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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주간 묵상

김창환 (서울남노회,강서교회,목사) 2019-04-05 (금) 19:17 4년전 3483  
http://cafe.daum.net/thekingjesus/I1Nl/503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칼럼 (503호) 고난주간 묵상
    - 고난주간 묵상 자료 -
    고난주간은 부활절 전 한 주간으로,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지낸다. 이 자료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주님 께서 행하신 최후의 한 주간 동안의 일을 살피면서 오늘의 고난주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고난주간 동안 해당되는 날의 자료를 자녀들과 함께 읽으면서 주님이 우리을 위해 당하신 그 큰 고난을 생각하고 자신과 자녀들을 복된 십자가의 그 고난 현장에 참여시키는 기회로 이용하시기 바란다.
    제 1일(주일) 예루살렘 입성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막 11:1-11). 예수께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성으로 공공연히 나귀를 타시고 입성 하셨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켜보았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t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속에서 인간의 위선, 탐욕, 가증스러움 이기주의 등의 죄악이 가득 차 있음을 보셨 다. 다음 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케 하기 위해 채찍 을 드셔야 했다. 묵 상 1. 고난과 죽음을 미리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용기를 생각해 보자. 2. 오늘 내 마음 속을 교회를 예수님께서 오셔서 둘러보신다면 무엇을 느끼실까요? 우리 자신과 교회를 살피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제 2일(월요일) 성전을 청결케 하심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막 11:15-19). 당시 성전 안에서는 명절 때 희생의 제물로 쓸 짐승과 향유, 그밖에 필요한 물품을 매매하였고, 성전 안에서만 쓰는 유대 화폐를 교환하여 주곤 하였다. 이러한 상인들, 돈 바꾸는 자들과 결탁한 제사장들은 막대한 부당 이익을 취하였다. 그래서 성전은 완전히 시장과 같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 그들을 내어쫓으시며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막 11:17) 하셨다. 예수님은 참 제사장의 자격으로 더러워진 성전에 대해 격분하시고 이를 깨 끗케 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전뿐 아니라 온 세계를 성결케 하시려는 하나의 표징이 된다. 묵 상 1. 오늘의 교회는 혹시 이기주의, 상업주의 정신에 젖어 있지 않나요? 2. 하나님의 성전을 참으로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떤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제 3일 (화요일) 과부의 두 렙돈 교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 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 12:41-44).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셔서 그들의 연보 넣는 것을 지켜보셨다. “한 과부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이때 예수께서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를 기뻐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평범한 것 같은 이야기에서 실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강조되어 있는 점에 주의하여야 하겠다. 하나님은 양보다는 질을 중요시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기뻐 받아 주실 만한 것이다. 묵 상 1.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금은 어떤 것일까요? (고후 9:6-12). 2. 다음의 말씀을 명상하자. 많은 사람들은 지갑으로만 바쳤지만 그녀는 마음으로부터 바쳤다. 이는 습관을 좇아 드리는 것과 사랑으로 드리는 것의 차이이다.
    제 4일(수요일) 한 여인의 헌신 (마태복음 26:1~16) 마리아의 거룩한 낭비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 14:3-9). 예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와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 에 부었다.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에 팔 수 있다고 하는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보통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 이 향유는 무척 비싼 것이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충동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의 불평과 비난 속에서도 예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 이 일을 주님께서 칭찬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묵 상 1.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주님을 위하는데 따라야 할 자기 희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2.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함과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서 봉사 의 기회’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기회를 놓치지 말고 봉사 해야 할 일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 5일(목요일) 최후의 만찬 “··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 14:22-25). 예수께서는 그가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 셨다. 이 때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셨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희생해 제자들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실 것을 말씀으로만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일로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찢기실 자신의 몸과 흘리신 피로 속죄를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마지막 만찬 때 예수님은 한 사람의 제사장으로서 그의 영원한 영혼을 흠없이 하나님께 드리셨던 것이다. 묵 상 1. 최후의 만찬에 참여한 제자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자. 2.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 속죄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제 6일(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막 15:16-41)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명상함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위대하신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 1.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3. “어머니 보소서. 아들입니다.”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돌봄과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대신 지신 죄 때문에 고통 당하고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거룩한 절규 를 보게 됩니다. 5. “내가 목마르다.” 인간들의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요청하시는 갈증입니다. 6. “다 이루었다.” 거룩한 희생으로 모든 죄를 속하셨다는 하나님 어린 양의 승리의 외침 입니다. 7. “아버지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묵 상 1. 용서함 받은 우리는 역시 남을 용서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2. 훗날 우리가 남길 유언을 생각해 보자.
