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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와 목회자의 성장론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18-01-31 (수) 09:04 6년전 1821  

(제목을 신학자 성경학자와 목회자의 성장론이라고 하여도 될 것이다.

근래에 교회성장론이 교계와 모든 교회의 목표가 되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사람인 교인의 성장론이어야 할 것이다.

교인의 성장론을 말한다면 동시에 또는 먼저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목회자와 신학자 성경학자의 성장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한국 교계가 근래에 가장 자성하여야 할 점이 교인 수평이동의 교회성장론과 그것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교인이동의 특정교회 성장론이다. 이것은 세상 기업에서나 할 일일지 모르지만 교회에서는 바람직하다 할 수 없다. 주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세우신 교회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일곱교회에 주시는 말씀 중에서 이러한 류의 교회성장론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교회의 외면적인 면에 대해서 강조하거나 말씀 내용이 없다. 오히려 적은 능력 즉 적은 자원을 가지고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신실한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 책망이 없고 칭찬만 하였고 환난과 궁핍이 많은 서머나 교회에 영적인 부요함에 대하여 책망이 없고 칭찬만 있다. 이 두 교회는 책망이 없는 교회이고 칭찬만 있는 교회이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교인의 영적 성장보다 외형적인 성장을 거의 모든 교회가 한 때의 붐처럼 올인 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미 자립 교회는 그렇다하여도 왜 그렇게 모든 교회가 주님의 교회인데 수평이동의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였는지 다른 무엇보다도 자성할 일일 것이다.

 

수많은 무명의 목회자와 무명의 신실한 믿음의 용사들의 간증이 있다. 그것을 간과하고 만 것이다. 몇몇의 스타와 대형교회의 외형과 프로그램 등등 높여지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님이 주신 은혜와 복을 생각하며 오직 주님만을 높여야 했다. 그런데 그 무엇의 외형적 실적과 과시와 그 결과로 마치 자신들의 방법과 그 무엇인 것으로 높여지고 붐을 이루었다. 그것이 자성할 문제이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통해 오직 주님만 높여야 했다. 그러나 스타와 프로그램 외형적 그 무엇이 우상화가 된 경향을 한국교계가 보인 것이다. 사실은 그 모든 복도 주님이 주신 것인데 말이다. 주님만을 높여야 했다.

 

사람이 필요이상으로 높여지다가 연약한 인생의 허물이 보여지고 또는 과장되고 낙상하여 외상 내상을 입고 한국교계 전체가 피해를 입은 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반성하며 뼈아프게 자성하여야 할 것이다.

빙점이라는 소설로 알려진 작가는 자신의 가게가 너무 잘 되어서 우리 가게만 이렇게 잘 되면 다른 가게는 어떻게 하겠느냐 면서 일찍 문을 닫고 그 시간에 소설을 쓴 것이 그 유명한 빙점이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교회가 무엇 때문에 오직 우리 교회로 교인을 오게 하는 것 이었는가 특별히 대형교회는 깊은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대형교회를 이루고 목회자가 무슨 스타나 영웅이 되게 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보니 목회자도 연약한 사람인데 무슨 허물이나 미스테익이 있을 수 있고 그것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올라갔다가 낙상을 하고 외상 내상을 입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그래 결국 교회가 같이 외상 내상등을 입는 형국이다. 아무리 대형교회 초대형교회이어도 목회자가 그렇게 높이 올라갈 이유가 없었다. 오직 높이고 영광 받으시고 영광 돌릴 분은 주님이시어야 하였다. 외면적으로 빌라델비아교회나 서머나교회 같은 상황은 교만 할래야 교만할 수가 없어서 차라리 다행일지도 오히려 칭찬의 여건이 더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주님의 은혜 그리고 수많은 무명의 목회자와 교인들의 역할이 컸는데 몇 사람이 스타 영웅 우상이 되어버리는 또는 만든 것은 아니었는가, 이것에 대한 뼈아픈 자성이 필요하다.

 

교회가 외형적인 것 보다 사람인 교인의 성장에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이 기쁨이고 보람이고 좀 더 감동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인의 성장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교인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목회자와 성경학자들의 성장에 대해서도 한번 돌아보아야 할 것이라는 자성이 든다.

성경을 가르치는 학도를 가르치는 직임을 신학자라고 하는데 생각하여 보면 그 용어가 적절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신학자라는 용어가 없다는 말도 들었는데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할 것이다. 성경학자 율법학자라는 말이 더 타당 할 것이다. 신학자라고 하면 어디 외국에서 무슨 여러 학설을 배워 와서 논하는 역할도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여러 학설 또는 학설에 대한 학설들이라면 그것을 누가 판단하고 검증하겠는가, 그리고 그 학설이 시간 지나 사라져 버린다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 언제까지나 하나님에 대한 학설을 공부하는 것도 그렇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학자라고 하지 않고 학자라고 하였는데 성경학자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학자라고 하였다.

