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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김재준] "적그리스도의 성격과 그의 세계" (마태 24:3-14)

장공기념사… (기타,,기타) 2018-11-01 (목) 18:03 5년전 1558  
[범용기 제6권] (1610) 적그리스도의 성격과 그의 세계
[마태 24:3-14]

“말세에 –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다’ 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리라!”

‘그리스도’란 ‘구세주’란 말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외없이 고백된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의 인격이 “인간화한 하느님”이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등의 칭호는 철학적인 사색이나 신학적인 체계에서라기보다도 3년 동안 밤낮 그와 생활을 같이 한 제자들과 신도들의 직감적인 인상이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말대로 한다면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 1:14)입니다.

‘영광’이란 ‘나타난 거룩’이라고 하는데, 그의 인격이 풍기는 꾸밈없는 나타남이 그대로 ‘하느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有史以來(유사이래)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그리스도를 본 사람은 곧 하나님을 본 사람이다” 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저런 분일 것이다 하는 어쩔 수 없는 “하느님 인식”이 그리스도와의 접촉에서 인쳐진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갈수록 더욱 짙어지고, 어느 모로 보던지 여실하게 입증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속죄 사랑’으로서의 ‘십자가’가 그의 神人格(신인격)을 부각시켰고 그의 부활과 성령강림이 그를 “하느님 아들”, “구원주”로 판박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묵시록 기자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고 찬양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그리스도 증언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그는 본래 하느님의 본체이었으나 하느님과 동등됨을 취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를 높이 올리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어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자나, 모든 사람을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하게 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빌 2:6-10).

예수님은 ‘그리스도’(구세주)로 숭배받을 종교적, 도덕적, 영적 자격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 말하자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기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요새 제3세계라는 데서는 독재자가 역사의 무대에 뛰어 올라서 자기를 ‘절대자’로 선언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도 교회도 그런 현실에 대하여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혁명 중에는 그런 일도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어느 정도 그럴 필요도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은 그것을 심각하게 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냐, ‘우상’이냐의 어느 하나가 우리의 충성 대상으로 선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상을 따른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야훼’냐 ‘바알’이냐의 어느 하나를 택해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독재자는 자기와 자기의 위치와 자기의 하는 일, 자기의 생각과 지혜, 존귀와 영광을 절대적인 것으로 정립하려는 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의 거짓 하느님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말하자면 ‘우상숭배’가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모두 다 상대적입니다.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그러므로 비판도 받고 설득도 하고 중론에 따라 정책도 바꾸고 정권교체도 하고 해야 무난하게 됩니다.

독재자는 -

“나와 너희 관계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 뿐이다. 내가 명령하면 너희는 복종하는 것이다. 내가 ‘법’이요, ‘권위’요, ‘국가’다. 나를 반역하는 자는 국가를 반역하는 역도(逆徒)다.” 하고 당당합니다. 그가 ‘신’의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우리 조국에도 그런 ‘희극’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런 거짓 절대자는 자기 자체 안에 멸망의 씨를 품고 있습니다.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그 씨가 날로 성장합니다. 결국에는 스스로 멸망하면서 숱한 백성을 함께 멸망의 도가니에 끌고 갑니다.

이런 ‘악운’을 시정하기 위하여 자유민주체제가 인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독재경향이 강해질수록 민주운동이 치열해져야 합니다. 공산화운동을 앞세우자는 주장도 많습니다. 그러나 공산사회는 더 폐쇄적인 공산독재가 강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북의 남침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도 ‘거짓 구세주’의 하나입니다.

자기를 절대화한 거짓 구세주가 다스리는 나라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그는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나지만 속은 노략질하려는 ‘이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는 일종의 종말학적 예언을 일러주셨습니다.

(1)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자자하게 될 것이다.” ‘난리’란 말은 ‘싸움’ - 전쟁을 의미합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강대국들이 우리나라를 전쟁판으로 만든다”, “이북에서 당장 쳐 내려온다” 하고 긴장감을 고조합니다. 그건 그럴 수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일인 독재의 권력구축을 위한 구실로 사용하려는 것이 나쁘다는 말입니다.

