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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연구 - 김재준 목사(1935년 2월 10일)

장공기념사… (기타,,기타) 2018-04-02 (월) 16:52 6년전 1656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에 對(대)한 硏究(연구)


[落穗(낙수)]
1935년 2월 10일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로 본 그리스도의 復活(부활)


튜빙겐의 키틸 敎授(교수)는 말하기를 그리스도敎(교)는 徹頭徹尾(철두철미)한 歷史的(역사적) 宗敎(종교)이다. 이는 모든 어떤 特秀(특수)한 人格(인격), 場所(장소) 時間(시간)에 關係(관계)된 具體的(구체적) 事件(사건)의 記錄(기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敎(교)는 우선 이 歷史的(역사적) 意味(의미)에서 理解(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復活紀事(부활기사)에 對(대)해서도 우선 그 歷史的(역사적) 考察(고찰)부터 始作(시작)함이 堅實(견실)한 硏究方法(연구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過去(과거)를 歷史的(역사적)로 考察(고찰)할 때 第一(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이 果然事實(과연사실)이었느냐? 이것이 果然(과연) 客觀的(객관적) 事實(사실)로 존재한 것이었느냐?」하는 問題(문제)요 「이것이 그럴理(리)가 있느냐?」 「이것이 어떤 自然法則下(자연법칙하)에서 이렇게 되었느냐?」하는 所謂(소위) 哲學的(철학적) 解釋(해석)이나 科學的(과학적) 說明(설명)은 第二(제이), 第三(제삼)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事實(사실)의 眞實性(진실성)은 그 事物(사물)에 對(대)한 哲學的(철학적) 或(혹)은 科學的(과학적) 說明(설명)의 有無(유무)에 依(의)하여 左右(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太陽(태양)이 地球(지구)를 돈다고 說明(설명)하던 때나 地球(지구)가 太陽(태양)을 돈다고 說明(설명)하는 이때나 太陽自體(태양자체)의 實在性(실재성) 眞實性(진실성)에는 何等(하등) 差異(차이)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周圍(주위)에는 우리의 有限(유한)한 頭腦(두뇌)로서 至極(지극)히 說明(설명)할 수 없는 「事實(사실)」이 얼마든지 存在(존재)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說明(설명)할 수 있든 없든간에 그것이 客觀的(객관적) 事實(사실)라면 그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으며 사실로 판명된 때에는 그 실재를 용인 안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에 對(대)해서도 이것이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이었다면 우리가 哲學的(철학적)으로 解釋(해석)하기 어렵고 科學的(과학적)으로 說明(설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 事實(사실) 앞에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그 眞實性(진실성)을 容忍(용인)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은 果然(과연)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이었는가? 우선 이것이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가 아니었다는 學者(학자)의 設(설)을 檢討(검토)함으로 말미암아 그 反證(반증)을 찾아 보기로 하자. 이 學說(학설)은 세 가지로 大別(대별)할 수 있다.


