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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교육 토론 2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18-05-24 (목) 08:06 5년전 1777  

엊그제 갓난아이가 벌써 초등학생이 되어 갓난 아이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너는 좋겠다 과외를 받지 않으니 라고,

얼마나 과외가 부담이 되면 이러한 말을 하였겠는가, 그런데 교육의 목적이 무엇일까,

맹모삼천이라는 말이 있지만 위장전입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교육을 시키는 목적은 무엇일,

어떤 강사는 평생 공부하고 열심히 살아온 목적이 결국 화장실 둘짜리 집 마련 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문호 괴테는 많은 공부 후 명작 파우스트에 첫 부분에서 아무 기쁨이 없는 어쩌면 의미도 못 찾은 결과를 외치는 말

로 시작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자기가 바라는 꿈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또는 자기 발전 사회적응 과학기술 교육 발전 인격 수양 입시 진학 취직,, 과연 교육의 목적이 무엇일까,

그렇다면 교육의 방법 교육의 과정은 어떠해야 할까 

토론 교육은 국어 언어 사회 등등 생산적인 교육일 것이다.

대학에서 어떤 공개 강의을 잠시 들은 적 있었다. 그럴 듯 한 것 같은데 형이상학적이랄까 추상적이랄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어려운 듯한 인문학적 내용이었다. 포장은 뭐 그럴듯하게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지 학생들은 알아들을까, 어떻게 알아들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대학 정도 되면 강의는 잠시하고 읽고 생각해 온 것을 토론하는 교육이어야 할 것이다. 대학에서도 일방적 주입식 강요식 교육은 맞지 않을 듯 하다.

자주 보는 정부 각료나 정치인들 중에 명문학교 고시패스 유학 학위 등등을 가진 분들의 말을 보면 대부분의 국민들과 동떨어지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아는 것은 북한이 어때요 라는 부정적 관점의 결론 하나 가지고 말하는 것인가 할 것이다. 이것은 시험 기계 입시기계적 교육을 받아서 그 과정을 도식을 따라 시험 잘 보아서 명문 고시 유학 학위 얻은 것이 아닌가 할 정도이다.

세상 현실을 잘 모르고 오직 입시 로드맵 따라 가는 길이기에 자동자 네비 티멥 따라 목적지는 빠르게 성공적으로 잘 도착하였는데 다른 길은 거의 모른 것과 같다.

이것이 시험 입시위주 교육의 결과일 것이다.대학을 다니다가 휴학을 하며 외국에 연수 등등도 유행이 되었는데 ,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한국에서는 거의 초인

적 공부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노력을 하면 취직은 쉽게 되는지,직장에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아닌지,

방과 후 학습 허용이냐 금지이냐 이것이 어느 것이 적절한지 잘 모른다.

( 나는 군 복무 중 휴가 중에 그 당시 어떤 서점에 들렸다. 지금 생각하면 영어로 죄와 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너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책이 대단한 책이어서 혹 영어로 된 것이 있다면 하고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마치 같은 부대의 동료를 거기서 만났다. 그러는 중에 무슨 책을 찾느냐는 둥 묻기에 죄와 벌 이라는 책을 찾는다고 하였다. 그 친구가 죄와 벌,, 이 뭔데 하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 말했거나 그 친구가 잘못 들었나 하였다.

인문학 계통은 아니지만 상당한 실력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학교 학과로 아는데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책을 모를까 속으로 놀랐다.

한편 그 정도의 대학의 학과를 입학하였으면 오히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오직 입시 암기 어려운 수학문제 풀기 등등 입시에 전념하려면

어떤 명작의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을 과연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 일 수 있겠다 하였다.

그 당시는 물론 지금도 그러하지만 시험에 나오지 않는 어떤 문학작품을 읽거나 무엇을 할 여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 직 입시 목적 그 공부 그것에만 올인하여야 대학의 원하는 학과를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학생이 입시 잘 보는 기술에 올인한다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한편 하버드 대 대학 졸업식에서 어떤 연사사회에 나가면 하버드 나왔으면서 이것도 저것도 못하느냐 한다는 것이다. 하버드, 하버드 대학 나왔는데,,

한국의 이른 바 명문대를 가려면 오직 시험에 나올 것만 공부하여 더욱 그러할 것이다. 혹 기술 과학의 전문분야는 공식만 외워야 한다면 그러해야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한국에 대 토론회가 있고 적어도 대학 교육이 주입식 교육보다 질문 대답 토론 정반합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교육은 어린시절이 지나 중등 또는 대학이상에서는 질문을 많이 하고 토론 교육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주입식 교육이라면 발전이 적을 것이다. 책이 없는 시절도 아닌데 주입식 교육 대신 각자가 읽

고 보면 되는 것이다.

인문학 계통에서 아직도 일방적 강의 위주로만 한다면 그 강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떠하겠는가, 앉아있는 사

람들이 못 알아 듣거나 그 강의의 주장이 틀리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앉아서 고문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방적 으로 강의하고질문 없이 가버리면 이것은 강요교육일 것이다.

