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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위한 종교개혁 7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19-07-18 (목) 07:22 4년전 1749  

한국의 교계에서 그래도 공인된 개역을 수정한 개정판을 보고 부족한 많은 부분을 지적하였다. 지적하려고 지적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잘 번역된 너무나 많은 부분을 더 부족하게 수정한 것이다. 개정수정은 개역번역에 비해서

원어실력이 좀 더 부족한 듯 하고

영어 실력도 좀 더 부족한 듯하고

한국어 국어 실력도 좀 더 부족한 듯하고

문학적 이해와 감각도 좀 더 부족한듯 하며

성경 전체에 대해 좀 더 풍부하고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개역 팀의 번역에 익숙하여 비교하여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읽으면서 너무나 이상하게 어떻게 이렇게 수정하였나 하였고 읽을 때마다 또 다시 느끼기도 하고 신뢰감이 더 적다는 것이다. 교계 공인이 아니라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여러 번역 본 중에 한 두 번역 정도는 그래도 실력과 정성 그리고 참고할 만 할 부분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번역본의 부분은 제멋에 겨워서 또한 자기의 사상과 감성을 담아 번역한 듯한 모습이 역력히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는 쉽게 번역 한다고 간결보다 불필요하게 덧붙이거나 늘려 오히려 문장이 더 복잡하고 어렵게 보이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계에서 공인되어 공적으로 교회가 다 보는 번역이 아니면 구태여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번역도 장점도 있을지 모른다. 일반 서적도 그 번역을 보면 그 번역자를 어느정도 알 수 있다. 경전 번역자도 번역을 통해서 그 번역자의 성경이해와 신학과 신앙 실력 등등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어라고 할 수 있는 영어번역 성경 중 격찬하는 번역이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미 지적하였지만 개정 수정번역 중

번역자는 '증언'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꽂힌 듯 하다. 증언은 말로 하는 것인데 어떤 표적의 기적은 사건이기에 증거가 적절한데 증언으로 수정을 한 부분도 언급하였다. 이것이 어떤 번역자 개인이 좋아하거나 선호하는 단어에 집착하고 불필요하게 아니 더 부족하게 수정한 한 예라 할 것이다.

 

또한 '아들'을 의미하는 '소자'를 '작은 자'라고 수정하였다는 것이다. 한문으로 소자는 아들이라는 뜻이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작은 자라고 수정하니 오해할 수 있거나 얼마나 놀라운 그 내용의 의미를 알지 못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을 '주는'을 성령을 '베푸는' 이라는 단어로 불필요하게 수정을 하였다. 베풀다라는 말이 더 거룩하거나 높임말로 보여서 그러한지 모르나 성령을 주시는 성령을 받는 이러한 내용이 서로 정확히 연결이 되고 좋은데 베풀다라고 수정한 것이다. 세례를 주다 받다 무엇이 문제인가, 주다 대신에 베풀다로 수정은 무슨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인가.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는 분이라는 내용에 크고 놀라운 의미가 있다. 그것을 알면 되는데 성령을 베푸시다는 주다와 어떻게 다르며 무슨 뜻으로 알고 수정하였는지 의아하다, 좀 더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여 번역자의 유식을 과장하고 좀 더 뭐가 있어보이는 것인가, 경전은 사람이 과장을 안해도 사실 그 자체가 형언 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내용인 것이다.

사람들이 더 수식하고 덧 붙일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리고 성경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한 문장의 단어를 덧 붙이거나 수식어를 넣으면 연결된 다른 문장과 정확히 안될 수 있다. 정확하게 번역하여야 연결된 다른 구절과도 정확이 연결되어 더욱 놀라운 감동을 주는 것이다. 원래의 사건이 그러하고 원본이 그러한 것이다.

 

다음은 한국교계의 현주소를 보는 한 안경일 것이다.