(1)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復活(부활)한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죽지 않았던 것이라는 設(설)이다. 그리스도가 十字架(십자가)에 못박혀서 氣絶(기절)했었으나 十字架(십자가)에서 내리워져 石坑(석갱) 속에 누이고 못자국을 싸고 香油(향유)를 바르고 應急措置(응급조치)를 당할 때 다시 살아나서 무덤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죽이기 爲(위)하여 그렇게 애쓰고 그렇게 渴望(갈망)하던 官憲(관헌)들과 바리새 敎人(교인)들이 그 死生(사생) 判明(판명)되기 前(전)에 그 屍體(시체)를 十字架(십자가)에서 내렸을 理(리)가 어디 있는가? 十字架(십자가)에 못박혀서 피를 흠뻑 흘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로 물과 피를 있는대로 쏟은 그리스도가 가령 기운을 차린다니 어찌 數時間內(수시간내)에 勝利(승리)의 氣像(기상), 靈光(영광)의 主(주)로 보일 수 있겠는가? 도리어 蕭條落寞(소조낙막)의 感(감)을 줄 것이 아닌가? 이 說(설)은 너무나 어이없는 說(설)이므로 不合理(불합리)라는 것보다도 學的(학적) 良心(양심)의 破産(파산)을 暴露(폭로)하여 自身(자신)의 不道德(부도덕)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2) 다음으로 그리스도가 죽은 것은 事實(사실)이나 다시 산 것은 아니라는 說(설)이다. 만일 다시 살지 않았다면 우선 그 屍體(시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屍體(시체)가 없으니 어찌된 셈인가? 그 시체 두었던 무덤은 어찌하여 비었는가? 그것은 어떤者(자)가 屍體(시체)를 도적해다가 감추어 버린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누가 감추었을까? 빌라도나 猶太祭司長(유태제사장)들인가? 그네들은 예수의 屍體(시체)가 꼭 두었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기를 바라서 親(친)히 무덤門(문)을 封印(봉인)하고 兵丁(병정)을 보내며 守番(수번)시킨 者(자)들이니 自己(자기)네 便(편)에서 감출리는 없을 것이며 設使(설사) 감추었었다 하더라도 弟子(제자)들이 復活(부활)를 宣傳(선전)할 때에는 여기 이렇게 그의 屍體(시체)가 있는데 너희가 그런 虛妄(허망)한 말을 하는가? 하고 屍體(시체)를 證據物(증거물)로 삼아 弟子(제자)들의 입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 동산 主人(주인)인 아리마대의 요셉이나 막달라 마리아나 동산지기나 弟子(제자)들 中(중)에 한 사람이 그 屍體(시체)를 盜去(도거)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만 數日以內(수일이내)에 復活(부활)의 消息(소식)이 넓게 퍼진 것이 事實(사실)인데 이 流言(유언)을 막기 위해서라도 法(법)에 밝은 로마 官憲(관헌)으서 이를 默過(묵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선 第一嫌疑者(제일혐의자)인 요셉부터 調査(조사)했을 것이며 其他(기타) 그럴듯한 사람들은 일일이 調査(조사)해서 그 蜚語根絶(비어근절)할 資料(자료)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自明(자명)의 事實(사실)로 判定(판명)되었기 때문에 그네들은 罔知所指(망지소지)해서 그런말 다시 하지 말라고 威脅(위협)함에 그치고 復活(부활)를 不定(부정)할 何等(하등)의 客觀的(객관적) 事實(사실)를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가령 우리가 도무지 想像(상상)도 못할 어떤 사람이 감추었다고 생각해 보아도 그런 虛構(허구)를 通(통)하여 落寞(낙막)한 弟子(제자)들에게 어떤 새 生命(생명) 새 希望(희망)이 생기었을까? 또 實地(실지)로 復活(부활)한 그리스도의 聲咳(성해)에 接(접)한 수백의 간증은 무엇으로 說明(설명)할까? 그러므로 이 設(설)은 全(전)혀 歷史的(역사적) 根據(근거)를 無視(무시)한 臆說(억설)임을 避(피)치 못할 것이다.