리고 그 강의도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거나 심지어 맞지 않는 내용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청중은 그것을 모르고 일방적으로 들어야만 한다. 어떤 경우는 그 내용이 맞지 않는데 하면서 그것을 듣는다는 것을 고욕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러한 일방적 주입식 교육방법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시 반복 이지만 교육방법으로 높이 평가 받는 이스라엘은 신앙교육 위주로 주입식인 것으로 알기 쉽지만 그것은 어린 시절에 철저히 그렇게 하지만

중등 또는 그 이상에서는 철저하게 그 배운 기초를 가지고 질문 대답의 대표적인 교육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은 인구비례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을 타는 것으로 알려졌다.물론 어린시절에는 성경위주로 주입 암기 등 일방적 교육일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기초에 질문 대답 적용 실천 검증하는 교육과정인 듯 하다.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목회자로서이다.

교회에서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무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편 교인들이 주위 사람들이 생활적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것을 볼 때에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가령 남북관계가 평화 번영을 추구하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남북의 경제적 유익도 많아 경제 문제로 눈물을 흘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것인데 라는 생각을 하면 모르는체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함께 노력하면 경제적으로도 궁핍함 때문에 고통 받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텐데 살기 어려운 형편을 보고도

주님의 말씀만 전하고 우리의 할일을 하지 않고 어렵게 사는 방법으로 살면서 주여 주여 만 외치는 것이 무엇인가 허전하다.

너희에게 먹고 사는 양식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이 곡식 과일 땅 속에 자원 바닷 속에 물고기등 풍부하게 다 두었는데 너희가

무기 만드는데 많은 비용을 쓰고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비난하며 아까운 세월 보내고 있다. 너희가 평화롭게 협력하고 잘 나누면 부족함이 없게 해 두었는데 너희가 동족끼리 서로 비난하며 적대시하고 무기나 더 만들고 구입하고 적절히 나누지 못하여 생긴 부족을 나에게 달라 달라 하느냐,

그 무기는 어디에 쓰려고 하는냐, 공중의 새를 잡는 새총으로 쓰려고 하느냐, 대포로 새를 잡느냐, 바다의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느냐, 누구를 해하려고 하느냐 그리고 무엇이 부족하다고 나에게 부족하다고 달라 달라,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느냐, 

가 준 은혜를 그렇게 사용하고 과연 무엇이 계속 부족하다고 하는 것이냐 , 그렇게 사용하면 앞으로도 계속 부족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의 영적세계를 구하고

내가 보기에 의로운 옳은 일을 하면 의식주의 부족함이 있겠느냐.

너희는 분단된 남북관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하라. 화평케 하는 자는 피스메이커는(peace makers) 복이 있는 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 다음에도 부족하면 이스라엘 광야에 만나 내리듯이 하늘에서 특별양식을 주어서라도 의식주 문제는 부족함이 없게 하시겠다 하실 것이다.

그것은 광야 사 십년, 사일 사십일 사년 십 사년이 아니라 사십년 동안이나 증명하셨다는 것이다. (신8:1-4)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 목사님 도덕적인 인간과 비 도덕적 사회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내용을 모른다 해도 그 제목

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아니 무슨 내용인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청소년이 찾아와서 목사님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설교에서 도덕적인 인간이 되라 도덕적인 인간

이 되라 하시는 데 저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새벽같이 신문을 배달하고 판매하여야 하는데 집에는 병든 어머님이

계시고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려면 새치기도 해야 하고 비도덕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병든 어머님의 약값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니버 목사님은 아 내 설교가 지금까지 허공을 치고 있었구나 하였다는 것이. 그 후 그 분은 디트로이트 지역의 자동차 회사에서 산업선교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교회에서의 설교는 절대적인 진리이기에 일방적 선포이어야 할 수가 있다. 종교적인 진리는 일방적일 수 있다. 물

론 가르치는 과정에서는 토론이 필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강의가 청중과 청중의 실생활 현실과 동떨어지고 일방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한국에서 뒤늦게나마 대학은 말할 것도 없이 가능하면 중고 이상은 질문과 토론 정반합의 교육 방법이어야 할 것이다.그 과정에서도 표현력 창의력 배려심 사회성 등등 많은 교육이 더해질 것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성경이 가장 좋은 것이.  대진리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고 어디에서나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것일 것이다. 이것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토론으로 결정하는 것도 좋다할 것이다.

한국교육이 경쟁 교육 그리고 주입식 시험 위주의 교육이 되었기에 최고의 교육을 받은 분들 안목 등이 일반 평균 수준보다 나을 것이 없는 좁은 시야의 사고방식이 많고

입시 경쟁 교육 위주로 교육 받았기에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태도가 많이 부족한가 하는 것이다.

사람 개개인은 서로에 상당한 배려의 마음이 있으나 사회제도가 경쟁적이고 교육과정이 경쟁교육이다. 생존경쟁의 교육과 과정보다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배우고 실천한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교육과정에서, 내가 지금 잠을 잔다면 나의 경쟁자의 적의 책장은 페이지는 넘어가고 있다며 누꺼풀을 필사적으로 올리며

너무 입시 경쟁교육에 올인 한 듯하다. 그래 교육이 즐거운 배움의 교육이 아니라 좀 더 삭막하고 고통의 교육이 아니었나 한다.서로의 배려의 인간교육도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그 엄청난 재산을 크게 이룬 무엇을 놓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마음은 어떠할까 무엇일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예전에 언젠가는 공수래 공거래 라는 말도 많이 사용하였다. 이러한 말까지도 필요하면 토론하여 정반합으로 자기 인생관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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