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찬송가 가사와 개혁
찬송은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한국의 찬송가 곡을 보면 세계적인 명곡에 의해 불려지고 있기도 하다. 성도는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세계적인 명곡을 매주 또는 거의 매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귀하고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리고 그 가사는 영감어린 많은 가사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교통하고 응답받는 찬송인 것이다. 찬송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은 영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대단히 좋다고 본다. 우주와 사람 그리고 자연은 하나님의 리듬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갓난 아기도 아니 조금 더 크게 되면서 음악이 나오면 그 리듬에 맞추어 흥겹게 같이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매주 또한 거의 매일 자발적 의무적으로 찬송의 노래를 부른 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복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한편 한국의 찬송가는 외국의 명곡에 외국인이 작사한 내용이 많다. 또한 이제 보니 가사가 많은 부분이 같이 부르기에는 어떤 주관적인 특별한 경우에서의 내용의 가사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찬양 감사 긍정보다 막상 가사를 보면 현실의 자기의 상황에 전혀 공감이 안되는 가사가 의외로 많다는 것도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상황과 현실에 맞게 노래의 가사와 곡을 만들어 부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러한지 모르지만 특별히 대부분 노래를 잘하는 것 같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 전국민이 가수라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지정학적인 위치에서도 그렇고 긴 역사에 특별히 한이 많은 이유도 있었던 것인가. 음악과 시는 인생의 감정의 굴곡과 애환이 가득한 사람이 작사 작곡하여 자신과 상대방을 감동케 할 것이다.
찬송가를 현실에 맞게 과연 이 가사가 대부분 성도님들이 공감하게 부르겠는가 검토해 보았어야 할 것이었다. 어떤 가사들은 대부분 성도들에게 공감이 덜한 너무 특별한 자기 주관적인 가사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모두가 어떤 상황에서도 공감하여 부를 수 있는 좀 더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현실감각에 맞는 감동의 가사들이 더 많이 수록이 되었으면 좋을 것이다.
그것은 일단 찬송가에 수록이 아니어도 부록이나 복음성가로 많이 부를 수 있게 하여 많은 검증 후 찬송가 안에 수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보니 찬송가의 더하는 수록이 가사와 곡을 보고가 아니라 다른 어떤 무엇에 의해 수록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도 할 것이다.
그런데 개정 찬송가는 새 찬송가의 가사와 곡을 수록한 것 뿐 아니라 이미 부른 찬송가의 가사를 상당히 바꾸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왜 이렇게 더 부족하게 많은 부분을 개정하였는지 하는 말을 들었다. 아마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경전의 부족한 수정이 아니기에 구태여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지만 통합 찬송가에 더하여 수록한 것은 그러하지만 왜 그렇게 가사들을 바꾸었는지 의아하다는 것이다. 이미 익숙한 가사기도 한데 말이다. 그리고 수정한 가사의 단어가 더 적절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이미 지적한 부분도 있지만 몇 부분 예를 들어보자.
1. 찬송가를 부르다가 어 왜 이렇게 가사를 바꾸었지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그것도 더 부족하게 개정한 부분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 거의 비숫한데 구태여 수정한 부분도 있다. 또 어떤 찬송가는 대단히 자주 부르고 유익한 내용이 있는데 새 찬송가에서는 수록하지 않고 빼어버린 곡도 있다. 예를 들면 ,,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나의 도움 어디서 올꼬 ,, 물론 이 가사에 곡을 좀 더 생동감 있거나 호소력 있는 곡을 붙였으면 하는 것이다. 이미 수록에서 제외하였지만 말이다.
1. 돌아보사 (통) - 돌보시사 (개정400장,통463)꼭 개정해야 했는지 하는 것이다. 어감상으로도 그렇다.
그 외에도 많을 것이다. 왜 잘 검증되고 평가받은 새 찬송가를 수록에 열심보다 이미 잘 부르고 있는 많은 가사를 수정하였는지 그것도 많은 부분을 더 부족하게 수정하였다는 평가가 많은 듯 하다. 또한 그러한 부분이 많은 듯 하다. 경전인 성경이 아니기에 큰 관심과 언급을 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다.
1. 272(330)을 부르는 중에 '나옵니다, 옵니다'가 '나갑니다' '갑니다'로 바뀌었다.
지금 주께 나와있는데 ,, 자꾸 ' 나갑니다. 갑니다'라,. 부르면서 마음이 그랬다. 뉘앙스도 그렇고, 이미 와 있는데,, 갑니다라,, 가는 중이 아닌데,, 계속 부르면서 마음이 그러하였다. 가는 것이 아닌데, 와 있는데,,.
그런데 누가 이 기존의 가사를 바꾸었고 누구의 동의를 얻어서 이렇게 바꾸었지 강한 의문이 생겼다. 다시 페이퍼 북 생각이 났다. 가볍게 바꾸어서도 안 되는데,. 이제 쉽게 바꾸기도 어렵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1. 319(새). 가능하면 성경에 있는 칭호로 하는 것이 좋다. '독생자' 이다. 또는 성자라고 할 것이다. '독생성자' 라는 칭호는 개인적인 신앙으로 부르는 것은 무관하며 공적 찬송가에는 성경칭호대로 독생자가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독생성자' 주셨도다' 보다 '독생자를 주셨도다' 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독생자 라는 말은 깊은 뜻이 있다.
요3:16에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였다. 구태여 수식어 덧 붙이지 않아도 그 칭호에서 이미 모든 내용이 완벽하게 들어 있고 다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그 칭호 사용하는 것은 상관없다. 공적으로 함께 부르는 찬송가는 성경적 표현 그대로 하는 것이 좋다. 다른 부분들도 보면서 이왕 새 찬송가를 출판하려 하였으면 조용한 가운데 더 많은 검토를 했어야 했다고 본다. 역시 페이퍼북 생각이 난다.