(3) 그러면 復活(부활)한 그리스도를 目睹(목도)했노라는 간증은 果然(과연) 客觀的(객관적) 事實(사실)일까? 近代(근대) 心理學(심리학)의 發達(발달)을 따라 이것을 한 主觀(주관)의 投影(투영)으로 說明(설명)하려는 者(자)가 많다. 卽(즉)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던 까닭에 그리스도의 形狀(형상)이 눈에 선해서 보는 것 같이 느껴진 것이요, 정말 그리스도가 客觀的(객관적)으로 存在(존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幻想(환상)」(Hallucination)을 본 것이었다고 說明(설명)한다. 그러나 弟子(제자)들은 그때 決(결)코 그렇게 無批判的(무비판적)으로 復活(부활)을 承認(승인)할만큼 淺薄(천박)한 心理的(심리적) 狀態(상태)에 빠지지는 않았었다. 그들에게는 그 反對(반대)의 態度(태도)가 더욱 많았다. 그러므로 女人(여인)들이 그 消息(소식)을 傳(전)할 때 女人(여인)들의 말이 「허탄한 듯 하여 믿지 않았다」(눅 24:11)고 했으며 도마같은 이는 손으로 그의 옆구리에 넣어보기 前(전)에는 믿지 않겠다는 冷情(냉정)한 精神的(정신적) 狀態(상태)에 있었던 것이 事實(사실)이니 이런 이들에게 幻想(환상)이란 것이 보일 수 없으나 보인데야 幻想(환상)을 보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意識的(의식적)으로 批判(비판)하는 者(자) 自身(자신)이 그 弟子(제자)들이었으매 妄信(망신)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 分明(분명)한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弟子(제자)들이 예수의 죽은 후에 聖經(성경)을 仔細(자세)히 상고하며 舊約(구약)의 메시아 豫言(예언)과 저들이 메시아인줄 믿던 예수와를 對照(대조)하는 中(중) 그가 메시아실진대 「반드시 살아야 할 것이다」는 말이 아무도 모르게 퍼지게 되었으며 그 말이 또 보태어져서 「그가 산 것을 보았다」하는 결론을 얻었을 때 어떤 곳에서 「그가 살았다」하는 所聞(소문)까지 나게 된 것이라고 한다. 卽(즉) 流言(예언)이 不知中(부지중)에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처럼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이런 「訛傳(와전)」은 카임(Keim)이 指摘(지적)한 바와 같이 적어도 數年(수년) 或(혹) 數十年(수십년)의 時間(시간)을 지낸 다음에라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요 이틀 동안에 그렇게 없는 事實(사실)이 있는 것 같이 訛傳(와전)되어서 온 天下(천하)에 퍼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三日(삼일)에 復活(부활)하셨지만은 時間(시간)으로 따진다면 不過(불과) 滿(만) 1일반 밖에 안되는데 그 동안에 그렇게 複雜(복잡)한 精神的(정신적) 社會的(사회적) 階段(계단)을 밟아 主觀(주관)이 客觀的(객관적) 事實(사실)처럼 되었으리라는 것은 臆說中臆說(억설중억설)이다. 더구나 弟子(제자)들이 聖經(성경)으로 復活(부활)을 證據(증거)하게 된 것은 復活(부활)이란 事實(사실)을 본 다음에 그 事實(사실)의 意義(의의)를 解釋(해석)하기 爲(위)하여 必然的(필연적)으로 생겨난 것이요, 決(결)코 그 反對반대)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 說(설)을 主唱(주창)한 스트라우스(Strauss) 自身(자신)도 얼마 後(후)에는 그 誤診(오진)임을 自白(자백)하고 말았다.


以上(이상)은 消極的(소극적) 意味(의미)에서 復活(부활)이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임을 提示(제시)하였거니와 이제 積極的(적극적) 方面(방면)으로 그 事實(사실)을 考察(고찰)하기로 한다. 쌀리스베리 公은 말하기를 「모든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 가운데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처럼 確實無疑(확실무의)한 것은 없다. 왜 그런고 하니 事實(사실)이 없는 그리스도敎(교)의 存在(존재)를 說明(설명)할 수가 到底(도저)히 없는 까닭이다.」라고 했다. 事實(사실) 그리스도敎(교) 自體(자체)가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을 가장 크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1) 最後(최후)의 晚餐(만찬)을 나눌 때 까지도 그릇된 메시아觀(관)을 고치지 못하고 누가 크게 될까 하는 世俗的(세속적) 榮華(영화)를 바라던 弟子(제자)들이매 그 期待(기대)의 메시아가 十字架上(십자가상)의 이슬로 사라진 때 그 心情(심정)이 어떠하였을 것은 不言可想(불언가상)이다.