그런 위기가 있을수록 국민의 자발적인 애국심에 호소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니 내가 총사령관이 되어 너희에게 명령할테니 너희는 복종만 해라” 하고 혼자 영웅인 체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퍼져도 두려워 말아라. 아직은 때의 마감이 아니다.”

(2) 민족이 민족을 치고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반란 현상이 속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이 전체 사회에 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통치자가 국민을 믿지 못합니다. 그것은 정권을 합법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었는데 그것을 하루 아침에 총칼로 강탈했습니다. 그러니까 국민이 통치자를 신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독재자가 기득권을 쉽사리 내놀 생각은 없습니다. 여러 가지 간계로 국민을 조종하여 그때 그때의 위기를 꿰맵니다.

국민이 반정(反正)운동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고 온갖 힘을 다 씁니다. 조종술만 늘고 진실은 없어집니다. 진실 없는 조종술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백성과 백성끼리 서로 서로 제욕심만 채우려고 피차 ‘조종’합니다. 상대방을 조종하려면 돈이나 권력으로 매수해야 합니다. 그것 자체가 부정, 부패입니다. 불의와 불안이 사회의 습성으로 됩니다. 돈도 권력도 없는 계층에서는 그들의 불평과 울분을 반란으로 분출시킵니다. 민족이 민족끼리, 나라가 나라끼리 서로 적대합니다. 전쟁윤리가 정상윤리를 대신합니다.

지금 한국은 정보부가 국민을 마치 ‘적병’이나 되는 것 같이 사찰하고 탄압하고 고문하고 합니다. 그래서 국민은 정보부를 미워하고 무서워합니다. 정보부는 국민을 흉악법 같이 학대합니다. 일종의 전쟁상태라 하겠습니다.

(3) 기근과 지진이 각처에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식량부족이 극심합니다. 하느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 탐욕이 중간에서 독점하기 때문입니다.

요새 한국에서도 쌀 한가마니 값이 2만 6천원으로 올랐습니다. 인구는 1년 동안에 大邱(대구) 인구만큼씩 는다고 합니다. 기근이 온다는 것은 그럴듯한 예언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사랑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쌀 한줌씩이라도 골고루 나누어 먹으면서 다 같이 생존하자고 할 것입니다. 자기만 배터지게 먹고 오래오래 살겠다고 욕심부리면, 그는 배 터져 죽고 다른 사람은 배 고파 죽고 해서, ‘죽는 나라’, ‘죽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지진’이란 것은 우리가 서 있는 ‘기초’가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Paul Tillich가 “기초가 흔들린다”는 설교집을 낸 적이 있습니다만, 살아계신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면 그의 생명과 생활의 기반에 무서운 ‘지진’을 경험할 것입니다. 아무리 견고한 고층빌딩이라도 그 기초가 마구 흔들리면 무너질밖에 없고 그 무너짐이 대단할 것입니다.

(4) 불법이 점점 더해간다고 했습니다.

거짓말로 시작한 사람은 그 거짓말이 탄로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더 큰 거짓말을 꾸며야 하고 그 더 큰 거짓을 가리우기 위하여는 또 더 큰 거짓으로 덮어 씌워야 합니다. 그래서 갈수록 거짓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어쩔 수 없게 되는 날이 그에 대한 심판의 날인 것입니다. ‘불법’이란 것은 ‘법’아닌 ‘거짓법’입니다.

불법의 ‘대헌장’은 폭력입니다. 법 없는 폭력 말입니다. 폭력은 인간적이 아닙니다. ‘인정’이란 것은 ‘인간 사랑의 정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폭력은 ‘물리적인 힘’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 같은 것은 ‘감상주의’라고 멸시합니다.

일제시대에 경시청에 잡혀가 고문당한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 생손톱 눈에 쇠못을 쳐 박고, 불에 단 쇠꼬챙이로 살을 지지고, 종아리에 각목을 넣어 주리를 틀고, 두 팔을 매달아 어깨죽지가 빠지게 하고, 반듯이 눕혀놓고 얼굴에 창호지를 덮고 그 위에 걸레 빤 물을 퍼부어 숨쉴 때마다 그것이 속에 들어가 배가 태산같이 부풀면 엎어 놓고 구두발로 밟아 물을 토하게 하고 벌거 벗겨 도람통에 넣고 어름을 재어 언 동태같이 되게 하고, 그밖에 매질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 그랬답니다.