1, 찬281
간사한 ** 이라니, 야곱은 신앙과 인내와 노력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노력과 인내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 신앙 결국은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축복해 주셨다는 확고한 신앙관이다. 그런데 어떤 작사자 분이 간사한 ** 이라고 가사를 쓰므로 부르는 사람마다 그 사람에 대해서 그러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아주 부적정인 수식어로 졸지에 찬송가 가사에 들어와서 한 두 번도 아니고 찬송을 부를 때마다 부정적인 인간상으로 많은 성도들에게 두고 두고 입에 두뇌에 각인되게 하였다. 야곱은 부정적 모습도 있지만 인간적인 끈질긴 노력과 인내의 인간상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인간의 노력보다 하나님 축복관의 신앙의 모습이다. 그런데 한 사람을 부정적 모습의 한 단어로 각인하여 가사를 쓴 것이다.
그것은 너무 개인적 주관적 입장의 표현이며 특별히 아곱의 경우는 전혀 다르게 가장 긍정적으로 볼 인간상을 한 단어의 부정적 단어로 규정하여 부르게 한 가사가 찬송가에 있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야곱에 대해서 잘 모르는 초신자에게도 한 신앙인 인격을 그렇게 주입시켜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 장의 다른 가사는 그래도 그렇다하고 그러한 가사를 부르기를 원하면 부를 것이다.
그러고 이러한 류의 가사는 아침 대 예배의 찬송가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찬송으로는 좀 그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류의 가사 주일 아침의 대예배에 부르기가 좀 그러한 가사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좀 더 씩씩하고 진취적이고 긍정적이고 함께 모두가 거의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는 가사들의 찬송가를 부를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성도 모두 함께 힘을 얻고 감동을 받는 좀 더 씩씩하고 진취적인 가사와 곡이 더 많아야 할 것이다.한편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돌리는 가사들은 언제 어디서나 모두가 함께 부르기에 적절하다.
너무 특별한 경우에만 부를 수 있는 가사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한편 신학도들에 의해 찬송가 가사와 곡에 대한 많은 연구와 논문이 나온다면 좋을 것이다.
1. ' 하나님이 사람 몸을 입으사' 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 몸을 입으사, (137)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옷을 입은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옷을 입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두분이시라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가사는 '하나님이 사람 몸을 입으사 ' 라고 하여야 하였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사 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으사 이면 하나님을 두 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기독교의 복음을 이방에게 전할 때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는 교회사의 역사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이 아들을 낳으셨다는 것이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의미하는 것이라는 이해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다는 것 그렇다면 왜 또 외아들이냐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으사 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사 가 그 내용이 정확히 강렬하게 전달 될 것이고 사실이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시므로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른다 할 것이다.
1. 독생성자를 독생자로 하여야
그러므로 한국어로 번역된 사도신경도 독생자를 외아들로 수정한 것은 원문을 잘 번역한 것이 아닐 것이며 더구나 외 아들을 또 수정하여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말은 생각해 보면 더 오리무중 일 것이다. 혹 그것이 더 유식한 용어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뜻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더 오리무중의 단어가 아닌가 할 것이다.
개역성경의 독생자 (the only begotten of the Father. 요3:16 ) 는 참으로 정확하게 잘 번역하였다.
독생성자라는 말이 성경에 있는가,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독생자라고 하였다.
독생성자라고 하면 좀 더 거룩하고 그럴 듯해 보일지 모르지만 독생성자가 사람이 되었다면 하나님이 두 분이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물론이지만 찬송가 가사도 성경에 근거하여 정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당연하고 감동적이다. 찬송가 가사로 잘못 이해하게하는 것은 평생 갈 수 있는 것이다.
바라건데 백년이 넘은 기독교 역사에 한국인의 성도분들에 의한 곡과 가사를 담은 많은 복음송성가 찬송가 가사와 곡이 있어야 하였다. 그런데 그러하지 못한 것은 한국 교계가 온통 수평이동의 숫자 성장에 올인하고 거기에만 거의 모든 교회가 관심을 갖고 집중한 이유가 아니었는가 반성할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가 지금쯤은 감동적인 명곡과 명가사의 복음성가 찬송가의 곡과 가사가 많이 나왔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 국민의 음악감각을 보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시 한번 교인의 영적 성장으로 문화 예술 음악등의 부분에 많이 나타났어야 하는데 오로지 남의 교인의 수평 이동으로 교회성장하는 그러한 성장에 올인하다 보니 개인적인 신장의 성장과 표현에 등한 한 것이 아닌가 자성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찬송가 가사와 곡에 대하여 전문가와 신학도들의 많은 연구와 관심으로 가사를 통해서 성경을 배우기도 하고 더욱 감동적이고 영감어린 가사와 곡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교통하며 신앙에 감동을 주는 많은 유익한 가사가 곡의 나와야 할 것이다. 성도임들이 많이 부르는 찬송을 검증 후 찬송가에 수록하면 될 것이다.
( 초등생의 필수 곡이라는 역사는 부른다의 동요는 그 노래를 부르므로 노래를 통해서 역사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찬송가도 성경의 귀한 내용을 가사로 만들어 곡을 붙여 부른다면 성도들의 성경교육적으로도 좋을 것이다. 별 유익이 없는 필요 이상의 서구의 학설이나 신봉하고 배우는데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이러한 찬송가의 가사와 곡을 만들고 검증하고 부르게 하는 이러한 노력과 열심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라도 더욱 성도의 하나님 찬양과 영적 성장과 그 표현이 문화 예술 찬송가 가사와 곡에도 많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 성광교회 이동원 목사 드림>
( - ing )