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의 救贖者(구속자) 되기를 바랐더니」하는 엠마오 道中(도중)의 두 弟子(제자)의 會話(회화) 中(중)에는 「萬事休矣(만사휴의)」라는 落望(낙망)의 氣分(기분)이 품겨있다. 그들은 恐怖(공포) 不安(불안) 落望(낙망) 怨恨(원한) 等(등)의 散亂(산란)한 心緖(심서)에 싸여 아무러한 先後策(후속책)도 없이 하루 이틀 지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비치인 죽음의 그림자는 너무나 深刻(심각)했었기 때문에 죽음 以外(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할 餘裕(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는 天使(천사)의 하는 말을 들은 後(후)에도 오히려 예수의 屍體(시체) 없어진 것만 생각하고 울고 있었으며 마리아의 復活(부활) 消息(소식)을 듣고 무덤에 와 實地(실지)로 무덤 빈 것을 본 베드로도 한 奇異(기이)한 現狀(현상)이라고 確信(확신)없이 돌아갔으며 十一使徒中(십일사도중) 大部分(대부분)은 「女子(여자)의 허탄한 소리」라고 믿지 않으려 했으며 도마는 손으로 만져 보기 前(전)에는 믿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한 사람도 그리스도의 復活(부활)를 期待(기대)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 이렇듯 落望(낙망) 無氣力(무기력)했던 弟子(제자)들이 不過(불과) 數十一(수십일) 以內(이내)에 天下(천하)를 단숨에 征服(정복)하려는 衝天(충천)의 의기를 가지고 挑戰(도전)하게 된 것은 그 原因(원인)을 무엇으로 說明(설명)할까? 이렇듯이 믿지 않으려는 冷情(냉정)한 態度(태도)로 復活(부활) 消息(소식)을 대하던 弟子(제자)들이 不過(불과) 數十日內(수십일내)에 全(전) 生命(생명)을 걸어놓고 復活(부활)한 그리스도를 證據(증거)하며 그렇게 卑怯(비겁)하던 베드로가 죽음을 눈 앞에 보면서도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0:20)고 膽大(담대)히 외치게 된 그 原因(원인)을 무엇으로 說明(설명)할까? 꿈같은 幻想(환상)이 그렇게도 偉大(위대)한 新(신) 生命(생명)을 創造(창조)할 수 있을까? 人爲(인위)의 虛構虛說(허구허설)이 사람의 生命(생명)을 이렇게도 힘있게 할 수 있을까? 生命(생명)은 生命(생명)에서만 誕生(탄생)되는 것이며 確信(확신)은 實在(실재)에 부닥칠 때에만 생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이 事實(사실)이었기 때문에 그 事實(사실)을 證據(증거)하는 者(자)에게 새 確信(확신) 새 힘 새 勇氣(용기)가 생긴 것이요, 그 밖에는 아무 說明(설명)도 求(구)할 餘地(여지)가 없는 것이다(벧전 1:3). 그러므로 스트라우스는 이런 學說(학설) 저런 學說(학설)로 좀 新奇(신기)한 說明(설명)은 다 試驗(시험)해 보다가 終局(종국)은 다 失敗(실패)하고 「弟子(제자)들의 復活(부활)에 對(대)한 믿음의 原因(원인)은 예수의 復活(부활)을 外的(외적) 奇蹟的(기적적) 事件(사건)이라고 記述(기술)한 福音記者(복음기자)들의 말을 그대로 是認(시인)하는 때에만 滿足(만족)히 解釋(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2) 베드로나 요한이나 其他(기타) 모든 弟子(제자)들은 道德的(도덕적)으로 가장 嚴政(엄정)한 사람들임을 萬人(만인)이 公認(공인)하는 바이다. 마태 마가 요한 等(등)의 福音記事(복음기사)가 直接間接(직접간접)으로 이 使徒(사도)들과 關係(관계)되는 것이매 그 記事(기사)가 實記(실기)임에 틀림없으며 누가로 말할지라도 그가 科學的(과학적) 素養(소양)있는 醫學者(의학자)로서 모든 材料(재료)를 蒐集(수집)하여 「자세히 根源(근원)을 미루어 살핌으로」(눅 1:3) 그 福音(복음)을 著述(저술)한 것이니 그 歷史的(역사적) 眞實性(진실성)을 疑心(의심)할 餘地(여지)가 없다. 特(특)히 바울이 고린도前書(전서) 15장 3절에 말한 復活記錄(부활기록)은 하르낙(Harnak)의 年代表(연대표)에 依(의)한다면 主後(주후) 53年(년)에 쓴 것으로 最古(최고)의 復活記錄(부활기록)이라고 꼬데(Codet)는 말한다.