    제 7일(토요일) 무덤 속의 예수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며.. (막 15:42-47).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청하여 자기를 위하여 새로 만들어 둔 무덤에 장사지냈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제자였지만 이제는 관헌의 박해와 친지들의 차가운 눈총을 무릅쓰고 용기있게 행동했다. 그는 당당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 인도를 요구했다. 예수께서는 그 자신이 무덤에 들어가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게 되셨다. 그는 무덤의 어두움을 제거하셨으며 그 공포 를 영원히 쫓아 버리셨다. 죽음이 그 쏘는 살로 그리스도를 상하게 했지만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그 위력을 끼치지 못하게 만드셨다. 묵 상 1.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2. 기독교인은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요? 3.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지낸 이들의 슬픔이 부활을 목격한 후에는 어떻게 변화되었나를 생각해 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이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처음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는 죄가 없고 허물이 없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세상이였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악의 탐이 쌓여서 교통하는데 큰 지장을 주었다. 죄가 들어와서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가 죽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죽지 안을려면 죄의 무네가 해결 받아야 하는데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길은 누군가가 죄의 대가인 죽음을 받아야 한다. 인간이 죄를 졌으니 인간이 죽는 것이 마땅하나 하나님은 그 죄의 짐을 인간에게 옮기시고 독생자인 예수님께 그 죄의 짐을 엊으셨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 바로 예수께서 우리의 죄 대속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나와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예수께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다. 사람은 참 많은 허물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완벽하게 만들지 않았다. 조금씩의 허물이 있어서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합력하게 하여 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꼼꼼하고 세심하더라도 남이 모르는 약점은 한가지 이상씩 은 꼭 간직하고 있다. 서로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 사람이 같이 모여서 사는 것이다. 의에도 있어서도 그렇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의롭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죄악에 노출되어 있다. 유혹에 넘어가고 음란에 빠지고 방탕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하지 말아야 할 부정도 하고, 우리는 교회에서 기도 할 때 몇번이고 다짐하지만 세상의 유혹을 쉽게 이기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이 찔리셨던 것이다. 하와의 선악과를 탐한 죄와 하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의 죄가 예수님을 찔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했다. 우리도 세상 살면서 하나님이 성경으로 금한 것을 범할 때가 있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죄 없이, 허물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을 덮기 위해서 찌리시고 피를 흘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의 죄의 씻김은 예수의 피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은혜를 받았으니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없지만 감사하는 마음에 다시는 죄를 짓기 않기 위해 깨어있고 하나님과 늘 동행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2. 예수께서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다.
    예수님은 정결하신 분이셨다.
    그 분은 죄을 모르셨다. 죄도 모르신 분이 죄로 덮혀진 우리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 인생의 끝이 아니셨다.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마귀가 죄를 인간에게 범하게 해서 '여자의 후손' 즉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으나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 예수님이 발꿈치 가 상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다시 사셔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는 위대한 역전승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므로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시고, 병을 이기시고, 저주를 이기시는 위대한 승리자가 되셨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 부활, 내 부활이고 예수 승천, 내 승천이되고, 예수 보좌, 내 보좌가 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죄로 인해 상하기 하였으나 그것이 위대한 승리로 변화되었다.
    3. 예수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 누군가 잘 못을 했으면 징계를 받아야 마땅하다. 범죄에는 반드시 형벌 이 따르기 마련이다. 죄를 진 것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죽음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그 분이 직접 사람 옷을 입고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회초리 를 대신 맞으셨다. 그로 인해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징계 받을 사람이 평안한 걸 봤어요? 징계받을 사람은 늘 초조하고 두려움을 마음 속에 달고 다니지만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은 담대하다. 누구에게도 떳떳할 수 있다. 이 체험을 바나바 는 직접했다. 바나바는 아주 흉악한 죄인이였다. 그는 많은 가정을 파괴하고 강도질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가 로마군에 체포되어 십자가의 형을 받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바나바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운명이였 는데 갑자기 예수라는 사람이 잡혀와서 군중들 앞에서 섰다. 빌라도가 보기에는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형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군중들이 말하기를 자신을 왕으로 칭하는 사람 을 그냥 살려둔다면 당신을 로마왕에 충신이 아니라고 외치며 예수의 사형 을 독촉했다. 마침 유대인의 전통인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월절에는 한 죄인을 석방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빌라도는 예수와 바나바를 두고 고민했다. 마태복음 27장 21절에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라고 했다. 빌라도는 바나바와 예수 중 누구를 십자가에 못 박을까 군중에게 묻자 군중들은 예수를 못 박으라고 이구동성을 외쳤다. 26절에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고 나와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나바의 자리에 달리신 것입니다. 바나바는 예수님 때문에 풀려난 셈입이다. 이것을 보고 우리도 예수님의 은혜를 본 크고 작은 바나바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평화는 그저 내려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시도의 은혜 안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그 분의 보혈이 우리를 정케하셔서 죄사함을 받는 것이지 예수님을 떠난 사람까지 정케되지 않다.
    4.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중에 구원 다음으로 치료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인류는 항상 병마와 싸워야 했다. 하지만 사람이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없다. 기술 발달로 인해 과거에 치료하지 못한 많은 병을 고칠 수 있지만 아직도 치료하지 못하는 병이 많다. 그 당시 도 마찬 가지였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병자들이 왔습니다. 앉음뱅이가 일어나고, 중풍병자가 낫고, 장님이 볼 수 있게 되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죽은 자 까지 살리셨다.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 우리의 구원과 죄사함만 볼 뿐 아니라 우리의 병 도 고침 받았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이미 그 자리에게서 합당하게 고침을 받았다. 우리는 이미 낫은 사람이다. 고침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 몸에 병마가 있다면 예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한다. 그것은 마귀의 불법 주차입니다. 쫓아내시기 바란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은 수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당하심으로 우리가 누리는 은택이 많다. 시편 103장 2절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라고 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은택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기억 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벌어서 스스로 타고난 운명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 자신을 위해 큰 대가를 치뤘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매주 14,000 여명의 회원님들에게 한번씩 보내는 칼럼입니다 . 서울 강서교회 김창환 목사(문지기) 드림 양천구 신정로 11길 63 강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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