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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표현과 사실적 언어 - 시 23편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18-04-05 (목) 07:18 5년전 3461  

1. 성경에 시편이 150편 이상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시는 압축이다.

시는 길고 긴 내용을 압축하여 그림으로 쓴 노래이다.

시는 사실을 그림으로 비유적으로 운율감 있게 압축하여 노래로 쓴 글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며 이 시 23편을 썼다.

 

길고 긴 시간 죽음 같은 고난의 과정과 시련을 지나면서 받은 은혜를 압축하여 이 시를 쓴 것이다.

 

여기서 그 내용을 다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 역시 압축을 풀면 길고 긴 감동 감격 환호 스릴 써스펜스 슬픔 눈물 기쁨 승리 찬양 하나님의 보호 인도하심 등의 내용들이 담겨있다. 성경 시편의 경우 대부분 서정시라기 보다는 역사적 상황에서 간증 찬양 감사한 서사시라고 할 것이다.

 

그 유명한 시 23편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암송하고 노래하는 시 내용 중에

상을 베푸시고라는 문장이 나온다.

개정은 베푸시고를 차려주시고 라고 수정한 것이다.

이러한 수정을 보고 참으로 시를 너무나 모르는 어이없는 수정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여기에서 베푸시고 라는 용어는 비유적 언어이다. 그림언어이다. 압축언어이다.

시는 감동적이고 풍부한 사실적인 내용을 비유적인 그림언어로 압축하여 노래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을 차려주시고 라고 하였다. 실제로 하나님이 밥상을 차려주신다는 것인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상을 베푸시고에서 베푸시고는 많은 내용이 담겨있는 비유적 압축의 그림언어이다.

 

상을 베푸신다는 말은 풍성하고 많은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는 시적 언어인 것이다. 대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는 것, 방어해주신다는, 승리케 해 주신다는 것을 포함한 시23:1-4내용이 담긴 뜻이라 할 것이다.

 

읽는 독자에 따라서 질병의 대적으로부터 치료해 주시는 것, 상대방의 비방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거나 승리케 해주시는 것 각자에게 좋은 것을 준비해 주신다는 것 등의 읽는 각자의 직면한 대적의 그 무엇으로부터 맞춤형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여호와께서 실제로 식사의 밥상을 차려 주신다는 것 그 이상이다. 그런데 개정 번역자는 참 무엇이라고 할 까 전혀 시적 이해와 감각이 없는 번역 수정자가 밥상의 상 차려 주신다는 차려주신다고 수정하여 버린 것이다. 참 시적 감각도 없고 참 꽉 막힌 번역자라고 할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실제로 세끼 밥 먹는 식사의 상을 차려주신 다는 것인가, 참 어이없는 수정이다. 이렇게 시적 이해와 감각이 없는 분들이 비유적 그림언어 압축언어를 사실적 언어로 수정하였다는 것에 아연 실색할 정도이다. 23편에서 베푸시고 라는 단어에 각자의 상황에 맞게 다 적용해석이 되는 것이다. 밥상을 차려주시는 것 그 이상이다.

그리고 이것을 사실적 언어로 받아드려 아 하나님의 상을 차려 주신다는 데 숟가락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것인가,

어린아이가 엄마 엄마 여호와 하나님께서 상을 차려 주신다고 하셨어. 그래 이렇게 숟가락 들고 있어 하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참으로 너무나 너무나 시적 감각이 부족한 분이 수정한 것이다. 상을 베푸시고 하면 하나님의 풍성하시고 각자에게 주시는 은혜를 적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을 차려주신다는 직접적인 제한된 내용의 단어는 풍부한 내용의 응답을 제한하는 언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여러 가지의 대적의 도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고 하나님이 나에게 상을 차려 주셨다하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것인가, 좀 더 넓고 풍부한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 구약 성경 그리고 시편을 번역한 최초의 번역자를 통하여 번역한 한글 성경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하나님께서 참 잘 준비된 사람을 통하여 번역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많은 보완과 검증이 있는 것이다.)

 

1. 신약의 개역의 세례를 주다를 개정은 베풀다로 수정한 부분도 있는데 여기에서는 주다가 맞는 것이다. 세례를 베풀다 하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세례를 주고 세례를 받다 이렇게 표현하고 알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베풀다 라고 수정하면 '주다'라는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단어를 추상적인 단어가 되어 '주다' 라는 단순하고 선명한 내용을 어렵게 시원스럽고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시편은 베풀다가 잘 번역한 것인데 전혀 시를 모르는 분이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는 단어를 차려주시다로 제한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사실적인 단어가 아닌데 그렇다. 엄마 성경에 보니 여호와께서 상 차려 주신데 하며 문자적으로 받아드려 숟가락 들고 기다릴거야 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 시 23편의 상을 베푸시다에서 베푸시다가 얼마나 풍부한 내용을 담은 적절한 시적 언어인가. 한편 신약에서 세례를 주다, 성령을 주다를 개정은 베푸시다로 수정하였는데 , 이것은 시적 언어가 아니라 사실적 언어 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다, 받다가 내용을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

 

( 어려운 용어로 성경학자들 간에 축자영감설과 목적 영감설을 논하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둘 다 맞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받아 기록하였다는 축자영감설과 것과 의미적으로 받아들여 기록하였다는 목적영감설은 둘 다 맞는 것이다. 즉 한자 한자를 계시받았다는 것과 전 내용을 의미적으로 계시받아 기록자가 기록하였다는 것인데 이것도 사실은 학설을 위한 학설이다. 평신도들도 그러한 용어를 몰라도 잘 이해하고 있다.)