이 記錄(기록)은 바울이 直接(직접) 다른 使徒(사도)들에게 들은 것일 터이니 그가 회개한 後(후) 一(일), 二年(이년) 內(내)에 된 일일 것이다. 바울이 이 記錄(기록)을 고린도에 보낼 때에 復活(부활)한 그리스도를 目睹(목도)한 五百名(오백명) 中(중) 태반이나 아직도 살아 있다고 했으니 그러면 自己(자기) 以外(이외)에 적어도 二百五十餘名(이백오십여명)의 現存(현존)한 目擊者(목격자)를 列擧(열거)하면서 이 復活(부활)을 證據(증거)하는 바울이 어찌 實相(실상) 없는 허튼 소리를 할 수 있었으랴? 萬一(만일)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이 事實(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世上(세상)이 낳은 最大(최대)의 聖者(성자)들을 詐欺者(사기자)로 認(인)하며 萬世(만세)에 宣(선)한 最大(최대)의 生命運動(생명운동)을 虛構(허구)에 돌림이 될 것이니 惡魔(악마)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敢(감)히 이런 暴論邪說(폭론사설)을 勘當(감당)하랴. 그러므로 젤러(Zeller)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을 否認(부인)하려는 것은 歷史的(역사적) 根據(근거)에서가 아니라 哲學的(철학적) 學說(학설)에 根據(근거)한 것이라고 言明(언명)하였다. 勿論(물론) 自然人(자연인)의 入場(입장)에서 생각하는 때 復活(부활)은 不可解(불가해)의 것이며 經驗(경험)을 超越(초월)한 것이니 自然法則(자연법칙)을 重視(중시)하는 哲學者(철학자) 科學者(과학자)로서는 이에 容喙(용훼)할 資格(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하신 일이다. 「예수의 復活(부활)과 함께 무덤의 屍體(시체)가 없어진 것은 敵(적)이나 弟子(제자)가 다 함께 認定(인정)하는 바인데 이에 對(대)한 自然法則(자연법칙)으로의 說明(설명)은 全然(전연) 不可能(불가능)하다」고 벨하우젠(Welhausen)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미 序論(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이 歷史的(역사적)로 보아 움직일 수 없는 儼然(엄연)한 事實(사실)일진대 이 事實(사실)에 對(대)한 哲學的(철학적) 과학적 解釋(해석)이 이 事實(사실) 自體(자체)의 眞實性(진실성)을 左右(좌우)할 수 없는 以上(이상) 우리는 다만 謙遜(겸손)한 마음으로 神(신)의 偉大(위대)하신 奇蹟(기적)앞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復活體(부활체)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이 事實(사실)이라면 그 復活(부활)한 몸은 大體(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이것을 생각하기 前(전)에 우선 留意(유의)해야 할 것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과를 有機的(유기적)으로 關係(관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 만으로 復活(부활)을 믿은 것이 아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女人(여인)들과 베드로까지 무덤이 빈 것을 보았지마는 復活(부활)을 믿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復活(부활) 信仰(신앙)은 事實(사실) 「空塚(공총)」에 基因(기인)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自身(자신)의 顯現(현현)에 基因(기인)된 것이라」고 심프손(S. Simpson)은 말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顯現(현현)만을 보고 弟子(제자)들이 復活(부활)을 確信(확신)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본 그리스도의 復活體(부활체)는 무덤에 누워 있던 그의 몸과는 關係(관계)없는 別個(별개)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變化山上(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再現(재현)을 目睹(목도)하였었으나 그 現像(현상)을 가지고 모세나 엘리야가 復活(부활)했다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그리스도의 復活體(부활체)는 「무덤」 속에 뉘었던 몸이 그 同一性(동일성)을 잃지 않고 「再現(재현)」한 것임을 그들은 確認(확인)하였다. 그러므로 하지(C. Hodge) 博士(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復活(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이 곧 十字架(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과 同一(동일)하였다는 것은 再論(재론)을 不俟(불사)할 만치 確實(확실)하다. 그의 復活體(부활체)에는 발과 손에 못자국조차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와 同時(동시)에 또한 相當(상당)히 變化(변화)되었던 것도 事實(사실)이다. ① 弟子(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였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를 園丁(원정)인줄 알았었으며(요 20:15) 엠마오 途中(도중)에 두 弟子(제자)는 그를 예루살렘에 다녀오는 한 巡禮者(순례자)인줄만 알았다가 떡을 떼며 祝謝(축사)할 때에야 겨우 알아 보았으며(눅 24:31) 디베랴 바다의 弟子(제자)들도 그 奇蹟的(기적적) 豐漁(풍어)를 經驗(경험)한 다음에야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요 21:7). ② 그의 顯現(현현)이 突然的(돌연적)이었다. 門(문)이 密閉(밀폐)된 房內(방내)에 그는 突然(돌연)히 나타났었다(요 20:19, 눅 24:36). ③ 그러나 그와 同時(동시)에 살과 뼈가 있는 同一(동일)한 物質體(물질체)를 가진이였다. 눅 24장 36절에 있는 記事(기사)를 본다면 弟子(제자)들이 그의 顯現(현현)을 보고 귀신인가 하여 놀라며 떨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主(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발과 내 손을 보라. 이는 나 自身(자신)이다. 만져 보아라. 神(신)은 살과 뼈가 없는 法(법)인데 나는 너 보는 대로 그런 것이 다 具備(구비)해 있지 않느냐?」하고 飮食(음식)을 나눠 잡수셨다고 하였다. 弟子(제자)들이 알아 보지 못한 것은 눈을 희미하게 하신 까닭이라고 누가는 說明(설명)하였다(눅 24:16). 勿論(물론) 罪(죄)많은 눈으로 榮光(영광)의 메시아를 볼 때 희미하였을 것도 事實(사실)일지나 또한 다른 點(점) 卽(즉) 弟子(제자)들이 幽靈(유령)인줄 알고 놀라서 떨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면 거기 무슨 變化(변화)된 點(점)이 있었던 것도 事實(사실)일 것이다. 이제 以上(이상)의 諸點(제점)을 綜合(종합)해 보건대 그리스도의 復活體(부활체)는 曾前(증전)의 몸과 그 同一性(동일성)을 가지면서도 그와 同時(동시)에 마치 變化山上(변화산상)에서 變化(변화)할 때와 같이 榮光(영광) 靈化(영화)된 몸이었음이 分明(분명)하다.


