랑을 실천한 교회이기도 했다. 사도요한에 의해 교회는 강하지 않으나 그 식구들은 충성스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곳이다. 오늘 날 비잔틴 시대에 세운 교회 터가 남아 있는데 3개의 큰 기둥과 거기에 그려진 벽화가 비바람에 마모되어 가고 있다.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 3:7-13) 빌라델비아 교회는 소아시아 7교회 중 서머나 교회와 같이 주님으로 부터 책망을 받지 않고 칭찬만 받은 교회이다. 이 두 교회는 외부적 으로는 유대인들을 통해서 큰 환난을 받았던 교회였다. 1.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계 3:7). * 다윗의 열쇠 – 하나님의 절대왕권을 의미한다. 2.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 것을 칭찬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 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8). * 내 이름 - 빌라델비아 교회가 왜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의 말씀을 끝까지 잘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것 때문에 칭찬을 들었을까? 그 이유는 그 복음의 진리를 비방하고, 부인하려는 무리들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가 왜 역사상 사라지는 교회가 되었는가?를 가지고 살펴보는 가운데 놀라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소아시아(터키)를 비롯하여 중동나라들이 이슬람 국가들이 되면서 복음의 진리를 믿던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이슬람으로 넘어갔던 역사를 보았다(610년 마호메트 / 이슬람교창시). 3. 자칭 유대인들을 개종시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함을 칭찬하셨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9). * 사탄의 회당 – 당시에 유대인들은 혈통적으로 그들만이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을 얻는다고 주장을 했다. 따라서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고 주장하는 초대교회를 가장 많이 핍박했다. 그래서 그 유대인들의 무리를 가리켜서 “사탄의 회당, 사탄의 무리, 거짓말한 자들”이라 표현. 4. 오직 말씀으로 시험을 이겨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 것을 충고하셨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 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 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0-11). * 시험의 때 – 예수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핍박 5.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으로 되게 하신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 을 들을지어다”(계 3:12-13). * 성전의 기둥 – 빌라델비아 지방은 지진이 많이 일어난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나도 성전의 기둥들은 그대로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은 모든 교회가 다 멸망해도 끝까지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교회는 망하지 않게 해 주겠다는 뜻이다. 매주 14,100 여명의 회원님들에게 한번씩 보내는 칼럼입니다. 서울 강서교회 김창환 목사(문지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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