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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 독생자

김창환 (서울남노회,강서교회,목사) 2018-12-14 (금) 16:33 5년전 1903  
http://cafe.daum.net/thekingjesus/I1Nl/488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칼럼 (488호)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 (요 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 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1. 인간의 죄를 친히 담당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 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1-12). 2. 불법으로부터 속량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 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4). 3.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 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4.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5.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 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 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3-16) 6.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기 위하여 오셨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 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 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 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 으라”(요 14:8-11).
    파파파노의 성탄절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 파파파노라는 착하고 성실한 구두 수선공 할아버지가 있었다. 이 할아버지에게 어느 성탄 전날 밤 꿈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내일 성탄절날 할아버지를 방문하고자 합니다” 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할아버지가 잠을 깨었을 때 눈 속에서 솟아오르는 찬란한 태양이 밝게 비치는 성탄의 아침이었다.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성탄절에 특별히 쓰는 커피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고 청소도 깨끗하게 하였다. 기다리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거리의 청소부만 보이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청소부를 향해 “이리 들어와요. 추운데 몸이나 녹이고 커피라도 들어요”라고 하시고 그를 맞이해 들였다. 점심 때가 다 되어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 누더기 옷을 입은 여인이 홑이불에 어린 아이를 싸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측은하여 그 여인을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빨갛고 시퍼렇게 얼어 있는 아기의 발을 할아버지는 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아기에게 신발을 신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어제 밤에 보았던 조그만한 신발을 신겨 보았다. 신기하게도 꼭 맞았다. 아기와 여인은 행복하고 감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느 듯 마을에 저녁 기운이 몰려 왔다. 할아버지는 저녁 준비를 위해 스프와 빵을 데웠다. 그 때 한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과일을 훔쳐 달아나는 어린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훔치고 달아나던 아이를 붙잡아 때리며 경찰서로 데리고 갈려고 끌고 갔다. 그때 파파파노는 그 할머니에게 간청을 했다. "그 아이가 배고 고파서 그런 짓을 했으니 용서해주고 내가 대신 과일 값을 지불하지요" 파파파노의 마음에 할머니는 그 아이를 용서했고 그 아이도 할머니에게 용서를 빌었다. 어느새 할머니와 아이는 정답게 길 저 쪽으로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결국 꿈이었단 말이지”라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 때 “할아버지 나를 보셨지요”라고 하는 어제 밤 꿈의 그 소리가 들렸다. “어디에 계셨습니까”라고 묻자 “나는 오늘 할아버지를 세 번이나 찾아갔어요. 한 번은 청소부로 한 번은 아기를 안은 여인으로 마지막으로 거지로 말이예요. 당신이 나에게 베푼 따스한 사랑 정말 감사했어요. ” 거리에는 눈이 소복 소복 쌓이고 있었다.
    산타크로스와 성 니콜라스
    터어키에 니콜라스라고 불리우는 주교가 있었다. 그는 이웃을 찾아다니며 불우한 이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던 가운데 지참금이 없어 시집을 못가고 있는 세 자매의 집을 방문하였다. 니콜라스가 그 집을 방문하였을 때, 자매들의 울음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니콜라스는 자신이 준비해 갔던 금덩어리를 전해주고 싶었다.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빨래 줄에 걸린 젖은 양말이 보여, 니콜라스는 금덩어리를 양말에 가득 담아 주고 왔던 것이다. 이윽고, 세 자매는 결혼하였고 니콜라스의 금덩어리 선물이야기가 온 동네에 퍼지게 되었다. 그 후 니콜라스가 죽자 사람들은 그에게 칭호 `성(Saint)`자를 이름 앞에 붙여 세인트 니콜라스(Saint Nicolaus)라 불렀다. 성 니코라스의 이름이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퍼지면서 세인트 니콜라스는 오늘의 `산타클로스`로 불리게 되었고,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 오신다고 아이들은 믿고 있는 것이다. 터어키의 성 니콜라스 주교를 기억하며 터어키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에 선물을 양말에 담아서 전해주는 풍습을 가졌다. 이 풍습이 유럽과 미국으로 옮겨가면서 성탄절의 선물은 성탄 축제의 한 요소가 되었다. -------------
    산타크로스에 대해 살펴 본 대로 산타크로스는 성탄절과 아무 관계도 갖고 있지 못하다. 산타크로스는 한 나라의 이야기 거리이며 그것이 현대에는 장삿꾼들의 상술이 접목되어 사람들의 충동구매를 유발시키는 성탄절에 대목을 만드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성탄절에 아기 예수보다 산타크로스를 먼저 생각하는 우리의 관념은 바뀌어져야 한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생일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기로 오심으로써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천군과 천사들이 부른 찬송이 있게 된 것이다. 성탄절은 당연히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계절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나심으로써 `메시야가 오심`에 대해 기쁨을 확인하고 , 이 기쁨이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성탄절을 생각할 수 없다. 더욱이 예수님이 계셔야 할 그 자리에 산타크로스가 있는 성탄절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매주 14,000 여명의 회원님들에게 한번씩 보내는 칼럼입니다. 서울 강서교회 김창환 목사(문지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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