한국의 교회사에서 반성할 점이 많겠지만 여기서 두어가지를 둔다면

잘 번역 된 개역을 더 부족하게 수정하여 개정판으로 한국 교계에 내어 놓았다는 것

한국의 교인들을 수평이동의 방법으로 자기의 교회당의 숫자 채우는 목적의 소위 교회 숫자 성장론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최근 한국교계 십 수년 동안 목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수평이동의 교회성장론이 없었고 민족의 복음화에 최선을 다하였다. 교회는 놀라운 숫자적 성장이 있었던 것이다.

말씀 연구의 사경회적 심령 부흥회도 많았던 것이다. 남의교회 또는 이웃교회 교인 수평이동의 성장론은 공적으로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수평이동의 교회 성장론에 모두가 올인하다보니 생명의 양식인 성경 번역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거나 다른 이유들로 더 부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 것이다. 소위 대형 초대형 그 자체가 안 좋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대형 초대형 교회당도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문제가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일 것이다. 왜 그렇게 너도 나도 숫자적 건물의 대형교회를 지향했는지 반성할 점이 있다 할 것이다. 왜 근래 한국교계가 초대형 건물과 수평이동의 숫자 성장을 지향하고 올인하였는지 자성해보면 유익이 될 것이다.

어떤 신학도가 신학교에서 무슨 신학자의 이름을 듣고 교회 설교에서 인용하니 친애하는 어떤 농촌의 성도님들이 그 이름이 농기구 이름인가 외국의 무른 음료수 이름인가 하며 졸다가 말다가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적절한 인용과 실례와 예화가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 유식과장을 위한 증거는 피차  별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래 저래 지금의 상황에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성경의 개정판 수정을 보고 수평이동의 숫자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반성하며 말이다. 외국의 신학자들의 학설이 대단 것인 줄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슨 죤 웨퍼라고 하면 이름도 틀리게 말하며 자신의 사상을 합리화 할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달려가야 할 것이다.

1). 한국교회가 잘 번역된 한국어 성경과 잘 번역된 영어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평신도로 그러한다면 영적인 면에서도 성장이고 세계어 영어 실력 면에서도 유익이 되어 국력이 될 것이다.

2). 신학교에 가서 외국의 신학자들에배울 귀한 내용이 있으면 나라를 초월하여 당연히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별 도움이 되지 않고 혼돈스러운 신학 학설을 배우면 자신도 혼돈 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신학설보다 더욱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은,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곳의 지리 역사 문화 풍습 자연 등등을 잘 배우면 성경이해에 더욱 도움이 되고 크게 유익할 것이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곳의 역사 지리 문화를 잘 안다면 성경 이해와 해석에 더욱 도움이 되면 감격과 생동감 가득 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배워야 하는데 어떤 혼돈스러운 유행신학이나 배운다면 시간이 너무나 아까울 것이다.




=. 성경연구 (Bible study)

많은 부분이 있지만 다시 몇 부분을 보자.

번역을 보면 번역의 그 언어를 보면 번역자의 성경이해 신앙 신학 실력등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개정은 증언이라는 단어를 참 선호하고 좋아하는 것 같다. 증거는 사건 사실을 말하고 증언은 사람의 말을 통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의 본문도 개역의 증거가 더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1.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hen the disciples went out and preached everywhere, and the Lord worked with them and confirmed his word by the signs that accompanied it.'

1. 요1:33

다음의 주라 라는 단어를 개정은 베풀다 라는 단어로 수정하였는데 그대로 두는 것이 의미깊고 쉽고 정확하다.

성경은 서로 연결된다. 예수님은 과연 성령을 약속을 하셨고 성령을 주셨다. 이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베풀다는 말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선명하지가 않다. 주다 가 쉽고 정확하고 의미깊다.