성경의 다음의 번역을 보면서 과연 성경학자 목회자의 성경적 현주소를 생각하며 자성하여 본다. 그간 우리가 자성해야할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보다 교인의 성장 그리고 그 교인들이 하나님 사랑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리고 영의 양식으로 말씀을 먹는 것인데 그 일을 감당하는 성경학자와 목회자의 성장은 어떠한가를 우리 모두 돌아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한국에서의 성경 번역 특히 좀 더 어려운 구약 그리고 더욱 더 번역이 어려운 시편을 포함한 구약의 번역에 관하여 하나님의 손길이었다는 내용을 언급한 바 있다. 만약 가장 최초로 번역한 성경이 너무나 불충분하였다면 그리고 오류가 많았다면 그 영의 양식을 먹는 교인들은 어찌할 뻔 하였던가, 다음을 보자.

 

1.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it and take to heart what is written in it, because the time is near. (계1:3)

 

 

때가 가까움이라. 세상 시각의 달력의 시간적 미래가 아니다.

어떤 쉬운번역은 미래 동사를 쓴 번역도 보았는데 미래동사가 아니다. 때는 카이로스의 때이다. 카이로스의 때는 영원한 현재인 것이다.

원문에도 미래 동사를 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번역자는 그 깊은 내용을 잘 모르는 것이고 월권이다. 상당한 실력이라고 인정해 주는 번역팀이 이러하다면 이것이 우리 대부분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자성하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번역은 듣는 자들을 듣는 자로 수정하였다. 역시 정확하게 잘 번역된 내용을 원문과도 다르게 잘못 수정한 것이다. 그 당시는 종이도 없었고 인쇄 기술도 없었고 한 사람이 읽으면 여러 사람들이 들은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들은 복수이다. 듣는 자로 수정한 것이 이것을 개역이 잘못 번역한 줄로 아는 체 하며 수정하였는지 무슨 이유로 수정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왜 잘 번역된 내용을 이렇게 수정하였는지 이러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누구의 현주소인가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학자와 목회자는 좀 더 성장해야 했다고 자성하여야 할 것이다.


 

1.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어떤 쉬운 번역에는 ' 나라와 제사장' 이 아니라 제사장의 나라들로 번역을 하였다. 

예수 믿는 우리가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나라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나라와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원문의 뜻과도 다른 제사장의 나라들이 아닌 것이다.

물론 구약에 제사장의 나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러한 뜻이 아니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뜻이다성령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다. 그래서 and 를 쓴 것이다.

* 카이(kai) 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and , both also , even 인 것이다. of 라는 뜻은 없는 것이다.

 

(계 1:6 )

and has made us to be a kingdom and priests to serve his God and Father--to him be glory and power for ever and ever! Amen.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라와 제사장을 삼았다는 내용인 것이다. 우리를 성도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삼았다는 놀라운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을 삼았다는 것이다.

 

1. 찬송가에 대하여도 언급해야 한다면 예배드리러 와서 좀 특별한 경우는 대부분 공감을 못하고 부를 수 있다. 부르면서도 내 형편과 공감이 덜 되는 ,, 가령 온 천하 만물 우러러 같은 찬송을 누구나 함께 부를 수 있다. 특별한 상황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모든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조금 자기의 형편과 동떨어진 가사에 전혀 공감을 못하는 가사 보다 함께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예배 찬송 , 그리고 필요이상으로 기존 가사를 바꾼 것에 대하여, 그러나 여기까지 관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모두가 어떤 상황에서도 같이 공감하여 부를 수 있는 예배 찬송가의 가사가 의외로 적다는 것이다.

