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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번역과 말씀을 위한 종교개혁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18-03-07 (수) 08:50 6년전 2226  

개정 번역을 읽으면서 끝이 없네 할 정도이다.

성경의 내용 중 구약에서 하나님이 직접하신 계시의 말씀, 그리고 신약에서 육신으로 오셔서 직접하신 말씀은 특별히 정확하게 번역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같이 받아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개역성경은 한국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 만큼 잘 번역하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특히 신약 보다 구약이 번역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더욱 시편이 번역하기가 어려울 것인데 객관적으로 보아도 가장 잘 준비된 분을 통해서 그 개역 성경을 번역케 하셨다는 점에서 놀랍다. 그 사실 만 잘 알아도 성경을 읽기 전에 큰 은혜가 된다. 그럼에도 극히 일부분 수정 보완할 부분도 있을 것이긴 할 것이다.

한글 개정 번역을 대부분은 미리 볼 수 없었다. 누구나 당연히 잘 개정이 되었겠지 하고 볼 것이다. 그러나 그 개정을 보고 한국 교회에 좀 조심스러운 단어이지만 영적 부흥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고 은혜를 주셨다. 한국 초대교회는 이 민족에 복음을 이라는 열정으로 가득 찼고 놀라운 전도와 영적 성장을 주셨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이왕 교인을 우리교회 내 교회로의 이동성장의 세상 기업적 흐름이 가득하였다. 교인들의 영적 부요와 성장보다 수평이동의 숫자 성장에만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의 개정 역이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 교계 학계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 하나님의 말씀보다 외적인 여러 것들에 관심이 많았고 학자들은 외국에 가서 어떤 유행 학설을 배우는 중에 성경을 등한히 한 것이 아닌가 자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서구의 학자들이 성경을 더 잘 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다면 같이 연구 묵상하는 것은 몰라도 꼭 그들에게 무슨 학설을 배워야 만 할 것인가. 사실 기본을 잘 준비하고 성경을 묵상 연구한다면 사실은 감동을 주는 내용이 무궁 무진할 정도이어서 그것 만 잘 전하는 것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무슨 피차 어려운 별 유익이 없고 혼돈 주는 학설로 시간을 보낼 필요는 크지 않을 것이다.)

개정 번역을 읽으면서 자주 마음이 그렇다. 어떻게 잘 번역 된 개역을 이렇게 개정하였을까,  근래에도 여러 곳을 보고 보았는데 이 부분을 보고 먼저 올리는 바이다.

 

다음은 기도의 헌장이라고도 한다. 예수님이 직접하신 말씀이다.

 

1. 구하라 주실 것으라 찾을 것 두드리라 열릴 것,

(마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개역)

 

그런데 개정은

'찾을 것'을 찾아낼 것으로 개정하였다.

 

그런데 찾을 것 대신에 찾아 낼 것이라는 것은 위에서 찾게 해 주신다는 의미보다 자신이 노력해서 찾아낸 것인 뜻이 된다. 인간 의지의 노력의 결과라는 뉘앙스가 있다. 그러면 기도의 구하고 응답이라고 하기보다 자기의 노력의 결과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달다 와 같이 열심히 찾고 찾으면 찾아낸 다는 뜻이다. 위에서 응답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기어코 찾아내는 뜻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게 해 주신다는 뜻 보다는 내 노력으로 찾아내고야 말거야 하는 뜻이라는, 이것은 국어 상식적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부분만을 보면 노력의 헌장이라고 하지 기도의 헌장이라고 하겠는가, 개정수정의 많은 부분의 문장은 국어의 실력에서도 의아한 생각을 하게 한다. 이미 많은 부분을 언급하였지만 계속해 좀 더 언급할 수밖에 없다.

찾아낼 것이라 것은 내용적으로는 물론이고 국어 운율적으로도 그 흐름이 너무나 부자연스럽다. 더구나 찾을 것이 틀린 번역이 아닌데 자연스럽고 적절하고 정확한 번역인데 왜 찾아낼 것으로 수정하였는지 한국 교계의 언어적 수준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한국 교계가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읽고 묵상하여 교인 각자의 영적 성장과 유익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근래에 수평이동의 교회 성장에 온 교계가 올인 하다 보니 경전의 개정이 이렇게 되었고 교계 리더급 분들도 대부분은 그것을 잘 모르기까지 하는 것 같다. 성경 묵상연구보다 어떻게든 이왕 믿는 분들 이동의 교인 수 성장의 세상 기업적 목표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민족에 복음을 의 자세로 열심을 다해 세계 교회사에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받았고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고 좀 더 겸손하며 예수님만 높여야 했는데 숫자 건물 프로그램 과시 자랑 등등으로 결국 모두가 상당한 손해를 보았다. 이제라도 외형적 그 무엇보다 진정한 교회인 사람인 교인의 성장으로 신앙인으로서 더욱 복된 신앙생활을 하며서로가 윈윈하며 더욱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것은 먼저 주님만을 높이고 개역을 중심으로 극히 일부분만 더욱 보완 완벽하게 하고 말씀 묵상으로 주님을 만나고 이 땅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하면 한반도 영적 부흥과 그 결과 물리적 번영도 따라 올 것이다.