가령 예를 들어보자.

 

십계명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푼다고 하셨다. 문자적으로 천대까지 이니까 천 일대는 아니다라고 받아드리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초신자들이라도 초등학생들이라도 아마 풍부하게 거의 무한으로 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드릴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문맥에서 누구나 문자적 언어 즉 사실적 언어와 비유적 언어를 구분하여 받아드리고 있다. 문자적이니 비유적이니 말하지 않아도 그 문맥상 다 정확한 뜻을 알고 받아드리는 것이다. 구태여 축자영감설이니 목적 영감설이니 구분하여 논쟁한다면 논쟁을 위한 논쟁 학설을 위한 학설이라 할 수 있다. 사실은 믿음 안에서 둘 다 맞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갚는다고 할 때 그 문장을 읽는 초등학생도 그 천량을 숫자 천량으로 받아드리는 학생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 문장을 이해하는 사람은 천량까지 갚을 수 있지만 천 백량은 아닌 것으로 실제적 숫자로 받아드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문장을 읽는 사람들은 다 숫자 천량 이것이 비유적 표현인지 사실적 표현인지는 구분하여 이해하기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속담에서 천량은 문자적 천량이 아니라 많은 이라는 뜻을 초등학생도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비유적 표현도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였다면 성경의 문자적으로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라고 할 때

이것이 비유적 사실적 표현이지 실제적 문자적으로 받아드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양에 하나님은 목자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을 문자적 비유적 축자영감 목적영감이라는 단어를 몰라도 다 비유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늘 문을 여시고 할 때

실제적으로 하늘에 문이 있어서 여시는 것으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 비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바위 나의 방패 나의 산성 이라고 할 때 누구나 사실의 비유적 표현 그림 언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반석 요새 방패 산성이라고 받아드리는 분은 아마 거의 전무할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하셨는데, 바위와 방패가 하나님인 것으로 알고 거기에 섬기고 절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직까지는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사실적 표현과 비유적 그림 언어를 다 구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성경은 이러한 정확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하에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것은 맞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는 전제아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문장을 읽는 누구나 대부분 사실언어 그림언어 비유적 언어를 잘 구분하여 이해한다.

특별히 성경은 읽을 때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감동과 위로와 격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원 저자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구하며 읽어야 할 것이다.

                                                                               < 성광교회 이동원 목사 드림>


       

=. 묵상 (meditation)

다윗은 소년 시절 목동으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자이 발톱과 곰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이스라엘을 사십 여일 간 공포로 몰아넣은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블레셋 공격의 어려움으로부터 구해 내었다. 여인들은 사울 왕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자신을 위기의 도피의 생활로 몰아넣었다. 사망과 자신은 한 걸음 뿐이라는 고백을 할 만큼 위기의 삶을 살았다. 오죽하면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적군이 그 블레셋으로 피신을 하였다. 자신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거기서도 결국은 위기 속에서 수염을 끄적거리고 침을 흘리며 미친체하는 모습까지 하였다. 그 위기 속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34편으로 간증하였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결국 하나님의 왕으로 기름 부으신 대로 왕이 되었다.

시 23편은 다윗이 자기의 인생에서 겪은 내용을 압축하여 쓴 체험적 간증의 노래이다.


(23:1-6)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 A psalm of David.,,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He makes me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quiet waters,/


he restores my soul.

He guides me in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

 

You prepare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anoint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Surely goodness and love will follow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 베푸시다: ,, 이라크..공급하다, 순서대로 놓다, 준비하다, 세우다, 정리하다, 정돈하다, 배열하다,

prepare, array , order, to arrange, set or put or lay in order, set in array)

       

( * 성경의 한글 한문 혼용의 개역 성경전서, 특별히 좀 더 어려운 구약과 시편을 볼 때에 참 잘 준비된 분이 번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최초 완성된 성경는 하나님께서 한국에 주신 선물이라고 이미 언급 하였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렇게 잘 준비된 적절한 분은 찾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려운 한문 용어나 고어 등이 있을 수 있으나 개역번역은 하나님의 한국에 주시는 선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성경을 읽는 분들이 최초로 누가 한글 한문 혼용의 성경을 번역을 했는지 아는 것은 좋다고 본다. 한국에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좀 더 어려운 구약 그리고 시편을 어떠한 분이 번역하였는지를 안다면 성경 읽기 전에 벌써 은혜가 되고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번역자를 필요 이상으로 높일 것은 없고 그러한 번역자를 통해 한글성경을 한국에 주신 하나님께 최상의 감사를 돌려야 할 것이다. 물론 거의 잘 모르기까지 한 무명인사인 그 번역자는 하나님의 상이 클 것이다.)

                                                                                                     ( - ing ) # 줄 간격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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