특별한 상황에서 개인 간증의 내용은 부르면서 초신자나 젊은이들에게 어떠한 마음이겠는가, 가사도 의외로 필요이상으로 많이 수정하였는데 수정한 것이 더 적절한지도, 왜 기존의 가사를 그렇게 수정하였는지 전에 번역한 가사를 무시하는 교만이 아닌지 보아야 할 것이다. 다행히 성경이 아니고 찬송가이니 더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그렇고,

그럼에도 찬송을 선택하다가 야곱같이 ** 한 가사를 보았다. 어떤 면으로 이해를 할 수 있고 개인의 판단으로 개인적으로 그렇게 보고 위로 받을 수도 있겠다.  현존하지 않는 그 야곱은 인내 근면 축복관 등등 큰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인격적으로 비하하는 듯한 그것도 개인의 견해 일 수 있는 가사를 넣어 그 찬송을 부를 때마다 그를 인격적으로 매도하는 듯 한 가사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야곱이 찬송가 가사에 들어와서 어떤 면에서 야곱을 비하하는 가사를 공감하든 안하든 누구나 불러야 한다. 그것은 개인적 판단이나 간증일 수 있는, 작사자가 우리들도 나도 그 같이 간사한 면이 있는데 사용하여 주셨다는 간증의 가사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왜 그를 어떤 부정적인 용어로 규정하였는지 감수과정에서 수정하든지 하여야 했을 것이다. 야곱의 장점을 많이 보고 야곱을 ** 하게만 보고 있지 않는데 찬송가를 부르는 모든 분들에게 ** 한 야곱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야곱의 인내 근면 신앙 축복관등 높이 대단히 높이 평가할 부분이 많은데 적절하지 않는 개인적 판단을 근거로 해서 부를 때마다 그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야곱이 이 시대의 찬송가에 들어와서 인격의 비하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찬송 부르는 모두가 그것을 노래해야 하는 것이다.

 

( 이것이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선의로도 볼 수도 있지만, 이러한 가사는 감수 과정에서 수정하여야 했을 것이다. 야곱이 무엇이 그렇게 ** 하다고 그를 그렇게 매도하는 가사를 부른다는 것인가, 당연히 감수과정에서 수정하였어야 했을 것이다. 그 가사를 쓴 분은 상당한 분인 것으로 보인다. 그 가사가 개인적으로는 자기를 돌아보며 그 부분을 썼다는 것은 이해할 수도 있고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의 단점도 있지만 그 많고 많은 장점의 내용을 간과하고, 한 단점 그것도 보는 분에 따라 달리볼 수 있는데, 부정적 한 단어로 그 사람을 규정하는 찬송가 가사는 그렇다. 야곱의 근면 인내 신앙 하나님의 절대 의지의 신앙적 축복관 등 높이 평가할 부분이 많다. 이부분은 감수 과정에서 검토하고 수정하거나 걸러져야 했을 것이다.)

 

한편 찬송가중에서 주일예배에 함께 공감하여 부를 찬송이 의외로 적은 것 같다. 좀 특별한 상황에서 부르는 찬송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등은 누구나 힘차고 씩씩하게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실적인 상황이 아닌 특별한 상황에서 심적 애통으로 애절하게 불러야 할 찬송이 많다면 그렇지 않는 상황의 사람들은 억지로 거기에 몰입하거나 공감이 전혀 안된 마음의 상태에서 찬송을 불러야 한다.

더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감동을 받으며 더 마음에 닿은 가사들과 곡들이 있어야 하겠다. 그렇다면 그러한 작사자들과 작곡자들이 많아야 할 것이다. 그것도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관계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가르치는 성경학자와 목회자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면 성경학자와 목회자의 성장에 더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지 않는 성가 또는 복음의 노래들 중에서 선곡하여 수록하여야 할 것이고 한국적인 곡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선곡된 가사들 중에 모두에게 공감이 안 되는 가사가 있다면 가사를 감수할 때 진지하고 자세하게 검증하고 필요하면 수정 하였어야 할 것이었다.

                                                                             

                                                                     < 성광교회 이동원 목사 드림>

 

 

=. 묵상 (meditation)

1. 믿음 안에서 성장과 기쁨

( 빌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Convinced of this, I know that I will remain, and I will continue with all of you for your progress and joy in the faith,

 

1. 목회자의 성장 발전 진보

(딤전4:15)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Be diligent in these matters; give yourself wholly to them, so that everyone may see your progress.

 

1. 하나님의 말씀으로

(딤후3:16-17)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3:16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3:17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1. 실상은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

서머나 교회는 칭찬만 받은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라고 하셨다.

'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

I know your afflictions and your poverty--yet you are rich! ,,

 

1. 다음 구절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 감탄사, 보라! 라고 시작하다.

 

'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3:8)

빌라델비아 교회가 보라 라는 감탄사로 시작하는 칭찬을 받은 것은 무엇때문이었는가,

(* 볼지어다,원) 이두,, (감탄사) 보라 ! , 감탄사;보라, behold, see, lo)


지금 한국 교계 교회의 

성경학자, 신학자, 목회자, 교인 ,직분자, 교사들은 어떠한 성장론을 말하고 성장해야 할 것인가,.

                                                                                                  ( - 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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