(요1:33 )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 부록,

근래 어떤 교단에서는 누구는 그 교회에서 청빙될 수 없다는 희한한 제한법을 소위 일부 유력 교단에서 만들기까지 하였다. 또 어떤 대형 교회 앞에서는 일부 교인들이 시위를 하는 모습이 있다. 자기들이나 잘 할 일이지 그들이 성경적으로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는 일을 세상적 시각으로 보고 자기들이 옳다고 시위하는 모습은 무엇이라고 표현하기도 그렇다. 성경을 모르고 세상적 시각으로 보고 판단하고 세상의 자기들의 시각으로 종교를 교회를 판단하기도 한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언젠가는 교회를 훼파하는 세상의 적그리스도 세력 안티그리스도 세력이 교회를 훼파하는 세력이 있었다고 모른다 결과적으로 여기에 동조하여 교계에 손해를 끼쳤다고 하는 것을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도 성경을 잘 모르고 세상 시각으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반 상식적으로 교회의 일을 교회의 교인들이 선택하고 결정할 일을 그 사정도 모르는 다교회나 세상에서 감놓아라 대추놓아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식적인 일들을 타교회에서 교회 밖에서 왈가 왈부하며 자기들이 옳은 듯 하는  희한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을 보아서도 말씀으로 달려가야 한다.)


(성경을 계속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나아가야 하는데 목회자도 성경연구가 부족하였는가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어떤 교계 단체 목회자가 정치권에 연결되어 난리법석을 한다는 표현이 적절한가 잘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보는 한 이유가 그 분의 말에서도 나타나 있다.  본 웨퍼를 죤 웨퍼로 인용하며 무슨 말을 하였다는 것인데 알만한 사람을 속으로 너무나 어이없어 웃을 것이다 그 신학자는 독일의 젊은 신학자인데 왜 독일 신학자의 말을 그렇게 인용하는지 의아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 때 일부 신학계 또는 진보라할까 하는 곳에서는 너도 나도 수없이 그 이름과 예를 들어 인용한 것이다. 왜 그 외국의 신학자의 이름을 그렇게 인용하였는지 의아하기도 할 수 있겠지만 누군가 어디에서는 수십 수백번도 더 들었을지 모른다. 어떤 시대상황에서 너도 나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름을 제대로 몰라 본 웨퍼를 죤 웨퍼로 인용한 것이다. 본 훼퍼의 본을 존으로 인용하는 것을 보고 아는 사람은 너무나 어이없다 할 것이다. 그 분야에 공부가 너무나 빈약한 모습으로 아는체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인 것이다. 새삼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 사람 이름 갖다붙여 자기의 무엇을 합리화 하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을 웃프게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한국교계은 성령으로 말씀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다.

성경을 묵상하고 인용해도 충분할 것인데 구태여 누군가 아이디어를 어설프게 제공해 준 내용을 대중들에게 아는 체하고 유식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듯하다. 그 분야에 너무나 공부가 빈약하다고 아는 분들은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성경의 말씀을 잘 읽고 전하면 되지 무슨 어떤 신학자의 말을 인용해야만 유식한 것으로 보일 것으로 생각하고 한건 했다고 생각했는지 말이다. 그것도 이름도 틀리면서 말이다. 비슷하게나 발음하였다면 외국어라 그러하다 하겠지만 이것은 그렇게 변명하기에는 너무나 멀다 할 것이다. 이 기회에 잘 판단하는 기회가 되고 대오각성을 하고 더욱 말씀으로 달려간다면 한다면 피차 그리고 한국교계에도 더욱 좋을 것이다.)

(찬송가의 수정도 문제가 많다. 왜 기존의 찬송가의 가사를 구태어 필요이상으로 수정하였는지 더 나은 실력도 그 무엇도 아닌데 어떤 교만의 모습 무슨 지적 자랑이나 과시의 모습인가, 그리고 새로운 곡도 가사가 신학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듯한 내용도 있다. 가령 예를 들며 하나님의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셔서의 가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셔서 라고 해야 맞다. 찬송가 가사의 수정을 보아도 실력이나 그 무엇이 나은 것 갖지 않은데 수정을 많이 하였다. 사실 찬송가 곡이 많지만 젊은이들과 함께 힘차고 감격적으로 부를 가사가 의외로 많지 않을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분에 최선을 다하고 실력과 달란트 사명감을 가진 많은 목회자와 성도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 교회는 수평이동의 교외 성장론에 올인하고 성경 연구와 묵상에 등한이 한 점이 없는가 반성하며 말씀을 향한 열심히 종교개혁이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 -ing )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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