끝으로 우리는 使徒(사도) 바울의 靈體(영체)에 대한 說明(설명)을 參考(참고)할 必要(필요)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信者(신자)가 復活(부활)할 때에 받을 몸이 그리스도의 榮光(영광)의 몸과 같으리라고 말하고 그 몸의 性質(성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辱(욕)된 것으로 심고 榮華(영화)로운 것으로 다시 살며 弱(약)한 것으로 심고 强(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血氣(혈기)의 것으로 심고 神靈(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血氣(혈기)의 몸이 있은즉 또한 神靈(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2-44). 이로 보건대 그는 現在(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肉體(육체)와 將次(장차) 가질 靈體(영체)와를 相對的(상대적) 意味(의미)에서 말하였다. 前者(전자)는 動物的(동물적) 生命(생명)의 原則(원칙) 위에 선 것이요, 後者(후자)는 靈的(영적) 生命(생명)의 原則(원칙) 위에 선 것이다. 兩者(양자)는 서로 混同(혼동)하거나 妥協(타협)할 수가 없다. 前者(전자)가 後者(후자)의 삼킨바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靈體(영체)라는 것도 몸인 以上(이상) 必然的(필연적)으로 形體(형체)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가 意味(의미)한 것은 다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꼭 같은 「살과 피」의 生理的(생리적) 存在(존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血肉(혈육)은 그 本質上(본질상) 썩을 것이므로 썩을 血肉(혈육)이 그대로 썩지 않을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썩을 것이 不可不(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을 입어야 하겠다.」(고전 15:50-53) 바울은 말한 것이다. 復活(부활)할 때에는 장가도 아니 들도 시집도 아니감이 하늘의 天使(천사)와 같을 것이다(마 22:30). 그러면 生理的(생리적) 存在(존재)이었던 血肉(혈육)을 가진 몸이 어떻게 그 同一性(동일성)을 잃지 않고 靈體(영체)로 化(화)하는가 하는 것은 다른 모든 生命(생명)의 움직임과 創造(창조)가 神祕(신비)임과 同樣(동양)으로 神祕不可解(신비불가해)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全知全能(전지전능)에 屬(속)한 行事(행사)요 人間(인간)의 알바가 아니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復活(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그러면 그의 肉體的(육체적) 存在(존재)를 하나도 잃지 않는 同時(동시)에 그의 靈的(영적) 生命(생명)을 表現(표현)함에 가장 適應(적응)된 表現機關(표현기관)인 몸 卽(즉) 榮化(영화) 永遠化(영원화)한 몸이었던 것이다. 鐵(철)이 그 同一性(동일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內外(내외)가 아울러 變(변)하여 榮光(영광)과 熱(열)을 發(발)함에도 比(비)할 것일까?


復活(부활)의 宗敎的(종교적) 意義(의의)


그리스도가 이런 몸으로 復活(부활) 昇天(승천)하신 것이 事實(사실)이라면 우리의 信仰(신앙)과 어떠한 關係(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이 없이 우리의 信仰(신앙)은 없는 것이다(고전 15:17). 그러므로 使徒(사도)들은 復活(부활)을 기독교의 터전으로 잡고 이를 證據(증거)하기 爲(위)하여 使徒(사도)를 擇定(택정)하였으며(행 1:22) 「아덴」에서 辯論(변론)할 때의 바울이 또한 「예수와 및 그 몸의 復活(부활)」을 傳(전)하였던 것이요(행 17:18) 온갖 初代(초대) 敎徒(교도)들이 외친 것이 또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것을 우리가 다 證據(증거)하노라」하는 一句(일구)이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떤 意味(의미)에서 우리의 信仰(신앙)을 左右(좌우)하는 것인가?