( 1. 수많은 분들이 읽고 암송하고 심지어 믿지 않은 분들도 인용하는 구절이다.

2. 주석가 분들에 의하여 이미 검증이 잘 되었다.

3. 내용은 물론이지만 운율적으로도 참 잘 되었다.

주실 것 , 찾을 것, 열릴 것,,

4. 그런데 무엇이 어떠하다고 난데 없이 '찾아 낼 것'으로 개정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뜻이고 무슨 실력의 과시 자랑인지, 지식적 교만인지 보아야 할 것이다.

5.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주실 것은 위엣 분이 주신 다는 뜻이고, 해 낼 것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한다는 것이다.)

 

2. 희생인가 제사인가,

개역 성경은 출애굽의 목적을

섬기기 위해서

희생을 드리기 위해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섬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림,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킴

이 세 가지는 단어는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다. 다 제사 예배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제사 예배에는 희생과 절기 즉 어린양의 죽음과 축제가 포함되어있다. 영적 의미와 영적 기쁨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개역 성경은 역시 놀라울 정도로 잘 번역이 되어있다.

 

그런데 개정은 희생을 제사로 수정하여 버렸다. 희생이라는 단어가 어렵다고 그러한 모양인데 오히려 어려워야 이 뜻이 무엇일까, 그 깊은 의미를 깨닫고 또한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으심을 의미를 깨달으며 그 깊은 의미를 알고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다.

혹 섬기다를 제사 예배로 수정하였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무엇을 알고 수정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희생을 제사로 수정하였다는 것은 성경 전체를 단어의 의미를 그리고 원어의 뜻을 모르고 권위 있는 영어성경의 번역도 알지 못하고 읽지 않는 듯하다.

이것이 한국교계의 한국 교계의 지도자의 학자 분들의 현주소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한국교계는 말씀으로 돌아가고 말씀이 흥왕하는 영적 성장을 위한 종교개혁을 하여야 할 때일 것이다. 개혁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3. 시내(city) 인가 성(city)인가,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14: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14: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개역)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14: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14: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개정)

 

시외로 나갔다가 성으로 들어 갔다는 말이 있겠는가, 한 구절 사이에 역사가 수백년 뒤로 되돌아갔다는 것인가 무엇인가, 어떻게 이러한 수정이 가능한지, 어떻게 이러한 문장이 경전에 번역되어 있는지, 유구무언일 수 밖에 없다.

 

개정은 성 밖을 시외로 수정하였다. 그 당시 시내 시외 라는 말이 있겠는가마는 그것은 그렇다하여도 성을 시로 번역하였다면 그 다음도 시로 하여야 하는데 성으로 그대로 이었다.

영어 성경으로 보자.

14:19 Then some Jews came from Antioch and Iconium and won the crowd over. They stoned Paul and dragged him outside the city, thinking he was dead.

 

14:20 But after the disciples had gathered around him, he got up and went back into the city. The next day he and Barnabas left for Derbe.

 

14:21 They preached the good news in that city and won a large number of disciples. Then they returned to Lystra, Iconium and Antioch,

( 개역 성경에 city 를 성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개정 수정은 시내( city)로 수정하였다. 그 당시 요즈음의 도시를 의미하는 시내라는 말이 적절할까, 그런데 그건 그렇다 하여도 시내로 수정하였으면 그 시내이어야지 그 다음은 또 성이라고 하였다.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실력의 문제 뿐 아니라 너무나 무성의한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을 한국 교계가 교계의 지도자 성경학자 분들이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러하다.

근래 한국 교계가 수평이동의 교회 성장론으로 세상 기업의 방법론에 대부분이 올인 하는 사이에 정작 영적 성장을 위한 말씀은 어떠한지, 그리고 서구의 외국 유학을 가서 말씀을 더 연구하는 보다도 무슨 유행학설이나 어설프게 배운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볼 때이다. 한국 교계 학계가 말씀으로 흥왕하는 종교개혁이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계의 목회자 분들은 경전의 원어는 다 읽을 수 없다해도 사전을 찾아볼 수 있는 정도면 되는 것이고 잘 번역된 영어 성경은 기본적으로 익숙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평신도 분들에게도 확산 되어도 좋을 것이다.)

                                                                                 < 성광교회 이동원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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