지금은 그 보다 더 심한 고문을 더 악한 방법으로 해치운다고 합니다만, 어쨌든, 인간이 인간을 어쩌면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다룰 수 있을까 싶어집니다. ‘일인’들이 잔인하다고 하지만 자기 민족끼리서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정부에서는 어찌하여 자기 백성을, 자기 동족을 그렇게까지 무자비하게 괴롭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Sports로 아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자기의 권위의식을 만족시키는 것 같습니다. 밖에서 매 맞고 집에서 아내를 패는 심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의 마음에서 ‘사랑’이 없어졌기 때문이겠습니다.

(5) 많은 사람이 서로 미워하고 서로 잡아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반사회도 차츰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이 소위 유학한다고 와 있던 40년 전 미국만 해도 인간을 위한다는 의협심과 인정미가 있었습니다. 시골 길을 걷노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갑게 ‘헬로’를 교환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어디서 여자나 어린이나 몸 약한 사람이 힘센 놈에게 횡포 당하는 것을 보면 불문곡직하고 뛰어들어 우선 그 ‘강자’를 제지하는 ‘기사도’를 발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못하면 ‘비겁자’란 불명예가 붙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장 눈 앞에서 난행 당하는 광경을 보면서도 못본 체 가버린답니다. 여러 가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관심’이 가장 중심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이웃 관심이 없습니다. 그 당하는 사람이 자기 아내나 딸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못본 체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무관심은 미워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합니다. “뜨뜻미지근”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잡아준다”고 했습니다.

‘뉴욕타임즈’ 기자가 본 “최근의 한국”이란 기사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1974. 4. 1. 발행 한민신보 소재)

“지금 한국에서는 국민은 정부를 미워하고 정부는 국민을 불신해서 잡아가고 잡혀가고 하는 것이 삶의 본 모습인 것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정보부인지 모르기 때문에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미워합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 시대에는 ‘러샤’ 사람들이 부부끼리도, 부자끼리도, 서로 맘 놓고 얘기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자식이 아비를 ‘스파이’ 해서 보고하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판이었으니까 서로 잡아주고 자기만은 살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한국이 정보정치 국가라 하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됐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독재정부는 자신의 불안 때문에 정보정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경찰국가’가 되면 고발, 체포 등등이 본직같이 되는 것입니다.

(6) 그리스도 신자를 “환란에 빠뜨리고 사형에 넘기고 미워할 것이라” 했습니다. 히틀러도 그랬고 스탈린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말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기 전에 나를 미워했고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괴롬 당할 때, 그리스도가 괴롬 당하는 것이고, 우리가 괴롬당하기 전에 그리스도가 괴롬 당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혼자 괴롬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우리가 어느 정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7) 그러는 동안에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때, 복음은 생동합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 ‘말씀’일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리스도에 충성하는 의미에서 고난 받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에서 고난을 영광으로 택하는 때, 우리가 “예수 믿으시오” 하지 않아도 세계가 예수를 존경하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서 생명의 샘을 찾고 자기들의 구원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역사가 그리스도 역사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명실공히 그리스도가 역사 안에 오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8)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이 모든 환란과 시련, 이 잔혹한 거짓 메시야의 유혹과 시련에 항복하거나 ‘전향’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 하느님과 그리스도에게 제일차적 충성을 바쳐온 사람들은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독재자에 항거하여 민주운동을 추진한다 하여 그것으로 우리 역사가 천국으로 되리라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악은 언제 어느 누구에게나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역사 현실이 우리 신앙고백의 ‘고장’(Locus)이라고 믿기 때문에, 역사를 향한 우리의 ‘예’와 ‘아니오’는 똑똑히 말해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 메시야에게 ‘아니다’하지 않고서 하느님을 순종한다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고난 없이 그리스도 증인이 될 수도 없습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이미 세상을 이기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1974년 5월 12일
Washington 한인침례교회
예배모임에서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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