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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교과 교육과정(curriculum) 에 관하여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18-06-29 (금) 07:42 5년전 3690  

어떤 신학도의 한국에서 신학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구의 어떤 신학교에 입학을 하여 첫 강의 시간이었다.

첫 시간에 그 교수님이 말하기를 성경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 손을 들라고 하였단다. 그런데 손을 들고 보니 자기 뿐 이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직간접으로 두어 번 들었다. 물론 성경 안에 사람의 간증과 간구와 찬양이 있다. 그러므로 그 질문의 워딩 자체는 일리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뜻으로 질문한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한국에서 신학 학부에서 그리고 대학원에서 공부과정 마치고 외국유학까지 가서 어쩌면 신학과정 초기에서나 혹 들을 수 있는 말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다. 신학교육 입문에서는 좀 더 분명하고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도전적인 질문을 하며 더욱 경전을 든든하게 굳건하게 하는 과정도 필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구의 어떤 신학교에서의 이러한 질문은 그러한 의도가 아닌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성경의 권위를 높이지 않고 인생들의 학설을 높이는 것으로 말하는 듯 하다. 이러한 교육을 받기 위해 그렇게 올인하여 어학을 공부하고 그 먼 길을 가서 무엇을 배우고 돌아오겠는가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사실 기독교가 종교개혁 전에는 경전이 성직자들 만이 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이 너무나 방대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혼돈을 줄 수 있는 뜻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주요 핵심의 내용을 잘 알고 실천하면 되지 어떤 부분은 해석하기가 어렵기까지 한 방대한 내용을 저마나 자기 나름의 해석을 하다 보면 혼돈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이 일리도 있다는 것이다. 또 그 당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 또한 종이와 인쇄술의 발명 이전에는 성경이 많이 보급 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경전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말씀으로의 종교개혁 이후 인쇄술의 발전과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의 증가로 성경을 누구나 개인적으로 읽을 수 있는 참으로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물론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과 계명 그리고 예배와 그 계명의 실천으로 신앙생활의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씀을 직접 읽을 수 있다는 것 경전을 가지고 매일 언제 어디서나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제한 된 분만 볼 수 있었던 시대에서 성경이 보급이 되고 종교개혁 문예부흥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종교 자유와 물결에 신앙적인 면에서도 소위 인본주의 신학이 일부 형성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서구에 유학을 가서 정리도 검증도 안 된 그 시대에 유행한 인본주의 신학을 배우고 그것이 뭐 새로운 무슨 최신 최고의 학설인 줄 알고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가르쳤다면 그 전후 검증이 필요했다는 것을 먼저 알았어야 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십대의 청춘에 들어서는 좀 더 자유로워지기를 원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은 심정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주입식으로 늘 들어왔던 것보다 좀 더 새롭고 듣지 못한 무엇을 자유롭게 배우기를 원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비슷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막 신학을 공부하는 학도들도 경전의 내용보다 좀 더 다른 말을 새로운 내용을 듣기도 원할 것이다. 지금까지 귀가 따갑도록 듣고 또 들었던 어떤 종교적인 율법적인 내용대신 좀 더 새로운 어떤 내용을 듣고 싶은 것은 동서고금에서 전문의 학문을 시작하는 학도들에게 동일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심리에 어떤 잘 못된 학설이나 주장을 듣고 꽂히면 평생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학설이나 사상이어도 그러할 것이다. 물론 너무 정반대로 가는 경유도 있다. 예를 들면 학창시절에 가장 극렬한 운동권인 인사가 가장 극보수로 전환하는 경우는 균형 있는 교육이나 정반합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편향된 시각으로 세상을 보다가 실망하거나 그 사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한계를 알고 다시 다른 면으로 극단적 시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정치권에서도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권력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사는 이익특성이 영향을 주기도 하였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신앙의 선배들이 뭐라 할까 필요이상의 자유스러운 학설을 말하는 분들을 보면 뭐라할까 가장 근본주의적이라고 할까 하는 신앙으로 자라온 분들도 있다. 가령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 개념으로 일하지도 않아야 하고 물건을 사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를 견지하다가 극과 극은 통한다 하였던가 서구에서 어느 신학교육을 배우고 와서 주일에 교회당에서도 빵과 커피를 살 수 있게 한 것이다. 그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본질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서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어떤 이념에 극보수에서 극진보로 극진보에서 극보수로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한편 목회자가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약간은 특별한 결단을 하고 성경과 신학 과정을 잘 배워서 교회에서 최선의 봉사를 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신학을 문을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말씀과 예배와 양을 먹이고 돌보는 그 직무 감당의 교육을 충실하게 하고 있을 것이다.)