(1) 그리스도의 品位(품위)에 對(대)한 結論的(결론적) 立證(입증)이다. 예수를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들로 믿음이 信者(신자)로서 救援(구원)에 參與(참여)하는 첫 告白(고백)이라 할진대 그가 그리스도의 品位(품위)를 具有(구유)하셨다는 客觀的(객관적) 立證(입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리라는 것은 舊約(구약)에 豫言(예언)된 바요(시 16:8-11) 예수 自身(자신)이 스스로 屢次(누차) 豫言(예언)한 바이니(막 8:31, 10:34 等(등)) 그가 만일 復活(부활)하지 않았다면 「積山九仞(적산구인), 功虧一簣(공휴일궤)」 格(격)으로 그의 메시아로서의 品位(품위)는 最後(최후)의 「아-멘」을 告(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무에 달린 者(자)마다 咀呪(저주)아래 있다」한 것이 猶太(유태) 律法(율법)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萬一(만일) 十字架(십자가)만 있고 復活(부활)이 없었다면 그는 咀呪(저주) 아래 있는 者(자)이니 어찌 救贖主(구속주)가 될 수 있으랴? 그러나 그에게 復活(부활)이 있을 때 비로소 그는 榮光(영광)을 얻으시고 昇天(승천)하사 하나님 右便(우편)에 앉으시고 保惠師(보혜사)를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衝天(충천)의 意氣(의기)를 얻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祖上(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도 삼고 救主(구주)도 삼아 이스라엘로 하여금 悔改(회개)케 하여 罪(죄)를 赦(사)하여 주고자 하셨다」(행 5:30)고 외치게 된 것이다. 復活(부활)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사렛 예수는 「主(주)시요 그리스도시며」(행 2:36), 「生命(생명)의 主(주)」이시요(행 3:15) 「救援(구원)의 唯一(유일)한 이름이시라」(행 4:12)고 베드로는 傳(전)하게 된 것이다. 「그가 하나님 아들」되신 것도 또한 이 復活(부활)(부활)로 말미암아 最後(최후)에 立證(입증)을 얻게 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4절에 福音(복음)은 곧 하나님 아들을 가리키신 것이니 그는 「肉身(육신)으로 말한즉 다윗의 子孫(자손)으로 誕生(탄생)하시고 聖德(성덕)의 神(신)으로 말한즉 죽은 가운데서 復活(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아들된 것을 權能(권능)으로 나타내셨으니 곧 우리主(주) 그리스도시라」고 言明(언명)하였다. 卽(즉) 福音(복음)의 眞髓(진수)는 하나님 아들 自身(자신)이오 하나님 아들은 人間性(인간성)으로는 다윗의 子孫(자손)이요 聖神(성신)으로는 復活(부활)로 말미암아 그 靈的(영적) 權能(권능)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마이어(Meyer)에 依(의)하면 바울이 여기에 말한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은 다만 메시아라는 말의 同義語(동의어)로 쓴 것이 아니라 先在(선재)하시고 아버지의 本體(본체)로부터 나오신 同格的(동격적) 神性(신성)임을 말함이니 「메시아」라는 職務的(직무적) 用語(용어)보다 더욱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 意義(의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이라는데 對(대)한 最後(최후)의 結論的(결론적) 立證(입증)이 곧 그의 復活(부활)이었으며 이 메시아가 몸을 贖罪祭(속죄제)로 드리며 「다 이루었다」하신 十字架上(십자가상)의 말씀에 對(대)한 하나님의 「아-멘」이시다.


(2) 信者(신자)의 救援(구원)에 對(대)한 最後(최후) 및 最終(최종)의 確證(확증)이다. ① 使徒(사도) 바울은 罪(죄)와 죽음, 義(의)와 復活(부활)을 有機的(유기적) 關係(관계)에서 말하였다. 「예수는 우리 犯罪(범죄)함을 因(인)하여 十字架上(십자가상)에 贖罪(속죄)의 祭物(제물)로 그 몸을 드리었다. 그는 第二(제이) 아담으로 全人類(전인류)의 代表(대표)이심에 그의 十字架功德(십자가공덕)으로 因(인)하여 全人類(전인류)가 神(신)과 和睦(화목)함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十字架(십자가)는 그가 사람 便(편)에 서서 하나님께 드린 祭祀(제사)인 것 뿐이니 하나님이 이 祭祀(제사)를 嘉納(가납)하셨다는 客觀的(객관적) 表示(표시)가 없는 限(한), 우리는 아직도 罪(죄)에 屬(속)한 者(자)임을 免(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고전 15:17)라고 바울은 말하였다. 卽(즉)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은 그의 贖罪祭(속죄제)를 하나님께서 嘉納(가납)하셨다는 客觀的(객관적) 證左(증좌)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義(의)에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十字架(십자가)만이 우리의 稱義(칭의)를 成就(성취)할 수 없는 것이오 오직 復活(부활)이 있을 때에 비로서 그 十字架(십자가)의 贖罪(속죄)가 功效(공효)를 生(생)하게 되는 것이니 復活(부활)은 우리 救援(구원)의 最初(최초) 第一步(제일보), 卽(즉) 稱義(칭의)에 對(대)한 根據(근거)가 되는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은 또한 一般信者(일반신자)의 復活(부활)에 對(대)한 前提(전제)임과 同時(동시)에 그 原動力(원동력)이다. 이에 對(대)한 論議(논의)는 롬 5:6, 8:11, 고전 15장 等(등) 詳述(양술)된 것이니 췌론을 避(피)하거니와 特(특)히 롬 8:10절 以下(이하)의 바울의 理論(이론)은 有名(유명)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罪(죄)로 因(인)하여 죽고 영은 義(의)로 因(인)하여 살리라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居(거)하시는 聖神(성신)으로 너희 죽은 몸을 살리시리라」(롬 8:10, 11)한 것이다. 萬一(만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면 罪(죄)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 것이니 靈的(영적) 方面(방면)에 있어서는 「復活(부활)」이 이미 始作(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靈的活動(영적활동) 聖神(성신)의 活動(활동)은 점점 그 程度(정도)와 領域(영역)을 넓혀서 우리의 肉體的(육체적) 方面(방면)에까지 미치며 나중에는 우리의 죽을 몸 卽(즉) 肉體(육체)까지 復活(부활)시키리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이 最後(최후)의 원수인 죽음을 征服(정복)할 첫 證據(증거)를 보임과 同時(동시)에 그의 復活(부활)하신 生命(생명)이 우리 안에 原動力(원동력)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榮光(영광)의 몸으로 復活(부활)하게 할 것이니 이는 우리의 救援(구원)을 完成(완성)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은 우리 救援(구원)의 처음과 나중에 確證(확증)을 주는 것이며 永生(영생)의 希望(희망)도 이 復活(부활)의 事實(사실)에서 그 確實性(확실성)을 보는 것이다.


結言(결언)


그리스도가 살으셨다면 福音(복음)은 참말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살지 않으셨다면 全基督敎(전기독교)는 虛妄中(허망중)의 虛妄(허망)이다. 그가 復活(부활)하셨다면 先知者(선지자)가 豫言(예언)한 메시아시며 하나님 아들이시오 하나님과 同等(동등)이시다. 그가 復活(부활)하셨다면 그의 犧牲(희생)은 萬民救贖(만민구속)의 實效(실효)를 나타내심이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도 咀呪(저주)아래 있을 것이다. 그가 살지 않으셨다면 創世(창세) 以來(이래)의 救援(구원)의 全經綸(전경륜)이 무너짐이니 사람과 天使(천사)와 온갖 階級(계급) 온갖 秩序(질서)를 爲(위)하여 때를 따라 世紀(세기)를 따라 豫言(예언)하고 期待(기대)한 永光(영광)스러운 結末(결말)이 한마당 허튼 꿈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일어나서 모든 者(자)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었으매」 聖經(성경) 全體(전체)가 信託(신탁)임이 立證(입증)되었으며 黑暗(흑암)의 나라가 함몰되고 사탄이 번개같이 하늘에서 떨어져 眞理(진리)가 虛僞(허위)를 이기고 惡(악)이 善(선)에 삼킨바 되고 죽음이 生命(생명)에 삼킨바 되었으니 진실로 그리스도 敎(교)는 復活(부활)의 宗敎(종교)라는 讚辭(찬사)를 받기에 不足(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장공기념사…(기타,,기타) 2018-04-02 (월) 16:53 6년전
장공 김재준 전집 제1권에 수록된 글입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김재준 목사님께서 쓰신 부활에 대한 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국한문 혼용으로 한자가 많이 사용되었고... 원문에는 한자의 음역이 없어서 읽기가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음역을 첨부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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