서론이 너무나 길었지만

신학교에서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성경을 얼마나 배우고 공 부하는 가 성경을 잘 가르 칠 수 있게 어떠한 커리큐럼 교과과정으로 가르치는가 계속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 지금의 신학교에서 교과 교육 과정이 예전보다 더 풍부한 내용으로 가르치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그렇다면 단지 참고로 해 주시기를 바란다.>

 

1. 신학교육을 받고도 성경의 십계명과 함께 주신 성막이라는 내용을 배우는 것은 고사하고 단어를 한번 들어 본적도 없이 졸업하는 경우는 없는가, 구약에 십계명과 함께 주신 메시야 그리스도의 모형임에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떤 신학자들의 학설이 대단한 것 인줄 알고 물론 그 중에는 크게 유익한 내용도 있겠지만 검증도 안된 그리고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심지어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학설들이 없었던가,

 

1. 성경의 생생한 역사가 일어난 지역의 문화 역사 지리 배경을 잘 배웠거나 배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 시대의 교과과정에서 잘 배우지 않은 것 같다. 무슨 서구의 신학자의 무슨 학설을 배우고 심지어 신봉하는 분위기도 있는 듯하였다. 그 당시는 데모와 휴교등도 있었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물론 지금은 어떤 신학교 교육과정에서 이스라엘 성지 탐구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경을 좀 더 알고 본다면 얻을 것 배울 것 많고 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본다는 말도 있다. 미리 성경을 좀 더 공부하고 준비된 마음으로 탐구하는 자세로 보면 기대이상으로 얻는 것이 많을 것 같다. 목회자는 적어도 다른 두 번은 탐방하는 것이 거의 필수적이 아닐까 한다. 가능하면 계절을 달리해서 탐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의 목회 초기에 성지를 방문하고 온 타 교단의 어떤 목회자가 빚을 내서라도 방문해야 한다며 강력히 추천하였다. 그 만큼 배운 것이 얻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다시, 아는 만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준비하고 탐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

 

1. 구약은 구약이지만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신 갈릴리 지역은 지도로 보면 사마리아 북쪽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북 왕국이고 사마리아 지역에 포함 될 것인데 갈릴리를 사마리아 지역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 분들이 많은 것 같지 않다. 물론 그 누구라도 성경의 그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율법학자도 예수님께 구약 성경의 율법의 요약이 무엇인가 묻지 않았던가, 한편 이것을 묻고 대답하는 유대 교육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좀 지나친 것일까, 교육에서 묻고 대답하는 것은 가장 좋은 교육 방법으로 거의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갈릴리 지역이 사마리아 북쪽인데 즉 이스라엘은 남왕국이 아닌 북왕국 지역인데 그리고 북왕국은 앗수르에 멸망해 사마리아가 되었다고 하면, 왜 갈릴리를 사마리아 지역이라고 하지 않을까요,

 

1.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그 이후 초대교회사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성경 사경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세계가 놀랄 정도도 발전하였다. 그 후 한국의 기독교는 많은 심령 부흥회가 있었다. 모든 교회가 거의 일년 한번 정도는 연례 행사로 부흥회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집중집회를 통해서 한국 성도님들은 성경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성도님을 간증은 그 당시 그 집회에서 많은 병자들이 치료되었다는 것이다. 그 집회에서 소경이 눈을 뜨고 등등을 직접 보았다는 간증을 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면서 왜 지금은 그러한 역사가 많지 않은지 한다. 물론 그러한 집회도 지금은 많지 않거나 거의 없다. 좀 더 고급화 컨퍼런스 등등의 언어등으로 세련화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역사는 고급이나 세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은 물론이다.

 

1. 한국교회는 언젠가부터 말씀을 통한 성도의 성장보다 수평이동 교인 수 성장 그리고 그 방법론 교회당 건물 경쟁등이 한국 교계를 휩쓴 흐름이기도 하였다, 학계는 성경보다 서구 유행신학자들 사람들의 학설을 필요 이상으로 심지어 성경보다 신봉하고 예수님보다 어떤 사람이 부각되는 이러한 면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성장론 숫자 건물 학설 등 이 모든 것이 어느 정도 필요하고 중요하기도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유익도 있을 것이다. 전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가장 상식적이게도 예수님보다 말씀보다 예배보다 더 위에나 앞에는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상숭배 아니겠는가, 성경에서 우상 숭배는 가장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창조주이시고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사랑의 언약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 목회자가 되려는 준비의 신학교육의 교과과정을 토론해 볼 수 있고 참고가 되었으면 해서 글을 올리는 것이다.

                                                                          < 성광교회 이동원 목사 드림>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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